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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 관계자는 “친일행위로 지난 1996년 서훈이 취소돼 국립묘지 안장 자격이 상실된 서춘의 묘비를 제거했다”고 5일 밝혔다. 이 관계자는 “수 년간에 걸쳐 유족들에게 이장을 요구했지만 이를 거부해 불가피하게 묘비 제거 조치를 취했다”며 “이후에도 이장을 하지 않을 시 또 다른 대책을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충원 측이 수년간 이를 방치하다 돌연 이같은 조치를 취한 것은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와 대전충남 민언련, 조선일보바로보기대전시민모임 등 9개 시민사회단체가 현충일을 맞아 ‘친일파 묘 이장 촉구대회’를 가지려 한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안주섭 국가보훈처장은 최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서춘 묘 이장과 관련, “올 추석 이전 유족들이 이장할 뜻을 밝혀왔다”며 “약속대로 이장이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날 오후 기자가 찾은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1묘역 서춘의 묘 앞에서는 더 이상 서 있는 묘비를 찾아 볼 수 없었다. 서춘의 묘비는 뜯겨져 묘지 옆쪽에 덩그란히 누워 있었다. 다른 묘소와는 달리 조화를 꽂는 제단 앞 꽃병도 훵하니 비어 있었다. 서춘은 1917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재학 시부터 독립운동에 참여 1919년 2.8 독립선언서 발표 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같은 공로로 1963년 2.8 독립선언 위원자격으로 독립유공 대통령 표장 및 애국지사 서훈을 받아 1989년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그러나 그는 1932년 조선일보 편집국장 및 주필을 맡았고 1937년에는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알려진 매일신보사 주필을 지냈다. 이 때문에 서춘은 이광수와 함께 2.8 독립선언 위원 가운데 친일파로 변절한 대표적인 인물로, 친일언론의 기수로 꼽히고 있다.
그가 남긴 수많은 글 속에는 일제의 전시경제체제를 옹호하고 노골적으로 일본 천황제와 전쟁에 협력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현대전(現代戰)에 있어서의 교전국간의 경제전이라는 것은 환언하면 협력전이다. 협력! 이것은 정신의 힘이다. 정부가 국민정신총동원 주간을 설치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이 총후(銃後)인 용사다. 국민총력이 있고서야 총후가 공고하다.”([물가대책의 강화], 사해공론 4권 6호, 1938. 6, [대용품시대]). “ 1.대군(大君)을 위해 태어나 2. 대군을 위해 일하고 3. 대군을 위해 죽자는 정신을 지니지 않은 자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일본의 대화혼(大和魂)으로부터 말한다면 대군을 위해 죽는 일은 신하된 자의 본분임과 동시에 죽는 그 사람에게 대해서도 더 없는 행복이다. ”([반도청년이여 분기하라], 총동원, 1권 5호, 1939년 10월) “소화 18년 5월 13일! 징병제실시를 앞두고 일사봉공의 열의에 불타는 반도 1천 500만 민중은 이날 또 다시 광대무변한 성은에 감읍하여 마지않을 감격과 광영에 우뢰같은 환성을 폭발시키었다. 해군특별지원병제 실시의 발표가 그것이다. (중략) 삼가 우러러 동방을 요배하고 황공하온 일시동인의 성지에 봉답하려면 순국의 결의를 더욱 해야할 것이라는 것을 반도 청년은 깊이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성은에 감읍] 춘추 4권 6호, 1943년 6월) 이밖에도 그는 대표적 친일잡지인 [동양지광] [녹기] [조광] [대동아] 등에 일제의 지원병제도와 내선일체를 지지하는 글을 발표해 일제의 식민정책을 충실하게 대변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전충남민언련 우희창 사무국장은 “늦었지만 대전현충원의 이같은 조치를 환영한다”며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인 만큼 하루속히 국립묘지에서 떠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백범 암살 배후 김창룡 육군중장 묘 그대로
하지만 수 년간의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대전현충원 장군 묘역(제1장군 묘역)에 안장된 김창룡 육군중장의 묘(69번)는 여전히 이장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김창룡은 일본 관동군 헌병대 보조원으로 독립운동가를 검거하고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의 배후로 알려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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