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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중앙대 문창과 교수) |
그런데 얼마 전에 출간된 복거일씨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는 지금까지의 친일파 단죄 주장에 일침을 가하는 새로운 시각의 친일파 이해론(옹호론과는 다른)이다. 복씨는 친일 행위라는 개념에는 법적 측면과 함께 도덕적 측면이 있어 그 둘을 엄격하게 구별해야 하는데, 도덕적 기준은 시대 상황에 따라 상당히 모호해진다고 한다.
또한, “공식적이었고, 실질적이었고, 혹독했고, 길었던”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서 총독부의 강요에 큰 대가를 치르고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말한다. “지금 별다른 문제 없이 친일 행위로 규정할 수 있는 것들은 언뜻 보기보다 훨씬 적다. 그런 행위들로 이내 꼽힐 수 있는 것들은 아마도 독립운동을 한 조선인들에 대한 고문과 여자들을 속이거나 납치해서 ‘종군 위안부’들로 만든 행위 정도일 것이다”는 파격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우리 시대의 냉철한 논객인 복씨의 이런 주장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몇 가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일제시대의 그 모든 친일파가 광복후 취한 행동에 문제가 없었느냐 하는 점이다. 누구의 입에서도 민족 앞에 사죄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친일행위가 정계와 교육계, 언론계, 일반 공직사회 등에서 대대적으로 행해진 것은 살아남기 위한 보신책이었다고 치자. 경제계·종교계에서도 물심양면으로 행해졌지만 그것도 보신책이었느니 봐주기로 하자.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은 주로 문학인의 친일 행위인데, 그 이유는 ‘작가적 양심’의 문제와 연계되기 때문이다. 문학인이 양심을 저버리고 반민족적인 행위를 한 것까지도 상황논리를 가지고 ‘누군들 하고 싶어서 친일행위를 했겠는가’ ‘그 시대에야 어쩔 수 없었던 것’ 하고 다 덮어준다면 변절과 훼절을 포함하여 문학인의 반민족적이고 비양심적인 글과 언행을 옹호해 주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
이광수는 광복 후 자서전 ‘나의 고백’과 수필집 ‘돌베개’를 내는데, 복씨의 주장 그대로 “그런 상황에서 어디까지가 강제된 행위들이고 어디서부터 자발적 친일 행위인가”라는 변명으로 일관한다. 필자가 알기로는 채만식이 거의 유일하게 소설 ‘민족의 죄인’을 통해 민족 앞에 용서를 빈 작가이다. 그런데 그 작품 역시도 앞뒤가 꽉 막힌 상황에서 누가 죄인이고 누가 죄인이 아니냐는 변명을 담고 있다.
그렇게 많은 문학인이 친일적인 작품을 썼음에도 광복후 공식적으로 사죄하는 글을 쓴 이가 없었다는 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수치가 아닐까. 프랑스는 독일 나치에 협력한 사람들을 전후에 철저하게 처벌했다. 드골은 회고록에다 무려 1만명 정도를 사형에 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목숨이 경각에 이른 79세의 폴 투비에를 전후 50년 만에 찾아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친일 행위를 한 사람이 처벌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다. 1949년에 친일파는 7명만 실형을 받고, 그나마 1950년 봄에 재심청구 등의 방법으로 다 풀려난다.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에게 죄를 물으려 한 반민특위의 활동을 강제로 중단시킨 것에 대해 우리는 따져 묻지 않은 채 50년 세월을 흘려 보내지 않았는가.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에 대해 예우는 하고 있는가? 아니, 독립유공자는 다 독립유공자인가? 1993년 5월 12일 민주당 이해찬 의원은 국회 보사위에서 “지난해 말까지 포상받은 독립유공자 6077명 가운데 독립운동을 한 흔적이 전혀 없는 가짜 및 실제 공적보다 높게 평가된 유공자와 친일파 등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고 주장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은 총독부 촉탁으로 변절했음에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고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누워 있다. 그가 초대 광복회장으로서 독립유공자 심사를 했다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사학자들은 독립유공자 중 최소한 20명 정도는 친일의 흔적이 역력하다고 한다.
이완용과 송병준의 증손자 등 친일파의 후손들이 조상 땅 되찾기 소송에서 승소하고 있다. 송병준의 외손자는 자유당 때 장관까지 했다. 자유당 12년 집권 시기의 장관 96명 가운데 해외 망명객은 4명이었으나 친일 경력자가 30명이었다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나는 이런 이유들로 이번 국회에서 특별법안이 통과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으려 하지 않고 억울한 희생자가 많다며 변호를 해주는 데 대해서는 반대한다. 역사가 심판하지 않은 친일파에 대한 단죄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면 거기서 역사의 교훈이라도 얻어야 한다.
[[이승하 / 시인, 중앙대 문예창작과 교수]]
http://www.munhwa.com/opinion/200402/07/200402070101061419100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