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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명 작업 손놔, 일제잔재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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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남 3.1운동 불당긴 군산의 오늘


 


극일(克日)은 없다.

한강이남 최초의 3·1운동 발원지이자 일제수탈사 현장의 보고(寶庫)인 군산지역이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려는 사업추진의지는 물론 구암동산의 성역화사업에 무관심, 뜻있는 시민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또한 군산지역은 독립항일투쟁사에 주도적 역할을 해온 고장답게 이들에 대한 재조명작업은 물론 업적을 기릴 수 있는 책자편찬이나 기념관 건립 등이 전혀 없어, 이에 대한 시민역량 결집이 아쉽다는 여론이다.

△ 역사교육의 현장= 구암동산의 3·1의거는 유관순 열사의 아우내장터 거사보다 한달앞서 일어난 한강이남 최초의 3·1독입운동.

당초 거사일은 3월6일. 그러나 사전에 일경에 주동인사들이 발각되는 바람에 무산위기를 맞자 거사 전날인 3월5일 교사와 학생, 구암교회 교인 등 8백여명이 구속자 석방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서래장터 등으로 뛰쳐나와 한강이남지역의 3·1운동에 불을 당겼다.

독립만세운동의 발원지 구암동산은 영명학교(제일고 전신), 구암교회, 궁멀예수병원이 자리했던 곳으로 본래 3만여평에 달했으나 화력발전소 등이 건립되는 바람에 현재의 구암교회와 1천5백여평의 부지만 남아있는 상태.

지난 93년 구암교회 교인들이 중심이 돼 성역화사업회를 결성, 부지매입운동을 벌였으나 예산문제로 벽에 부딪쳐 있다. 이후 군산시가 95년 본격적인 성역화사업 추진을 위해 용역까지 마치는 등 요란한 계획을 세웠으나 10년째 답보 상태에 놓여있다.

이와함께 군산일대는 ‘일제수탈사 유물군(群)’이지만 군산시가 대형프로젝트만 세웠을 뿐 추진의지나 보존노력은 사실상 포기 단계에 있다.

군산은 구군산세관 건물을 비롯 구 조선은행·장기십팔은행·한국제분 관사·발산초등학교의 시마다니 금고 등 일제시대의 건축물들이 엄청나게 산재한 일제식민지 역사의 생생한 현장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들 건축물들을 방치하거나 철거해버리는 바람에 민족역사교육의 현장은 역사속으로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특히 군산시는 수년전부터 ‘식민지 수탈사박물관’프로젝트차원에서 일제시대의 건물들을 보존해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는 사업을 추진해왔지만 예산문제는 물론 추진의지 자체가 미약, 이 건물들의 보존은 물론 복원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 잊혀진 항일투쟁영웅들= 군산은 3·1운동과 옥구농민항쟁(소작쟁의) 등 민족독립투쟁을 주도한 곳으로 도내에서 가장 많은 항일애국유공자를 배출한 지역이다.

그러나 이들을 제대로 추모할 수 있는 기념관은 물론 관련단체도 결성되어 있지 않은 등 항일투쟁의 주역들이 역사속에 묻혀 있다.

군산시에 따르면 의병항쟁과 3·1운동, 옥구농민항쟁 등에서 항일애국운동을 펼쳐온 애국유공자는 △ 3·1운동유공자 23명 △ 옥구농민항쟁 14명 △ 임시정부모금 9명 △ 국외항일운동 8명 △ 의병항쟁 7명등 모두 71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군산지역의 애국지사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임병찬(독립장)·문형모(애국장) 의병장을 비롯 김수영 3·5만세운동 주역(영명학교 교사·애족장), 이인식선생(독립장) 등이다.

이와함께 옥구농민항쟁관련자와 의병, 광복군 활동 등 7명이 애국지사의 심사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서동석 군산시의원은 “충절고장이라 내세울 만큼 우리지역의 선열들이 민족해방투쟁사에서 대단한 업적을 일궈냈다”면서 이들 애국지사들이 재평가를 받도록 기념관 건립등과 같은 범시민적인 또는 군산시차원의 추앙운동을 벌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영욱 기자 전북일보 2004년 3월 1일


http://www.jeonbukilbo.co.kr/WebART/societyBody.asp?ARTICLE_ID=040229210803&dateday=2004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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