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연 _ 문학평론가 qkrtk@chollian.net
친일문학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 제기되어야 할 문제 중에 하나는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관련 양상이다. 특히, 한국근대문학사를 볼 때 일제말기에 친일문학의 길로 나아간 문인들 중에 가장 적극적으로 그 길을 긍정했던 부류가 1920년대의 국민문학파였고 이들이 강조했던 것은 민족의 오랜 문화적 전통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살펴보는 일은 더욱 필요해진다고 하겠다.
1920년대의 국민문학파가 프로문학에 맞서 결성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이 프로문학에 맞서는 하나의 운동으로서 존재했었다는 점과 함께 이들 이전부터 심정적인 국민주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는 일은 한국에서 근대의 출발과 전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는 문제 하나를 제기한다. 국민주의가 민족에 대한 국가주의적 전유로 형성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일제시대의 국민주의는 좌파의 이념과 대립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국가에 대한 상상과 함께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이 상상된 것이라면 그 상상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1920년대의 국민문학파는 민족모순의 해결을 ‘국민’의 형성에서 찾는 경우였다. 이와 관련하여 살펴보아야 할 것이 일본 국민문학의 형성이다. 일본에서 국민문학이 하나의 경향으로 형성된 것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경과하면서부터이다. 수가 히데미는 나스메 소세키, 시마자키 도손, 구니키다 돗포를 이 시기에 국민문학이라는 패러다임을 만들어낸 대표적 문인으로 꼽고 이들에 의해 대내적으로는 국민이, 대외적으로는 민족이 표상되기에 이르렀다고 지적한다. 이때 ‘국민’은 국민 상호간의 평등화(시민화)를 함축하지만 ‘민족’은 타자와의 차이=차별의 논리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민족관이 독일의 혈연공동체적 민족 개념에 뿌리를 두고 ‘일군만민’론에서 시작되어 메이지의 제국 헌법을 긍정하는 국민의식과 함께 형성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일본의 사회진화론과 구한말의 유기체적 민족관을 이어받고 있는 20년대 국민문학파의 ‘국민’론은 ‘민족’론과 관련해 보다 세심하게 고찰될 필요가 있다. 최남선은 일찍이 ‘우리보다 앞선 문화를 이룩한 일본으로부터 가져올 것이 많으며 일본의 가르침에 감사하며 좇아야 한다’(「해상대한사(3)」, 『소년』, 1909. 1)고 말한 바 있다.
이런 심리적 경사를 배경으로 둔 국민문학파라는 것이 20년대의 정세변환 속에서 ‘문화적’ 민족주의로 형성된 것이라는 점은 주지하는 바인데, 이들의 문화중심주의적 사유에서 ‘문화’는 무엇이었을까? N. 엘리아스에 따르면 프랑스와 영국을 중심으로 한 ‘문명’ 개념은 정치적·경제적·종교적·기술적·도덕적·사회적 사실들을 지시하는데 반해 독일을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 개념은 정신적·예술적·종교적 사실들을 지시한다. 또한 문명 개념은 민족들 사이의 차이를 넘어서 문명적 보편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다른 영토를 식민지로 개척한 민족들의 자아의식을 표현한다. 반면에 문화 개념은 민족적인 차이와 특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다른 민족보다 때늦은 근대 경험을 했으며 역사적으로 위험 상황에 노출되었던 민족의 자아의식을 이룬다. 결국 문명과 문화는 각각의 역사적 맥락 속에 놓인 민족적 자의식을 담고 있는 개념인 것이다. 일본에서의 ‘문화’론이 메이지 초기의 ‘문명’론을 물리치고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이 1910년대의 다이쇼 시기라는 점과 함께 이 시기에 일본의 사상사가 구화주의(歐化主義)에서 국수주의(國粹主義-일본으로의 회귀)로의 전환을 보여준다는 사실도 염두에 둘 만하다. 이 시기야말로 한국근대문학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는 문인들이 속속 일본 유학 경험을 자신들의 글쓰기에 반영하는 때이기 때문에 20년대의 문화적 민족주의 또한 이 사상사적 영향권 안에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화가 전통론과 관련되고 전통이 민족 형성과 관련되는 국면에서 일종의 교착이 일어나고 있으니, 일본 메이지 유신 초기의 ‘국민’ 개념은 근대 천황제의 성립이 요청하게 되는 천황의 절대적 신성화와 함께 ‘신민’이라는 개념으로 바뀌어 나가게 된다. ‘신민’은 천황에 통치되는 계층의 차이를 무화시키면서 봉건적 충의 관념을 천황 일인에게 집중시키는 개념이었다. 이것이 일본 제국의 뿌리 깊은 역사성에 대한 강조로 이어졌던 바, 따라서 이것이 ‘민족’론과의 습합으로 이루어진 ‘국민’론임을 아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로써 서구의 ‘국민-문명’ ‘민족-문화’의 개념쌍이 일본과 조선에서 ‘국민≒민족-문화’로 전도되는 것이다.
일본에서의 이 ‘국민·신민·민족’의 상호 반영이 20년대의 문화적 민족주의자들에게 ‘국민≒민족’의 형태로 자리잡게 된다는 사실은 그래서 오히려 자연스러운 바가 있다. 이광수가 「문사와 수양」(1921)에서 “문예가 일국의(널리 말하면 전인류의) 문화의 꽃”이라는 표현과 “민족의 정신 중에서 계발하는 가장 큰 힘은 문예”라는 표현을 직접 이어 붙인다거나 “자국의 역사와 제 민족의 국민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 「조선민족론」(1933)에서 “고려 이래로 천여 년간 조선인은 단일한 국민생활을 하여 왔다. 오직 철천지한이 되는 것은 이조의 숭명사상이었다. 이 숭명사상은 단군 이래의 모든 민족문화를 이멸(夷滅)하고 말았다”고 쓰는 것에서 국민과 민족 개념이 혼효되고 있음을 알 수 있거니와 최남선도 「조선 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에서 “조선의 국민문학(민족문학)으로의 시조를 좀더 밝은 데로 끌어내고, 힘있게 만들고, 막다를 골에 길을 터서 새로운 생명을 집어 넣으려 함에 남과 같이 다소의 정열을 가질 뿐”이라고 말하고, 「시조 태반으로의 조선 민성과 민족」에서 “조선인은 노래부르기(소리하기) 좋아하는 국민이요 또 민족이었다”고 쓸 때 그와 비슷한 관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때 국민은 민족과 유사어로 사용된 개념이다.
그런데 국민문학파의 이 문화론이 문명론의 일환으로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주목되어야 한다. 요컨대 문화론은 단순한 복고주의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전통문화를 통해 서구 문명을 넘어선 근대화로 나아가려는 발전론으로 제기되는 것이다. 최남선이 ‘세계문학으로서의 국민문학인 시조’를 주장하는 것도 같은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조는 조선인의 손으로 인류의 음률계에 제출된 일시형(一詩形)”(「조선 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이라거나 “조선인에게 태운 세계란 것은 요하건대 조선이라는 세계와 조선을 통해서의 세계니 세계를 당기어다가 조선으로 접입(接入)함이나, 조선을 잡아 늘여서 세계로 환몰(還沒)시킴이나 외형은 여하간에 실질로 말하면 조선인에게는 동일사의 양면일 따름이다”(같은 글)라는 진술에서 “인류”나 “세계”가 가리키는 것이 그의 『소년』지가 보여주었던 세계 문명 탐구와 기백의 대상인 것이다.
문명을 위한 문화로의 전환에서 국민과 민족을 뒤섞은 것이 20년대 문화적 민족주의의 내용이고, 조선에서의 그것이 일본의 문명·문화론을 번역한 것이고 보면 이로부터 10여 년 후에 국민문학파의 주요 인물들이 친일로 나아가게 되는 데에는 무시하지 못할 필연성이 있는 셈이다. 그것은 국민주의에서의 문명론적 국가의 역할에 대한 승인과 함께 민족주의에서의 국수적 인종주의(racism)의 수용이 동시에 작동한 결과일 터이다. 그런데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국가를 승인하는 것은 외형적인 국가 이외의 국가적 대상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국민문학파의 조선’혼’ 내지 조선 ‘정신’의 강조는 바로 그 국가적 대상의 필요성에 대한 심정적 표현이었다. 일제 말기에 이르러 ‘조선혼’을 대신한 ‘일본혼’의 강조가 대거 눈에 띄거니와 이것은 곧 국가에 대한 염과 인종적 투명함에 대한 신념이 일본국민정신으로 결합되어 나타난 양상이라 하겠다. 이것을 민족주의의 효과라고 지칭하는 일은 그러므로 세심한 유보를 필요로 한다. 민족이 문화와 관련되고 그것이 국수의 강조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식민지 조선의 문인들에게는 없는 국가를 상상해야만 하는 과제가 있었으니 그 국가의 상상에 포착된 것이 ‘조선혼’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조선의 문화를 탐구하기 위한 순수심이 아니라 문화로서 국가를 상상해야 했던 사람들의 불가피한 결과였다. 더구나 그들이 근대문화에 매혹된 통로는 일본이었고 일본에서의 그것은 ‘국민-문명’을 전제하면서 ‘민족-문화’를 가다듬은 결과였다. 20년대의 국민문학파를 민족주의자들이라기보다 국민주의자들이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이들의 이론적 착종이 한국근대문학의 진정한 정수로서 시조를 강조하고 에스니시티로서의 민요를 주장하도록 했을 터이다. 조선적 에스니시티와 친일
시조와 함께 조선적 전통으로서의 민요를 강조한 시인들로는 주요한, 김억, 김동환을 꼽을 수 있다. 민요 시인들이 드러내고자 했던 세계는 무엇이었을까? 민요와 함께 고려해야 하는 개념은 에스니시티(ethnicity)이다. 에스니시티란 권력 배분에 있어서 소수파를 점한 사람들의 사회적·문화적 특징을 일컫는 말로 국가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주체로 호출된 다수파의 국민의식으로부터 벗어나는 소수파의 집단적 귀속 의식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이다. 실로 일제시대의 국가권력을 장악한 다수파는 일본이었으니 거기에 쉽게 호응하지 못했던 존재들을 소수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조선의 역사에서 민요는, 그것이 주로 억압적 일상사를 살아왔던 민중들의 노래였다는 점에서, 과거에도 당대에도 그 소수파의 에스니시티를 표현하기에 적절한 그릇이자 내용이었다.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다수파의 국민의식과는 또 다른 정체성을 부여해 줄 것이었다. 그런데 월러스틴은 이 에스니시티의 기능을 세계체제를 존속시키는 역할로 규정한다. 하나의 에스니시티에 속한 존재는 그 그룹에 가장 적절한 사회적 위치를 인정하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그 그룹이 자본의 운동 속에서 맡고 있는 역할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결국 에스니시티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의 주관적 계급 위치를 표현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제말기의 역사적 경험은 민족적 에스니시티가 미영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인종주의로 전화하는 모습을 대대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일제가 침략자들에 의해 유린되는 장소로 동양을 설정하고, 스스로에게 소수파의 지위를 부여하면서 박해받는 인종을 상상하게 함으로써 동양인이라는 에스니시티를 창출한 결과였다. 일종의 ‘다수파의 에스닉화’라고 할 수 있는 이 작업을 통해서 일제는 열국체제 하에 있는 동양을 침략 당한 지역으로서의 대동아 경제블록으로 만들고, 그 속에서의 경제적 기능을 일종의 하위주체로서의 대동아 민중에게 부과하면서, 정치적으로는 천황제적 위계구조의 신민을 창출한 것이었다. 이때 조선심에 주목했던 문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했을까?
논리적 관계로 따져본다면, 일제말 인종주의 담론의 ‘동양’과 ‘황국정신’에 대응하는 것은 ‘조선’과 ‘조선심’이다. 그것은 조선 민족 특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근대문학 형성의 필수불가결한 요인으로 상상하고 그로써 조선 민족의 정신을 더욱 고양시킬 수 있으리라는, 허구적이었지만 신념에 찬 실천의 매개물이었다. 국민이 국가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라면 에스니시티는 자기 귀속 의식이라는 측면에서 문화적인데, 조선심의 문제가 에스니시티로 논의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시조와 민요시는 이때 그 집단적 자기 귀속의 문제로 연결된다.
민요와 조선심의 주장이 허구적 에스니시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는 일제말에 씌어진 민요조 시가이다. 4·4조와 7·5조로 된 친일 시가들의 주요 창작자가 국민문학파였거나 민요시를 주장했던 시인들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혈통을 강조하는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한 사람이 동시에 두 개의 민족이나 국가에 속할 수는 없다. 결국 20년대의 국민문학파와 민요시인들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던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국가와 민족을 상상했다가 일제말에 이르러 일본 민족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전형적으로 예증하는 것이 바로 친일 민요시라고 할 만하다. 그들은 조선심의 육체로서 민요를 주장했고 다시 민요로써 친일을 노래했다. 이로써 그들이 20년대에 주장했던 에스니시티는 하나의 허구에 불과했던 것임이 드러나게 된다. 더구나 이때의 민요시는 ‘노래’라는 장르명을 갖고 창작되었는데, 이 시기의 ‘노래’는 다분히 일제의 정책에 촉발되어 창작된 것들이었다. 총독부는 1937년 ‘조선문예회’를 조직하고 이 단체를 통해 조선의 애조 띤 가요와 민요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서의 노래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이광수와 최남선, 김억의 작품들은 곡을 얻어 발표되었다. 이 정책이 조선인들의 정서를 황국 신민의 그것으로 개량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는 없겠다. 여기에서 민요시인들이 시를 노래로 인식하고 있었고, 애초에 조선적 자기 귀속의식으로 강조되던 노래들이 이제는 일본-동양 정신이라는 새로운 에스니시티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고 있음을 볼 수 있거니와, 결국 국민문학파와 민요시인들의 조선심은 하나의 허구적 에스니시티로 만들어져 다수파의 일본심으로 전환되고 말았던 셈이다. 물론 민족이 상상된 것이고 소수파의 자기 귀속 의식인 에스니시티 또한 그렇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영원히 지속되는 실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것은 어쩌면 필연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수파의 에스니시티로 끝내 옮아가지 않은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 소수파의 에스니시티를 경험하는 주체의 위치가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하여 민요시를 논의할 경우 김소월은 어떤 민요시를 썼는가가 분석될 필요가 있다. 더는 진전될 수 없는 논의의 결론만 이야기한다면, 그는 소수파의 사회적 위치에 훨씬 더 밀착된 민요로써 당대 현실의 구체화에 답했다. 이를, 앞에서 말했듯이, 주체의 계급적 위치로 바꾸어서 정리하는 일은 훨씬 더 많은 중간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국가와 민족을 바라보는 계급위치의 문제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