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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청산 1日 2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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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천안, 통영 지역 회원은 각각 6월 16일(수) 낮 12시부터 1시간동안 지역의 친일문제 현안에 대한 1인 시위를 같은 날 문광부와 정통부 앞에서 각각 진행한다.  












청마 유치환


월전 장우성
























<성명서>내려받기


천안지역 김남열 회원(연구소 운영위원)은 천안 유관순 영정을 친일단체 가입 경력이 확실한 월전 장우성 화백에게 다시 제작을 의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취지로 문광부 앞에서 1인 시위를 진행한다. 그동안 민족문제연구소는 유관순 영정을 담당하는 천안시사적관리소 측에 월전 장우성 화백에게 영정을 다시 의뢰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민족정기를 훼손하는 행위’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낸 바 있으나, 결국 천안시사적관리소 측은 이 문제를 문광부의 판단에 맡기기로 했으며, 문광부 [동상·영정 심의위원회](위원장 안휘준)는 오는 21일 열릴 회의에서 이 문제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


한편, 월전 장우성은 현재 재임용 투쟁을 벌이고 있는 김민수 전 서울대 미대 교수가 논문에서 노수현, 장발과 함께 초기 미대 교수진의 친일행적을 거론한 바 있다.


통영지역 최정규 회원(전 경남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은 경남 통영문인단체에서 친일 혐의를 받고 있는 유치환(1908∼1967)의 호를 딴 ‘청마(靑馬)우체국’을 조성하기 위해 주민들의 서명을 받아 정통부에 우체국 개명 신청을 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하여 정통부에 우체국 개명을 불허할 것으로 요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일 예정이다.












김남열 회원


최정규 회원








청마 유치환 ‘친일의혹’ 법정 갈듯


월전 장우성과 청마 유치환의 친일 경력은 아래와 같다.


<아래>










□ 월전 장우성의 친일 경력


1. [조선미술전람회]에 참여하여 다수 입상함.


– 1941년 제20회 : 조선총독상, 특선-수묵채색화분야
– 1942년 제21회 : 창덕궁상, 특선-수묵채색화분야
– 1943년 제22회 : 창덕궁상, 특선-수묵채색화분야, 무감사-수묵채색화분야
– 1944년 제23회 : 특선-수묵채색화분야, 무감사-수묵채색화분야·

[조선미술전람회]는 ‘유치한 조선미술을 보육조장하고, 정조를 고아케 하며, 민중의 사상을 순화케 하여 사회 교화의 일조’를 위해 조직된 친일미술 단체임.






– 위원장 : 조선총독부 水野 정무총감
– 위원 : 조선총독부 관리
– 심사위원회 간사 : 조선총독이 임명하는 조선총독부 관리
– 1932년 제11회 조선인 심사위원 완전 배제


2.  [조선미술가협회]가 주최하고, 총독부 정보과와 [국민총력조선연맹]이 후원한 [반도총후미술전람회]에 초대작가로 참여함


·[조선미술가협회]는 ‘국가의 비상시국에 직면하여 신체제 아래서 일억일심으로 직역봉공(職域奉公)하여야 할 이 때, 미술가 일동도 궐기하여 서로 단결을 굳게 하고 또한 조선총력연맹에 협력하여 직역봉공을 다함’을 목적으로 하는 친일미술 단체로 초대 회장은 鹽原時三郞 총독부 학무국장.


·1943년 3월 21일에는 신규사업으로  반도인 작가에게 일본정신의 진수를 체득케 하기 위해 성지 순례  국경 경비에 정진하고 있는 황군용사, 경관, 관원, 관리들을 위문하기 위해 만화가를 파견  반도총후미술전람회는 주로 보도미술, 생산미술에 중점을 두어 역작을 모집  회원의 시국인식 앙양을 기념하기 위하여 될 수 있는대로 강연회, 좌담회 개최 등을 추가함.


·[반도총후미술전람회(半島銃後美術展覽會)]는 [조선미술전람회]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전쟁 동원을 선동한 미술전람회로 1942년∼1944년까지 3회가 진행됨.


– 1회전 성격 : 반도의 생생한 총후(후방) 생활을 묘사한 미술을 진열하여 민중의 시국인식을 계발 지도함.


– 2회전 성격 : 반도 화단 전체와 미술단체를 총동원시켜 징병실시의 광영을 총후 생활의 구석구석마다 발휘시키고 있는 씩씩한 자태를 화폭에 여실히 나타내어 총후 생활을 더욱 꿋꿋하게 하고 문화계발에 이바지함.


 
















□ 청마 유치환의 친일 경력


1. 시 [수(首)] 발표 (<국민문학> 1942년 3월호)






<수(首)>


십이월 북만(北滿) 눈도 안오고
오직 만물을 가각(茄刻)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가성(街城) 네거리에
비적(匪賊)은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 있도다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한천(寒天)에 모호(模糊)히 저물은 삭북(朔北)의 산하를 바라보고 있도다
너이 죽어 율(律)의 처단의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사악(四惡)이 아니라
질서를 보전하려면 인명도 계구(鷄狗)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
힘으로써 함을 제(除)함은 또한
먼 원시에서 이어 온 피의 법도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생명의 험렬(險烈)함과 그 결의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 수 없던 무뢰한 넋이여 명목(暝目)하라!
아아 이 불모한 사변(思辨)의 풍경 위에
하늘이여 은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 지고

– 이 시에서 비적은 떼를 지어 다니면서 살인을 일삼는 도둑으로 ‘중국인 도적떼’일 수도 아니면 ‘독립투사’를 지칭할 수도 있다는 견해가 있다. 단순히 일본의 율에 의해 죽은 비적을 애도하는 뜻을 넘어 (황국신민으로서의) 질서를 보전하려면 사람 목숨도 닭과 개와 같을 수 있는 일종의 강력한 메시지가 느껴진다.


2. 시 [북두성(北斗星)] 발표 (<조광> 1944년 3월호)






<북두성(北斗星)>


백웅(백웅(白熊))이 우는
북방(북방(北方)) 하늘에
경경(耿耿)한 일곱 별이
슬픈 계절(季節)
이 거리
저 광야(曠野)에
불멸의 빛을 드리우다

어둠의 홍수(洪水)가 구비치는
우주(宇宙)의 한복판에
홀로 선 나도
한낱의 푸른 별이어니


보아 천년(千年)
생각해 만년(萬年)
천만년(千萬年) 흐른 꿈이
내 맘에 장미(薔薇)처럼 고이 피다


구름을 밝고
기러기 나간 뒤
은하(銀河)를 지고
달도 기우러


밤은
얼음같이 차고
상아(象牙)같이 고요한데
우러러 두병(斗柄)을 재촉해
아세아(亞細亞)의 산맥(山脈) 넘에서
동방(東方)의 새벽을 이르키다


– 박태일 경남대 교수는 시 [북두성]이 “대동아 공영권을 위한 ‘성전’이라는 얼개를 끌어 잡고 있다”고 평가함.


3. 시 [전야(前夜)] 발표 (<춘추> 1943년 12월호)


4. 1940년 만주로 이주하여 5년 가까이 머물며 총무(總務)로 일했던 길림성 연수현 [자유이주집단 가신여농회(自由移住集團 嘉信與農會)]에서의 활동도 친일 의혹을 받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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