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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에 대한 새로운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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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지난 3월 2일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의결됐다. 이는 1949년에 설치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강제 해산된 뒤 무려 55년만의 일로 그 의미는 자못 심장하다. 비록 ‘처벌’이 아니라 ‘진상규명’에 머무는 것이지만 지난 세월 우리 사회의 지배층이 대체로 친일파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점을 생각하면 진상규명만으로도 사실상의 ‘역사적 심판’이 내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민족정기’가 바로 세워질 계기를 맞은 것일까.




<본문>


나는 지난 반세기 동안 남한 하늘을 ‘망령’처럼 떠돌던 ‘친일파’ 문제에 대해 조금 다른 얘기를 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이번에 통과된 법에 대한 나의 의견을 분명히 해두겠다.


혹자는 친일파 진상규명법이 ‘뒤가 구린’ 정치인들이 이것 배고 저것 빼고 하며 누더기가 되면서 애초의 법 취지가 상당 부분 퇴색했다며 차라리 통과 안 되는 것이 나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법안 통과에 주도적 역할을 한 김희선 의원이 한 말처럼 이 법안 통과는 ‘국민의 승리’인 측면이 강하다. 그 동안 수십 번에 걸친 법 제정 시도가 무산된 것은 우리 사회에 강하게 뿌리박고 있는 친일파 후손들의 완강한 저항 때문이었다. 그러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지급하던 예산을 국회의원들이 전액 삭감하자 국민적 분노가 일었고 그것이 이번 법안 통과에 결정적인 힘으로 작용한 것이다. 


법안이 친일파 진상규명에 미흡한 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앞으로 구성될 새 국회에서 법안 개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실 새 법안을 만드는 것보다 이미 제정된 법을 대정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의 친일파 진상규명법은 아직 미완성이고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생각 같아서는, 앞으로 개정될 법안에 단순한 진상규명을 넘어 처벌 조항까지 넣었으면 한다. 대부분의 친일파가 자연적 이미 수명을 다해 신체적 처벌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들에게 주어졌던 훈장이나 포상을 몰수하고, 아직도 살아남아 있는 친일파에게는 일정기간 공민권을 정지하는 처벌 정도는 가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치호, 그는 누구인가




그런데 그러면 친일파 문제는 다 해결되는 것일까. 나는 그래도 아직 남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친일파를 ‘이해’하는 일이다. 친일파들이 왜 친일을 했는지 이해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진정으로 친일파를 극복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친일파들이 모두 자기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양심을 저버리고 일제에 투항했다고 하면 거기에는 이해해줄 만한 구석이 전혀 없을 것이다. 그냥 그들의 행적을 밝혀내고 단죄하면 될 일이다. 실제로 그런 류의 친일파들이 많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지식인 친일파들의 상당수가 그런 저차원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민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충정에서 친일로 돌아섰다는 사실에 있다.


그런 지식인 가운데 대표적 인물로 윤치호가 있다. 윤치호는 일본, 중국, 미국에서 10년 넘게 유학하면서 근대적 학문을 배운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1937년 중일전쟁 시기 즈음에 친일파로 ‘전향’하는데 거기에 이르는 과정은 충분히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3․1운동은 바보짓”




우선 3․1운동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을 살펴보자. 그는 3․1운동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다. 그가 당시에 쓴 일기를 보면 3․1운동의 상황은 마치 1980년 광주항쟁과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3월 1일 이후 서울은 모든 상점이 철시한 가운데 청년학생들이 연일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그는 어린 여학생들이 일제 헌병경찰에 무참하게 두들겨 맞고 질질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그는 놀랍게도 3․1운동 지도부에 대해 거침없이 “바보들”이라고 일갈한다. 허구헌날 ‘만세’나 부르는 시위로 우리 나라는 결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당시 지도부가 기대를 품고 있던 파리 강화회의의 결과가 한마디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올바르게(?) 판단했다.


파리 강화회의는 기본적으로 1차대전 결과를 논의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 자결의 원칙’도 어디까지나 1차대전 패전국이 지배하고 있던 식민지에만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1차대전의 패전국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이 일본이 점령한 식민지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요구하지 않을 것이고, 설사 우리가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통사정을 한다고 해도 미국이 우리를 위해 일본과 싸워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정세분석은 정확하게 사실과 일치했다!


사실 당시 3․1운동 지도부가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걸었던 기대는 너무나 순진한 것이었다. 최근 미국에서 출판된 미국 역사책에 『선생님이 들려준 거짓말』이란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이 아주 흥미롭다. 이 책은 미국의 주요 중고등학교에서 채택하고 있는 미국사 교재 12권을 분석해 역사적 사실과 어긋난 내용을 밝혀내고 있다. 그 가운데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 관한 내용도 들어 있다. 미국 학생들조차 윌슨 대통령 하면 ‘민족 자결주의’만을 떠올리도록 교육받고 있지만, 사실 그는 국내정책에서는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고 대외정책에서는 반공주의와 침략주의를 거침없이 실행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러시아 혁명을 분쇄하기 위해 백군을 지원하고자 군대를 블라디보스톡에 파병해 시베리아 깊숙히까지 점령해들어갔던 사실이 있다. 또 니카라구아 등 중남미의 혁명을 분쇄하기 위해 무력침공을 서슴지 않았다. 그가 민족 자결주의를 내세운 것은 단지 1차대전 패전국이 지배하고 있던 식민지를 빼앗기 위한 정치적 수사(修辭)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한국을 해방시켜줄 것을 기대했으니 3․1운동 지도부는 국제정세에 관한 한 영락없는 ‘우물안 개구리’였던 셈이다. 그들에 비하면 윤치호는 냉정한 시각으로 국제정세가 돌아가는 사정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힘이 곧 정의다




윤치호는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항상 우리 민족이 어떻게 하면 일본처럼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의 결론은 ‘실력 양성’이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답게 여러 외국 지식인들과 어울렸다. 그들에게 우리 음식을 대접하고 싶어도 변변한 식당 하나가 없었다. 또 몸을 씻으려고 해도 집안 부엌에 더운물을 떠놓고 옹색하게 목욕해야 했고 대중목욕탕이라고는 없었다. 이런 사정을 보고 그는 “레스토랑이나 대중목욕탕 하나 운영하지 못하면서 어찌 나라를 운영하겠다고 하는가”라며 한탄했다.


한편으로 윤치호는 사회진화론자였다. 19세기 말 허버트 스펜서가 창안한 이 이론은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에 그대로 적용해 문명권의 적자생존과 자연도태를 도식화했다. 윤치호는 이에 따라 우리가 강대국들 사이에서 도태되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실력을 키워 강해져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3․1운동을 반대한 것은 그것이 우리의 실력을 키우는 일이 아니라 역량을 소모하기만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윤치호가 일본을 숭배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일본의 속셈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요즘 학계 일부에서 ‘식민지 근대화론’ 논쟁이 뜨겁게 진행되고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 주장의 핵심은 일제시대에 일본이 한국에 설치한 각종 근대적 시설과 근대적 교육이 오늘 한국 경제가 이만큼 성장하게 한 기본 동력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윤치호는 당대에 살았으면서도 이러한 생각에 대해 일언지하에 면박을 주었다. 만약 일본이 건설해준 철도와 병원과 학교 등이 모두 사라진다면 그로 인한 손해는 한국인보다 일본인이 열 배 백 배 더 클 것이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 모든 것들이 오로지 일본인과 일본 경제를 위한 것이지 한국인의 필요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전쟁은 회색 용납 못해




이렇게 보면 윤치호는 우리 민족과 일본에 대해 양비론자 혹은 회색주의자였다. 최남선은 1934년 즈음 ‘일선동조론’이란 것을 들고 나온다. 일본과 조선이 같은 조상에서 나온 형제이며 따라서 둘이 합해서 하나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윤치호는 이렇게 평했다.


“최남선군은 태양 숭배가 일본과 조선의 역사에 나타난 공통적인 현상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조선인들의 영적 생활을 소생시키려면 불교나 유교가 아니라 조선의 건국신화에 귀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일본인 당국자들의 말과 잘 맞아떨어진다. 일본의 태양신 즉, 황족의 조상인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는 신화상으로만 보면 조선을 건국한 단군과 똑같다. 그래서 조선인들은 다른 신격보다 먼저 신도를 숭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보듯이 최남선 역시 본 바탕은 민족주의자였다. 그런데 그 민족주의가 교묘하게 일본과의 동거를 정당화하는 논거로 작용한다. 그러니 일제시대에 민족주의 하면 모두 항일로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윤치호 역시 이를 순진하거나 아니면 사기극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최남선 보고 “그저 일본 통치자들의 일본화 정책에 편승해 저런 말들을 늘어놓는 것인가?”라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런 그가 왜 1930년대 후반에 가서 적극적 친일파로 변신하게 된 것일까. 그 결정적 계기는 일본이 감행한 세계대전이었다. 읿존이 중국을 침공하고 이에 대해 미국과 영국과 날카로운 대치를 하게 되자 윤치호의 양비론과 회색주의는 더 이상 설 땅이 없어지고 양단간에 선택을 강요받게 되었다. 사실 어느 시대든 전쟁 상황에서 양비론이 설 자리는 없다. 그의 변을 들어보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국가간이나 민족간의 윤리가 개인간의 도덕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정글의 법칙이 횡행하고 있다.  … 인간이란 존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이럴진대 일본,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제국주의적 행위만 유독 욕먹을 이유는 없다. 사실 유럽의 모든 열강은 약소국을 공격한다는 이유로 일본을 비난할 입장이 못 된다. 굳이 변호하자면,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백인종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만족스러운 점이 있다.”


상황은 전쟁이다. 세계가 양편으로 나뉘어 일대 결전을 벌인다. 이건 뒷짐 지고 평론이나 할 상황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이왕이면 아시아 인종을 차별하는 백인종 편이 아니라 그들과 장하게 맞서 싸우는 일본 편에 서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런데 조선인이 일본 편에 서는 데는 대가가 따라야 했다. 그것은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었다. 윤치호가 일본이 내세운 ‘내선일체론’을 적극 받아들인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즉 그는 조선인이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참여하여 일본의 승전에 기여를 한만큼 조선인의 지위가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일본이 제시한 내선일체론은 시의적절하다고 본 것이었다.




민족주의를 넘어서




윤치호에게 불행은 일본이 전쟁에서 패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모든 친일파들에게 그랬다. 사실 일본이 승리했다면 오늘날 친일파라는 용어조차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고 생겨났다고 해도 경멸과 수치의 용어가 아니라 존경과 자존의 용어가 됐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친일파의 문제는 단지 정세판단의 오류 문제에 그치는 것일까.


친일파라는 용어 자체는 엄밀하게 보자면 가치판단이 개입되지 않은 용어다. 이웃 나라 일본과 친하게 지내자는 것이 뭐 그리 욕먹을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대상이 우리를 침략해 식민지로 삼은 나라 일본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기는 한다. 어쨌든 의미를 좀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친일파라는 용어 대신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런데 이때 곤혹스러운 점은 우리가 흔히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부르는 일제시대 지식인들 가운데 최남선, 이광수, 윤치호 같은 이들이 그 근본을 따지고 본다면 한결 같이 민족주의자들이라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민족주의에는 항일민족주의도 있고 친일민족주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항일민족주의는 선이고 친일민족주의는 악이라고 간단하게 치부할 수 있을까.


세계사적으로 보면 민족주의는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과 함께 나타난 이데올로기이다. 그리고 근대 국민국가가 정력적으로 자본주의적 팽창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침략적 제국주의로 이행했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제국주의를 지탱해주는 이데올로기이기도 했다. 오늘날 서구의 국민국가들에서 더 이상 민족주의를 언급하지 않거나 심지어 언급 자체를 터부시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민족주의를 입에 담을 때 자신들이 걸어갔던 제국주의의 길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반면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은 식민지에서는 서구의 경로와는 달리 저항적 민족주의가 성장했다. 그것은 침략에 대한 자위수단이었기 때문에 위험성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서의 저항적 민족주의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즉 식민지의 민족주의는 그 자체로서 자립할 수 있는 능동태가 아니다. 도둑이 집에 침입했을 때 그 도둑에게 행사하는 폭력은 정당방위로서 위법성이 조각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폭력을 옹호하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또 근대를 떠받쳐주는 본질적 토대는 ‘자유로운 개인’이다. 그런데 민족주의는 오히려 개인을 집단화시키고 그 집단에 자신의 자유를 양도하게 만든다. 이 점에서 친일이든 항일이든 그것이 민족주의의 형태를 띠는 한 본원적인 한계를 갖는다.


민족주의가 이미 보존기한이 지나 폐기해야 할 대상이라면 우리는 친일파를 어떤 준거를 가지고 비판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윤치호와 같은 인물을 민족주의가 아닌 다른 어떤 잣대로 비판할 수 있는가. 어려운 문제지만 나는 민족이 아닌 계급을 분석의 틀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다. 친일파들이 대부분 골수 반공주의자들이었다는 점은 이와 관련해 매우 시사적이다. 


 


월간 [말] 200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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