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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10·26”과 “안중근의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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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10·26”과 “안중근의 10·26”


많은 사람들이 ‘10·26’ 하면 박정희를 먼저 떠올린다.
25년 전 10월 26일, 그 날 밤 박정희는 자신의 딸 보다 더 어린 여대생을 끼고 부하들과 함께 ‘시바스 리갈’을 마시다가 자신의 심복에게 총을 맞고 개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10월 26일, 그 날은 안중근 의사가 95년 전 아침 하얼빈 역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민족의 이름으로 저격한 날이기도 하다. 우리가 ‘박정희의 10·26’이 아니라 ‘안중근의 10·26’으로 기억하고, 그 날의 의미를 가슴깊이 되새겨야 함에도 10·26을 ‘안중근 의거일’ 보다는 ‘박정희 죽은 날’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안중근의 10·26은 ‘자랑스럽고 의로운 날’이고 박정희의 10·26은 ‘부끄럽고 창피한 날’인데도 ‘의로움’이 ‘개 같은 죽음’보다 홀대받아 온 이유가 무엇일까? 안중근은 한 사람을 죽인 ‘가해자’였고 박정희는 죽음을 당한 ‘피해자’라서 일까? 그러나 일본군의 칼날과 작두에 목이 잘린 채 잔혹하게 죽어간 수많은 의병들과 독립투사들, 그리고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희생된 수많은 민주투사의 죽음을 두고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순국 직전의 안중근 의사 모습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을 잘못했다고 말하면 살려주겠다는 회유를 받았지만 한마디로 거절하고 자신은 독립 의병군 중장으로서 10만 여명의 의병을 죽인 적장을 전투에서 사살한 것이니 만국공법에 따라 포로로 대우하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안중근 의사는 부친이 세상을 뜨자 가산을 정리해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워 기울어 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인재를 키우다가 계몽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동지들과 손가락을 잘라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는 혈서를 쓰고 항일 독립군이 됐다.


그러나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일제가 세운 소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던 박정희는 어느 날 문득 “긴 칼이 차고 싶은” 욕망을 위해 일본 천황에게 “진충보국 멸사봉공 일본제국 황국신민 박정희”라는 혈서를 바치고 ‘독립군 때려잡는’ 일본군 장교가 된다.












▲만주군 예비소위 시절의 박정희 모습
일본 천황에게 혈서를 쓰며 충성을 맹세했던 일제 관동군 장교출신 박정희 정권은 일제 36년 동안 흘린 우리민족의 피와 눈물로 얼룩진 고통의 대가를 일본측의 한마디 사죄도 받지 않고 단돈 3억 달러에 합의해줘서 수십만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지금까지 한푼도 보상을 받을 수 없게 만들어버렸고 정신대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며 피눈물을 흘려도 뻔뻔스러운 친일파후손들이 나라 팔아먹은 대가로 받은 엄청난 땅을 찾기 위해 소송을 벌여도 모른 체 방관하면서 그저 입만 열면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한다는 정신 빠진 국회에서는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며 어거지 생떼를 쓰고 고이즈미가 일제침략의 원흉들을 위해 신사참배를 하고 있을 때 민족정기를 바로잡자는 친일인명사전예산을 전액 삭감하고도 모자라서 친일파 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사사건건 트집잡아 누더기법률로 만들어 버렸다.


“10월 26일”
안중근은 그 날 아침 의병군 대장으로서 적장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고, 박정희는 그 날 밤 자기 딸보다 어린 여자들을 끼고 주색에 빠져 있다가 한마디로 개 같은 죽음을 당했다.
우리가 이제 10·26을 ‘박정희가 죽은 날’이 아니라 ‘안중근 의거의 날’로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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