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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통유학이 일왕중심 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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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통유학이 일왕중심 변질”












△ 90년대 성균관대 명륜당에서 열린 성균관장 취임식 모습. 사진은 기사의 특정내용과 상관 없음. 한겨레 자료사진.

‘황도유교’ 비판 학술발표회

유학의 친일 또는 왜색 문제가 학계의 전면적인 비판대에 올랐다. 비판철학회(회장 양재혁·성균관대)는 지난 1일 이 학교 경영관에서 ‘황도유교(皇道儒敎) 비판’이란 주제의 학술발표회를 열었다. 이날 발표회에서는, 조선의 정통 유학이 일제 식민강점기 시절 일왕의 통치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는 황도유교로 변질됐으며 해방 이후에도 황도유교의 영향을 받은 학풍이 역대 독재정권의 극우반공 정책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하는 도구로 전락해왔다는 비판들이 쏟아졌다. 유림의 본산이라 할만한 성균관도 신랄한 비판에서 비껴가지 못했다.

황도유교는 1903년 조선 정부 초청으로 한성중학교(현 경기고등학교) 교사로 건너온 다카하시 도오루가 퇴계 성리학을 재구성한 일왕 중심의 유학 체계다. 그 내용은 대강 이렇다. △조선의 유교는 중국의 아류이며,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 건설을 위해 공맹의 정치적 이상인 왕도유교는 일본을 국체로 한 천황 중심의 황도유교로 바뀌어야 한다 △왕도 유교가 ‘충’과 ‘효’를 분리해 ‘효’를 강조한 것이라면, 황도유교는 충효 일치가 기반이다 △중화사상은 주변국을 오랑캐로 간주해 포용력이 없지만 일본은 세계정신으로 황화(皇化)천하를 선포하며, 조선 병합은 포용의 사례다.

다카하시는 1920년대 대구고보(현 경북고) 교사와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 설립 간사 및 교수로서 식민지 조선의 교육방향을 주도했다. 1930년 경학원(구 성균관)을 황국신민 양성을 위한 명륜학원으로 바꾼 뒤, 1940년 11월 내선일체정신을 강조한 ‘왕도유도에서 황도유도로’라는 논문을 발표했으며, 1944년 명륜학원을 명륜연성소로 바꾸고 자신이 소장을 맡았다.

김원열 한국기술교육대 강사는 ‘황도유교의 사유체계와 방법론적 문제점에 대한 비판’에서 “황도유교는 일왕을 정점으로 한 봉건적 위계 구조를 바탕으로 한 전체주의적 지배 이념”이라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다카하시는 ‘조선유학대관’(1923)에서 퇴계 이황을 ‘침잠하는 사색력’을 들어 조선 제일의 학자로 평가했다. 다카하시가 조선 유교사를 정리하면서 노린 것은 “현실의 정치적 권력의 문제를 외면한 채 공허한 논의로 일관하는 것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유리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다카하시의 방법론은 자신의 제자이자 서울대 교수와 성균관대 유교대학장을 역임한 박종홍에게로 이어졌다. 김씨는 “박종홍이 대구고보 교사 시절 쓴 ‘퇴계의 교육사상’이란 논문은 일제 식민지 시기 교육현실을 ‘경(敬)의 결여’로 파악하면서 이황의 ‘경 사상’을 추앙했으나 이런 진단은 민족구성원의 독립투쟁을 가로막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양재혁 교수는 ‘황도유교 비판-유교의 종교화에 대하여’에서 “황도유교가 일본 제국주의 확장을 위한 ‘내선일체, 일시동인(一視同仁)’ 이념을 바탕으로 일왕을 우리 민족의 조상으로 체계화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조선의 정통유학은 정치와 하나였으나 일제의 정-교 분리 정책으로 유교를 이념으로 한 조선조의 실체였던 정치가 파괴되고, 정치의 규범을 담당했던 예(禮)만 종교의 형식으로 남게 됐다고 분석했다. 한국 유교가 황도유교의 국시 아래 종교로 포섭돼 사회과학적 현실정치 문제를 배제했다는 것이다. 현 성균관이 교육인적자원부 산하의 교육기관이 아니라, 문화관광부 산하의 종교분과에 속해 있는 것이 단적인 사례다. 그는 “사회 구성이 예의 체계였던 조선시대와 달리 법과 민주 체제가 정착된 지금도 유교가 신분계급사회였던 조선조 규범인 예를 이상으로 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공맹의 논리가 그 시대의 제왕독재를 비판한 것처럼 오늘의 유교 연구도 현실정치 비판을 통한 구체적 삶을 주제로 선택해야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권인호 대진대 교수는 ‘박종홍의 퇴계철학 비판-황도유교와 국가주의 철학의 원류’에서, 퇴계 철학의 현실과 동떨어진 형이상학적 관념성이 후대에 악용되는 논리구조를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천지·남녀·군신·부자·부부 등을 상호보완적 관계가 아니라 상하질서 관계로 변질시킨 주자의 성리학의 ‘이존기비(理尊氣卑)’론이 이황의 성리학에서 재현됐으며, 다카하시는 이 점을 적절히 포착했다. “퇴계 성리학이 일제 강점기에 유교적 사회질서와 절대권력의 정치지배를 정당화하면서 그것에 기생하는 학문연구 풍토를 조성”했을 뿐 아니라, 이후 ”친일-친미-반공 독재자들의 충효교육 및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이용됐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황도유교의 충효교육 논리가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제국헌법·군인칙유·교육칙어 등과, 한국에서는 박종홍과 박정희의 합작품인 10월 유신과 국민교육헌장, 가정의례준칙과 호주제 등과 사상적 맥락이 닿아있다고 주장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http://www.hani.co.kr/section-001065000/2004/05/001065000200405032123396.html


한겨레 2004년 5월 4일








‘철학계 거목’ 박종홍을 비판한다



“한국철학계의 거목이라는 박종홍철학에 대해 처음으로 공식적 비판의 날을 세운 자리입니다.”

지난 12월14일 ‘박종홍철학 비판’을 주제로 창립학술회의를 연 ‘비판철학회’ 회장 양재혁 교수(성균관대 중국철학과)는 박종홍의 학문과 인생을 탐구하다 보면 우리 철학계가 수십년 동안 걸어온 모순의 길이 보인다고 했다. “한국철학의 접근방식에 박종홍 철학을 몇쪽에 걸쳐 언급하지 않는 개론서는 드뭅니다. 또한 그를 ‘세계적 철학자’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일제시대부터 독재정권까지 독특한 논리로 시대의 주류 이데올로기에 부응해온 박종홍을 진지하게 분석하는 것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학술회의에서 초점을 맞춘 대목은 시기별로 양태를 달리하며 박종홍철학이 어떻게 현실을 왜곡하는 데 기여했는지에 대해서다. “박종홍은 식민통치 시기 ‘모두가 하나’라는 논리로 황국신민의 도리를 말하다가 해방 뒤엔 미군정의 지원 아래 미국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친미반공철학으로 무장했습니다. 이는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사회분과위원으로 추대된 뒤 절정으로 치달아 국가건설을 위한 성전의 길로 가야 함을 촉구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양 교수가 무엇보다 주목하는 것은 박종홍이 하나의 학문적 제도로서 끼친 영향이다. “미군정기 갖은 논란 속에서 서울대가 탄생했습니다. 이때 박종홍은 창립멤버로 적극적으로 참여해 오랫동안 제자들을 길러냈고 이를 중심으로 탄탄한 인맥망을 쌓았습니다. 이는 그가 저지른 학문적 과오를 대놓고 비판하지 못하는 원인이 됐습니다.”

20여명의 연구자가 활동하는 비판철학회는 내년엔 일제시대 조선성리학을 연구한 다카하시 도오루를 주제로 월례발표회를 열 예정이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한겨레21   2002-12-18 04: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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