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환 영산대 교수·정치학 ©한양환 |
일부에서는 우리 사회의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 바야흐로 극한상황에 다다른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한·민·련’으로 통칭되는 우리 사회의 보수세력이 전반적인 패배가 예상되는 총선을 앞두고 최후의 저항을 감행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보수에 대한 개념 정의마저 혼미하고, 비교적 진보성향을 보여 온 민주당이 탄핵안을 발의하고 통과시키는 과정을 단순히 진보, 보수간 갈등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김대중 정권 시절, 시가 6억원 이상 호화아파트에 대한 중과세 여부로 한나라당과 대립각을 세우던 지금의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은 분명 한 배를 탄 동일한 진보세력이었다. 과연 그 무엇이 분명한 사리판단과 ‘입바른 소리’로 유명한 조순형 대표체제의 민주당을 호남의 전통적 지지층 이탈 가능성을 무릅쓰면서까지 작금의 정치적 무리수를 두게 했는가.
한편, 우리가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직무정지에도 불구하고 국가안보의 위기를 실감치 않는 것은 상당부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모든 과정을 침묵으로 일관했다. 한나라당이나 자민련 유형의 보수주의자는 결코 아닌 그가 관망의 자세를 견지한 이유, 이는 곧 우리 사회 내부에 그도 개입하기 어려운 크나큰 역사적 질곡이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우리 사회의 현 지배연합구조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올 친일잔재 청산의 문제이다. 한나라당 김용균 의원 등의 선친이 일제 하에 면장을 역임한 사실을 보도한 ‘피디수첩’이 방송위의 경고를 받고, 이회창 전 총재의 부친(이홍규씨)에 이어 민주당 조순형 대표의 선친(조병옥 박사)의 친일경력 또한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이런 와중에 최근 국회를 통과한 친일진상규명법은 친일행적의 범주를 군부에서는 ‘중좌 이상’, 민간 부문은 ‘전국적 규모’로 한정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 후예들, 그리고 상당수 지도층 인사들의 출신 신분상 불명예를 미연에 방지하는 반짝효과를 거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구 수정을 통한 미봉책은 점차 불리해가는 4월총선의 결과에 따를 상황 반전에 대한 두려움을 종식시키기에 매우 역부족 아닌가.
친일인명사전 편찬 예산 5억원을 국회가 전액 삭감하자 순식간에 7억원을 모아준 네티즌들의 ‘무서운’ 힘이 건재하고, 총선 이후 친일진상규명법을 원안대로 개정하겠다 호언하는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율 상승에 직면하여, 선친의 친일행적 공개가 초래할 ‘가문의 총체적 몰락’이 두려운 의원들에게 최후의 일전은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치의 발전과정에 역행하는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소추가, 소수정당으로 재선되더라도 친일 문제의 대두와 함께 최소한 공직사퇴는 각오해야 할 상황에 이른 그들의 단발마적 ‘폭거’로 거론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정통 야당인으로서 명예가 집안내력부터 뿌리째 흔들릴 위기에 처한 한 야당 대표의 안면 가득한 자아보호적 고뇌를 친일잔재 청산 코드로 너그러이 이해할 수 있다. 일부 서민계층의 탄핵 동조에 막강언론 ‘조·중·동’의 지대한 대중 최면효과를 실감하면서, 모쪼록 남북통일의 그날이 오기 전에 친일잔재 청산이 완료되어 부질없는 찬반논란으로 더이상 피로해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한양환/영산대 교수·정치학
2004년 3월 19일(금)
http://www.hani.co.kr/section-001005000/2004/03/00100500020040318180460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