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3일 오후 1시 30분, 일제강점하 피해자 200여명은 서울행정법원에서 ‘한일협정외교문서정보공개거부처분취소소송’의 판결을 초조한 마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년이면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지 60주년을 맞는 해이건만 이들은 그 동안 왜 강제 노역한 임금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지, 강제로 끌려간 이후 생사조차 모른 채 가족이 버려져야 했는지, 꽃다운 어린 나이에 근로정신대나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되어 모진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서 공식적인 사죄 한마디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지, 원폭피해의 그늘 속에서 숨죽여 살아야 했는지, 사할린 동토에서 귀환조차 못한 채 술과 시름의 세월을 보내야 했는지, 그리고 희생자의 유골조차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고 있는지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 기다린 것이다.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는 이날 판결에서 피고인 외교통상부장관에게 한일협정 외교문서 가운데 개인청구권과 관련한 문건 5건에 대해 공개하라는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외교통상부 관계자들은 이날 법정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상당히 당혹해 했을 것이다.
이번 판결은 ‘공공기관의정보공개에관한법률’과 ‘외교문서보존및공개에관한규칙’이라는 2중의 장벽을 넘는 획기적인 판결이며,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 전무후무한 결론을 내렸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지 않은 판결이다.
정보공개소송과 관련해서는 그 동안 비교적 관대한 판결들이 많았다. 그런데 외교적인 마찰을 가져올 수 있는 문건에 대해서는 그 동안 일본에서도 관련 소송이 전무하며(필자가 본 소송을 제소하기 이전에 판례를 검토하기 위해 일본인 변호사에게 문의한 결과), 더군다나 국내에서 정보공개법이 만들어 진 이후 처음 있는 소송이었다.
그 동안 당연시 해 왔던 국익이라는 절대가치와 개인의 권리가 맞부딪쳐서, 결국 개인의 존엄한 가치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외교통상부는 특별할 게 없다는 식의 논평을 했다. 그러나, 실제 재판에서 외교통상부는 한일협정과 관련한 일체의 문건이 공개될 경우 한일관계의 손상, 북일수교에 미칠 영향 등을 들며 재판부를 집요하게 압박했다. 특히 개인의 청구권문제와 관련해서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이미 소멸되어 원고들이 얻을 법적 이익이 없다는 식의 논리까지 동원했다.
특별할 게 없는 문건이었다면 정보공개법이나 외교부 규칙에 따라 30년이 지난 문서는 마땅히 공개되어야 했다. 그러나 외교부는 관련 문건 뿐만 아니라 왜 이 문건이 비공개 결정이 내려졌는지 회의록조차 공개를 꺼려했다.
이제 판도라의 상자를 열 수 있는 키는 재판부에서 외교통상부로 넘어갔다. 진정 한국의 외교통상부가 일본의 외무성이 아닌 이상, 자국민이 이토록 간절하게 원하고 있는 바람을 저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외교부 관료들이 항상 입에 달고 다니는 ‘진정한 국익’이 무엇인지를 냉정하게 되돌아보길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기대하고 있다.
글쓴이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사무국장이며,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올려져 있습니다.
[연합뉴스] “한일협정 일부 문서 공개하라”
(서울=연합뉴스) 류지복 기자 = 일제강점하 정신대, 위안부, 강제징용 등 피해자들이
일본이나 일본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한이 있는지 여부를 밝혀줄 한일협정 관련 문서를 공개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지난 65년 한일협정 체결이후 40년 가까이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는 한일협정 관련
문건을 공개하라는 판결이 내려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재판장 강영호 부장판사)는 13일 일제강점 피해자 99명이 `한일
협정 관련 57개 문건을 공개하라’며 외교통상부를 상대로 낸 정보공개 거부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본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중인 원고 53명에게 한일협정 문건 중 손해배상 청구권 관련 5개 문건을 공개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공개대상에 포함된 문건은 52년 1차 한일회담 때부터 63년 6차 한일회담 때까지 11년간
논의된 내용 중 청구권 관계자료와 이후 속개된 6차, 7차 한일회담 중 청구권 관련 보충자료를 포괄한 것으로, 청구권 협상 자료를 총망라한 것이다.
외교부는 그러나 “이미 알려진 내용인 데다 예민한 부분이 없어 외교안보연구원에 보관
중인 문건을 공개해도 큰 파장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며 법원의 판단을 존중할 의사를 피력하면서도 “다시 한 번 검토후 항소 여부를 결정하겠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원고들이 일본과 일본기업을 상대로 손배소를 제기한 이후 일본
측은 한일협정의 청구권 협정의 2조1항을 근거로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주장하고 있다”며 “따라서 원고 입장에서 과연 일본측 주장이 옳은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청구권협정의 합의과정과 내용을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그러나 이 문건에는 외교적 비밀에 관한 사항도 있어 외교관례 및 국제적 신
뢰관계 측면에서 비공개를 요청하는 일본측 입장을 존중하는 것도 국가적 이익에 부합하므로 신중을 기해야 한다”며 일부 공개 판결 배경을 설명했다.
재판부는 “원고들이 개인적 손배청구권이 소멸됐는지 여부를 알 권리는 헌법상 권리이
므로 이에 대한 제한은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며 “원고들의 나이가 많아 청구권 인정 여부를 판단할 기간이 얼마되지 않는 등 청구권 관련 문서를 공개할 필요가 있다”고 판시했다.
일제강점하 정신대, 위안부, 강제징용, 원폭 피해자인 원고들은 일본이나 일본기업을
상대로 이미 소송을 냈거나 예정하고 있는 이들로, 소송 과정에서 일본측이 한일협정을 들어 원고들의 손배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주장을 제기하자 이 문건을 포함한 한일협정 문건을 공개하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jbryoo@yna.co.kr (끝) 2004년 2월 13일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