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인명사전 편찬 온힘 조문기 이사장
친일 반민족행위에 관한 한 ‘잔재’는 커녕 ‘본체(本體)’조차 전혀 청산되지 않았다며 아예 ‘친일잔재 청산’이란 용어 자체를 거부하는 항일 독립투사가 있다. 일제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던 45년 7월 약관의 나이에 거물 친일파 인사들이 주도한 부민관 집회에 폭탄을 투척했던 그는 친일파, 또는 그 후예였던 역대 정권이 ‘단상’에서 주는 상을 받기 위해 ‘단하’에 조아리고 있을 수는 없다며 3·1절이나 8·15행사에 단 한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또 생존한 수백명 독립투사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친일인명 사전’ 편찬에 강한 집념을 불태우면서 ‘내가 죽으면 관에 사전을 넣어달라’는 유언을 남겨놓은 사람이기도 하다. 주인공인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78)을 경기 수원시 천천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만났다.
최근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경향신문의 ‘잊혀져가는 독립유공자들’ 시리즈를 통해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사실이 새삼 확인됐듯이 조문기의 10평 남짓한 서민아파트는 신산스러운 그의 삶을 웅변해주고 있었다. 다만 팔순을 눈앞에 둔 노령임에도 형형한 눈매와 의기(義氣)가 넘쳐 흐르는 강건한 몸가짐, 벽장 가득이 꽂혀 있는 항일·친일관련 서적과 자료집은 그 곤궁함을 무엇으로 버텨왔는지 짐작케 했다.
친일인사 보기싫어 정부행사 불참
조문기는 “최근 친일인명사전 예산삭감 파동과 누더기가 된 채로 통과된 친일진상규명법에도 눈을 부라리는 수구언론들의 모습이야말로 친일잔재가 아닌 친일본체가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또 전국 곳곳에 거물급 친일파들의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면서 최근 밀양에 있는 박춘금의 송덕비를 그곳의 시민단체들과 힘을 합쳐 마침내 철거했다고 말했다.
조문기는 올해 3·1절 행사에도 초청은 받았으나 참석하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아직 독립도, 해방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문기에 따르면 일제로부터 해방된 것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친일파들이다. 그들이 ‘상전’으로부터 해방돼 대대손손 국민위에 군림하며 상전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친일본체든 친일잔재든 반민족세력들이 청산된 것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국민들이 청산됐다고 말했다. 조문기는 “이래서야 어떻게 나라꼴을 갖췄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탄식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조문기는 독립투사 30여명과 청와대로 초대를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인사들이 청와대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 서울시청 앞 등에서 박정희기념관 건립에 반대하는 1인시위를 벌였다. 일제의 앞잡이노릇을 한 박정희를 기리는 기념관을 짓겠다는 정부에 대해 강력한 항의를 한 것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도 할말이 적지 않다. 조문기는 노대통령이 대선후보시절 서대문형무소 자리에서 서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조문기로부터 ‘친일인명사전’ 발간사업을 도와달라는 부탁과 함께 임종국 선생의 기념비적 저작인 ‘친일문학론’을 선사받은 노후보는 ‘책값으로 돈은 드리지 못하지만 (사전 발간사업을) 팍팍 밀어드리겠다’고 말했으나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문기는 “친일세력 등 수구집단들이 워낙이 정신 못차리게 만들어서 그럴 거라고 이해는 하지만 기다린 입장에서는 섭섭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독립유공자단체인 광복회를 향해서도 그는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 자신이 광복회 경기지부장까지 지냈지만 광복회는 정부로부터 받는 갖가지 재정적 지원에 안주한 채 정작 할 일을 잊고 있는 데다 조직운영상 ‘가장 비민주적인 단체’라는 것이다. 조문기는 “할일은 없고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두번씩이나 경기지부장을 그만뒀다”면서 “보훈처장의 승인을 받아야 회장이 될 수 있는 이런 구조 아래서 무슨 의미있는 사업을 추진하겠느냐”고 반문했다.
19살때 ‘부민관 폭탄투척’ 독립투쟁
조문기는 26년 지금은 수원시로 편입된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야몽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집안형편상 용인의 외가에서 소학교를 다녔는데 평소 ‘친일파’ ‘역적’ 등의 말을 입버릇처럼 한 외조부 덕분에 ‘흰 천에 먹물 배듯이’ 항일사상이 길러졌다. 구한말 승지벼슬까지 지낸 외조부는 바로 이웃에 살고 있던 매국노 송병준을 향해 ‘불구대천의 역적이자 민족의 원수’라고 질타하곤 했다.
소학교를 졸업한 뒤 16세가 되던 해인 42년 소년 조문기는 혈혈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강관주식회사라는 군수품제조업체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그는 평생의 동지인 류만수를 만났다. 류만수는 조문기보다 네 살 위였으며, 굳센 담력과 언변에 지모까지 갖춘 투사였다. 조문기는 “당시 공장에는 한국인 노동자 3,000여명이 일하고 있었다”면서 “우리 두 사람은 이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의식화작업’을 전개했다”고 말했다. 마침내 대규모 파업이 벌어졌고, 일제는 경찰을 동원해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60여명의 노동자들이 경찰에 연행돼 혹독한 조사를 받았고, 조문기는 류만수와 함께 도피했다. 두 사람의 목에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렸고, 전국에 지명수배됐다.
도피생활 도중에도 비밀리에 독립투사들과 만나 문서전달 등의 활동을 하던 두 사람은 45년 1월 귀국했다. 당초에는 상하이 임시정부로 가려 했으나 ‘임정에서 어린 우리를 받아주겠느냐’는 생각이 들어 서울로 가서 거사를 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이들은 마침내 5월에 ‘대한애국청년단’을 결성해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단원은 다섯이었다. 친일거두나 침략원흉을 저격하거나 총독부, 동척(동양척식회사), 군사령부 등 조선강점의 원부(怨府)를 폭파한다는 계획을 세운 청년단은 곧바로 권총과 폭약 등의 무기를 확보했다.
7월24일 마침내 거사의 날이 밝았다. 친일파 거두인 박춘금등에 의해 결성된 친일단체 대의당(大義黨)이 부민관(지금의 태평로 서울시의회)에서 ‘아시아민족 분격대회’를 개최했던 것이다. 당시 단상에는 박춘금을 비롯해 총독부 고위관리, 괴뢰 만주국 대표 등이 자리를 잡고 있어 경비가 삼엄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조문기는 류만수, 강윤국 등 두 동지와 함께 침입해 두 발의 폭탄을 터뜨리고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조문기는 “단순히 극렬 민족반역자 박춘금을 응징하기 위해 거사했으나 해방후 알고 보니 대의당은 항일·반전 조선민중 30만을 학살한다는 끔찍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며 “우리의 거사 성공으로 간담이 서늘해진 대의당 일당들이 학살계획을 잠시 주춤거리던 사이에 해방을 맞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유랑극단 배우·빈농으로 가난한 삶
해방 이후 조문기는 한독당에 입당하지 않았지만 백범 김구의 노선을 적극 지지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적극 반대하다가 1년반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기도 한 그는 “그때 분단저지에 나섰던 일을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제는 물러갔지만 조문기의 삶은 대부분의 독립투사가 걸었던 그대로였다. 친일파들은 오히려 활개치는데도 3·1절이나 8·15 등에는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며칠씩 경찰서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결혼한 뒤에는 유랑극단에 몸을 실어 배우노릇을 하기도 했다. 이미 고인이 된 이예춘, 김승호 등과도 한솥밥을 먹었다.
유랑극단에서도 고생만 한 조문기는 결국 고향으로 돌아와 부인(장영심·72)과 함께 자갈밭을 일구며 빈농의 팍팍한 삶을 살아가야 했다. 굶기를 밥먹듯했고, 굴뚝에 연기가 올라오지 않으면 이웃들이 밥이나 반찬을 몰래 갖다놓기도 했다. 얼마전 조문기는 고향 이웃들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았다. 지난해 가을 ‘화성시민의 날’ 행사에서 자랑스러운 화성시민으로 뽑힌 조문기는 부상으로 순금메달을 받았는데 이 메달을 반지 2개와 목걸이 하나로 만들어 자신의 허기를 채워준 이웃들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하면서 전달했던 것이다.
조문기는 부민관 폭파의거의 동지였던 류만수, 강윤국을 위해 보훈신청을 했으나 정작 자신은 신청하지 않고 있다가 딸과 사위가 몰래 신청을 해서 뒤늦게 보훈혜택을 받고 있다. 언제까지 3·1절이나 8·15행사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냐는 질문에 조문기는 “내 살아 생전에는 틀린 것 같다”면서도 “네티즌들의 열화 같은 성원으로 친일명단사전 편찬에 필요한 5억원이 금방 마련된 일 등에서 희망도 엿보고 있다”고 말했다.
〈손동우 sdw@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4년 03월 14일 14:1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