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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과 세계’, 세계화시대 민족담론 집중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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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시민과 세계’, 세계화시대 민족담론 집중조명












△ 지난 1월 인도 뭄바이에서 열린 제4회 세계사회포럼에서 전세계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는 모습.

‘국가의 국민’자리에 ‘세계의 시민을’

세계화 시대의 국민국가, 탈민족 시대의 민족담론을 어떻게 볼 것인가 현시대 인문사회학계 최대의 화두이자 논쟁거리다. “국경을 넘는 세계시장과 세계시민사회가 출현했다고 해서 국민국가와 국민사회가 종언을 고한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참여사회연구소가 내는 반년간 학술지 <시민과 세계> 최근호(2004년 상반기)가 주제기획 ‘시민정치, 국민, 그리고 세계시민’에서 이 거대담론을 집중조명했다. “국민국가와 민족주의의 양면성을 직시하면서 고수와 해체의 안이한 이분법을 넘어서는 길”을 모색해보자는 의도다. 다양한 소주제를 다룬 10편의 논문이 실려있지만 대안은 대체로 국가에 의해 호명된 ‘국민’의 자리에 개별적 다양성과 보편적 연대성이 조화된 세계사회의 ‘시민’을 위치지워야 한다는 것으로 모아진다.

김상봉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교장은 ‘민족과 서로주체성’이란 글에서 주체성 개념의 외연을 ‘개인’에서부터 ‘가족’, ‘민족국가’, 나아가 ‘세계시민’으로 확장시킨다. 그는 “민족주의란 특정한 이데올로기이기 이전에 그 속에서만 자기를 하나의 민족주체로 정립하게 되는 현실적 자기인식”이라고 본다. 따라서 “민족 주체성이 개인들의 주체성 실현이나 확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참된 의미의 주체가 아니며, 민족 역시 개인을 노예적으로 동원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그는 낱낱의 주체들이 자기주체성을 잃지 않는 공동체의식으로 ‘서로주체성’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개인을 수동적 객체로 전락시키는 현행 국정교과서의 민족주의와, 주체를 개인 차원에서만 국한해 사유하는 탈민족주의 담론은 서로주체성과 대립되는 홀로주체성의 극단적 양태다. 그는 “어떤 겨레나 나라의 주체성은 타자와의 구별이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공공적 이념 속에서 다른 나라와 민족,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와 맺는 세계시민적 서로주체성을 통해 완성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용욱 서울대 교수(국사학)의 ‘시민과 국사: 고수와 해체 사이’는 학계 일각에서 제기된 ‘국사해체론’과 협애한 국수주의적 역사인식을 함께 비판적으로 검토한 글이다. 국사해체론은 지난해 8월 지현 한양대 교수 등을 주축으로 한 ‘비판과연대를위한동아시아역사포럼’이 연 토론회에서 본격 제기돼 뜨거운 논쟁을 일으킨 바 있다. 최근 서구의 민족이론을 받아들인 것으로, 민족을 ‘근대의 발명품’ 혹은 ‘상상의 공동체’로 파악하는 입장이다. 정 교수는 이에 대해 한국 근현대사에서 민족주의 위상의 역사적 변천을 살핀 뒤, 한국과 중국 또는 서구의 민족이론이 각각 다르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중국의 탈민족주의 역시 한국의 국사해체론이 국가의 동원논리라고 비판했던 민족주의와 마찬가지로 국가주의를 위해 동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과 일본이 최근 탈민족론이나 동아시아공동체론을 매개로 국가주의를 고창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중·일 국가권력이 민족주의를 매개로 동원논리를 정당화하는 적대적 공범관계’라는 (국사해체론의) 주장은 사실인식 차원의 오류”라고 지적했다. “결국 우리시대 역사가의 과제는 ‘국사 해체’와 ‘국사 고수’라는 수사적 대립을 넘어 시민의 역사적 상상력을 키우고 담아낼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 지속적으로 사고의 재료를 제공하는 것”이라는 게 그의 결론이다.

정현백 성균관대 교수는 ‘여성과 국민 만들기’의 관계를 살폈다. 그에 따르면, 서구 국민국가의 형성과정에서 여성은 시민권에서 배제됐고 남성‘시민’과의 결혼을 통해 상징적으로만 국민국가의 정치에 포함됐다. 이에 더해 민족주의 이념은 ‘가부장제의 내면화’와 시민계급을 매개로 한 ‘성차별주의’라는 방식으로 여성을 억압했다. 서구의 페미니즘 운동이 거의 예외 없이 민족주의와 결별하게 되는 이유다. 그러나 정 교수는 국민국가의 독립이 지연됐던 유럽 주변부 국가들에서의 민족주의 운동과 페미니즘의 관계는 또다른 면모를 보였다고 분석한다. 특히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의 여성은 제국주의 위협에 대한 저항과 봉건적 가부장제 구조에 대한 투쟁이라는 ‘대내외적 이중과제’를 떠맡았다. 한국여성의 이같은 딜레머는 오늘날에도 민족주의에 의해 여성이 주변화한 과거를 비판하고 성찰하되,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민족문제를 끌어안으면서 국민국가의 재형성에 적극 개입해야 하는 이중과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양자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위해서는 민족주의 담론의 현실적 역동성과 다른 어떤 이데올로기와도 쉽게 결합할 수 있는 부정성을 인정하고, 민주주의·반자본주의·양성평등·평화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상위개념으로 설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주제기획에는 이 밖에도 이병천 강원대 교수(경제학)의 문제제기를 시작으로, ‘재일동포의 민족체험과 민족주의’(윤건차·일본 가와가나대 교수), ‘근대국가와 시민권’(최현·<시민과 세계> 편집위원), ‘국익과 계급’(김윤철·민주노동당 상임정책위원), ‘국익과 보편윤리’(최연구·<프레시안> 기획위원), ‘시민운동의 민족성과 세계성’(이정옥·대구 가톨릭대 교수), ‘시민은 어떻게 애국하는가’(홍윤기·동국대 철학과 교수) 등이 실려 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http://www.hani.co.kr/section-009100003/2004/03/009100003200403252304074.html


한겨레 2004/03/25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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