주요기사

[경향] “잘못된 軍문화·전통 혁파할 때”

968

[사람속으로] “잘못된 軍문화·전통 혁파할 때”












▲표명렬 회원     ©경향신문
전쟁의 참상과 야만성을 가장 잘 아는 이들은 그것을 몸으로 겪은 사람들일 터이다. 탁상의 정연한 이론이나 연단의 화려한 변설(辯說)도 제각기 한몫씩은 하겠지만 피와 살이 튀는 전장에서 죽고 죽이는 광경을 직접 경험한 이들의 호소력과 진정성에 비할 바는 아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베트남 전에도 참전했던 예비역 장성이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고 군개혁에 대해 진보적인 견해를 밝혀오다 재향군인회 등 군관련 단체들로부터 제명될 처지에 놓였다. 장성출신이 어떻게 파병에 반대하느냐는 군관련 단체와 극우수구세력의 비난에 대해 그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당당하게 맞서고 있다. 베트남전에서의 수많은 전투를 통해 전쟁, 특히나 명분없는 전쟁에 참여한다는 것이 얼마나 인간의 이성과 양심에 거스르는 행위인지 알게 됐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표명렬 예비역 육군준장(66)을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그의 집에서 만났다.


재향군인회등 관련단체 제명될 처지


표명렬은 ‘경향신문 기고 등을 통해 이라크 추가파병을 반대했고, 한국군의 정통성을 부정했으며 모교인 육사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재향군인회 등의 징계사유에 대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헌정을 짓밟고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국가반란범은 그냥 두고 나를 제명하려 하느냐”고 반문하면서 “도대체 누가 군의 명예를 훼손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육군 정훈감을 지낸 그는 이미 지난해 말 육군 정훈장교들의 모임인 정훈동우회로부터 제명됐으며, ‘제명할 테니 소명을 하라’는 재향군인회의 통보에 대해서는 ‘대응할 가치도 없어’ 응하지 않고 있다. 그는 “군관련 단체들이 아직도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한 채 극우냉전세력의 행동대원 노릇을 하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


표명렬은 “전쟁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안다”면서 “외국의 경우를 보면 반전평화운동의 맨 앞줄에는 군 출신 인사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심지어 조지 부시 미 행정부 안에서도 전쟁을 경험한 4성장군 출신의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그나마 온건하다는 것이다.


육사 18기인 표명렬은 중위 시절인 1965년 맹호부대 기갑연대 11중대 1소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가했다. 그는 월맹 정규군과 맞붙은 두코 전투에서는 혁혁한 전공을 올리기도 했지만 맹호 5호 푸카산 전투에서는 참패의 쓰라림도 경험해야 했다. 특히 푸카산 전투에서는 1분대장 정원모 하사가 베트콩 저격병이 쏜 총에 자신 대신 맞아 피를 쏟으며 전사했다. 표명렬은 “갈갈이 찢긴 피아의 시신 더미와 가족을 잃고 울부짖는 월남 민간인들을 보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표명렬이 베트남에서 목격한 한국군의 실상은 그에게 충격과 함께 도대체 군대는 무엇이며 군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의 질문을 남겼다. 전공 세우기에 혈안이 된 고위 지휘관들은 부하들의 안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무리한 명령을 내리기 일쑤였고, 임진왜란때 왜군이 그랬듯이 적의 사체에서 귀를 잘라 전과를 보고하게 하는가 하면, 민간인에 대해서도 잔인한 고문을 하라고 다그쳤다.


베트남 판 ‘총풍사건’도 있었다. 동굴수색을 하다가 베트콩이 숨겨놓은 다량의 무기를 발견한 어떤 부대에서는 ‘무기습득’만으로는 훈장을 받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끝에 묘책을 짜냈다. 연대전투단훈련(RCT)에서 대항군을 운영하는 것처럼 적군을 만든 뒤 교전상황을 조작하여 시나리오대로 전투를 개시했던 것이다. 모든 상황은 정식으로 보고됐고, 병사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실제로 피를 흘려가며 싸웠다.


귀국한 뒤 그는 엘리트 장교로 입신할 수 있는 길을 포기하고 곧바로 정훈병과를 선택했다. 군개혁, 특히 군의 ‘소프트 웨어’인 정신전력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재향군인회의 제명 파동이나 월남전 총풍사건 등의 근본원인에 대해 표명렬은 “한국군에 민족의식이나 민족자존심이 결여돼있고, 무엇이 진정한 군인의 본분인지에 대한 성찰적 문화가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대한민국은 상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잇는다고 헌법 전문에 나와있는 대로 우리 군의 효시는 임정의 군대인 광복군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국군의 날도 육군 3사단이 38선을 돌파한 10월1일이 아니라 광복군 창설 기념일인 9월17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변화 못 읽는 극우냉전세력 안타까워


육군 정훈감으로 재직중이던 86년 표명렬은 제46회 광복군 창군일을 맞아 서울 신설동 광복군동지회 사무실을 찾았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서너 평의 사무실에는 일평생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싸웠던 독립투사들이 힘없이 모여있었다. 표명렬은 군수뇌부를 설득한 끝에 이들을 육본에 초대했다. 의장대 분열때 ‘국군으로부터 이런 융숭한 대접은 처음 받아본다’며 감격해하던 이들은 만찬석상에서 끝내 참았던 격정을 터뜨렸다.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비장한 음성으로 ‘광복군가’를 부르는 이들을 보고 표명렬도 목이 메어 따라 불렀다.


표명렬은 “광복군의 정신이 이어지지 못한 것은 해방직후 일본군 출신 등 친일세력들이 우리 군을 장악했기 때문”이라며 “스페인에서 프랑코 사후 가장 먼저 육군사관학교 등 군의 중요부분을 개혁했듯이 우리도 군부독재 종식후 그같은 작업을 서둘러야 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모교인 육사에 대해서도 그는 할 말이 많다. 표명렬에 따르면 육사의 교육과정 자체가 민족의식 함양과는 거의 무관하게 이뤄져있다는 것이다. 그는 “항일무장투쟁사에 길이 빛나는 청산리 대첩, 봉오동 전투 등을 이끈 기간요원들은 전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며 “육사의 정신적 모태는 당연히 신흥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신흥무관학교의 창립자이자 초대 교장인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이야말로 육사의 초대교장”이라며 “그런데도 육사교정에는 석오 대신 미 밴플리트 장군의 동상이 서있다”고 말했다.


표명렬은 “육사 출신들이 5·16 및 12·12 군사쿠데타, 광주학살 등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가장 부끄러운 세 가지 역사적 과오를 저질렀다”면서 “육사의 교육과정이 제대로 됐더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80년 광주항쟁 당시 국방부 정신전력선임연구원이었던 그는 ‘선무공작을 하라’는 명령을 받고 현지에 파견됐다. 완도에서 태어났지만 고교(광주고)까지 다녀 고향이나 다름없는 광주에서 계엄군의 만행을 목격한 그는 큰 충격을 받았고 자신이 본 그대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요시찰 인물’로 찍힌 그는 대령 계급장을 달고 중령이 맡는 3군단 정훈참모로 좌천됐다. 임지로 떠나면서 ‘저 쫓겨납니다’라고 하자 노모는 ‘네가 자랑스럽다’고 말했고 그는 가슴으로 울어야 했다.


광복군 정신 되살리고 육사 ‘수술’해야


이전에도 표명렬은 정치적인 사건을 둘러싸고 수뇌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당시 이를 정권에 유리하도록 전파하라는 육본 담당 보안부대장과 싸워 육탄전 일보직전까지 갔으며, 4·13 호헌교육을 확실히 시키라는 지시에는 ‘군이 왜 정치에 개입해야 하느냐’며 거부했다.


그는 전역 이후 곧바로 한국정신교육연구원을 세워 군개혁과 관련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또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등에도 참여하고 있다. 이 땅의 평화와 개혁을 위해서는 예비역이 아닌 ‘영원한 현역’인 셈이다.


표명렬은 강의하듯 자상하게 말을 이어나갔으나, 군개혁과 관련한 대목에서는 정치인의 대중연설처럼 사자후를 토했다. 그는 반군(反軍)주의자가 아니었으며, 자신이 군인이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또 ‘천추만리 바람결은 이야기하리’라는 교가를 부를 때면 지금도 젊은 날의 열정에 가슴이 뜨거워진다며 모교 육사에 대한 사랑도 숨기지 않았다.


다만 그는 우리 군의 잘못된 문화와 전통에 대해 반대하고 있으며 이런 것들을 혁파해야 군이 국민의 품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강원도 양구 21사단 말단 소총수로 근무했다는 기자의 말에 표명렬은 ‘아따, 지지리도 빽이 없었구먼’이라고 껄껄 웃은 뒤 조만간 ‘재향군인’들끼리 뭉치자고 제의했다.


〈손동우기자 sdw@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4년 01월 25일 11:29:03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