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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대우를 제대로 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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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대우를 제대로 해달라


서울 보훈병원 8203호에는 독립유공자인 이두표(85)씨가 입원해 있다. 2003년 6월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의식 상태로 힘겹게 투병하고 있다. 그런데 보호자로는 부인 이원분(66)씨뿐인데, 부인도 여러 가지 중한 병을 앓고 있어 간병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도 국가는 1년에 한달 정도만 간병인을 지원하고 있다.


이두표씨는 이미 10대에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일본 유학 시절 옥살이를 하면서 온갖 고문을 이겨냈고, 해방 직후에는 함경도에 진주한 소련군의 인권 유린에 저항하다가 투옥되어 시베리아에 유배되었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분이다. 국가는 이를 인정하여 1991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건국무공훈장을 주었다. 이분의 파란만장한 삶은 중견 소설가 박영한씨에 의해 <장강>이란 역사소설로 출간된 적이 있다. 이두표씨는 6·25전쟁 이후 어려운 살림살이에서도 가난한 대학생들을 물심양면 도와 온 분이다. 어린 시절부터 국가에 몸바쳐 온 분을 국가가 끝까지 책임을 지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보훈처는 단지 기존 규정만을 내세워 간병인 지원을 거부하고 있다.


친일파 청산은커녕 그들을 비호하는 현실 속에서 독립유공자라도 끝까지 지켜주는 것이 국가와 후손들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의무이다. 보훈처는 규정을 바꿔서라도 이런 피해를 막고 독립유공자 가족을 지켜주기 바란다.


김슬옹/목원대 국어교육과 겸임교수


http://www.hani.co.kr/section-001042000/2004/05/001042000200405111747086.html


이 두 표(李斗杓) 1919. 6. 28∼



   함북 경성(鏡城) 사람이다.
   1940년 10월 재동경(在東京) 한국인 학생단체인 비밀결사 여명회(黎明會)에 가입하고 조직의 연락책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 4월 동경 지구(芝區) 전촌정(田村町)에 있는 신문직배소에서 현창석(玄昌碩)·채용석(蔡用錫) 등과 함께 모임을 갖고 항일민족의식을 함양하고 독립운동의 방략과 국내에의 확산방법 등을 논의하였으며 동경에서 조직한 비밀결사 ‘우리독립운동클럽’ 및 충남 ‘공주클럽’과 연계하여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6월 신용갑(申龍甲)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여 그를 회원으로 영입하고 후일 천엽(千葉)에서 항일학생조직을 결성, 활동하게 하였다.
   1942년 일시 귀국한 그는 함북 경성(鏡城)중학교에 재학중이던 김봉남(金鳳南)·이문빈(李文彬)·김윤조(金允祚) 등을 포섭하여 반전배일을 표방한 의열단(義列團)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10월 28일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경시청 형사에게 피체되어 1943년 7월 동경형사지방재판소 검사국으로 송치된 뒤 1944년 8월 금고(禁錮) 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9卷, 國家報勳處, 1991年, p.320.


註·昭和特高彈壓史(明石博隆) 第8卷 259∼260面
   ·昭和特高彈壓史(明石博隆) 下卷 97∼100面
   ·在日朝鮮人關係資料集成(朴慶植) 第4卷 1001面
   ·朱乙邑誌(咸北 鏡城郡) 114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第3輯 183∼187·225∼228面



이두표 선생의 공훈 내용은 독립기념관 누리집(www.i815.or.kr)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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