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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과거청산과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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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청산과 민주주의


이 영재(한국정치연구회)


‘과거청산'(historical rectification)은 후발 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는 제3세계 국가들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 독일 등의 나찌청산 작업을 비롯하여 (군부)권위주의 통치 또는 파시즘적 지배를 경험한 나라들이나 전쟁, 인종학살과 같은 비극적 경험을 갖는 국가들이 공히 경험했던 보편적 문제이다. 하지만 그 양태와 결과는 국가별로 상당한 편차와 차이를 보였다. 과거청산 작업을 통해 인권과 평화, 민주주의의 가치를 국민적 규범으로 승화시켜 국가발전 및 국민통합의 공공선(common good)으로 삼은 긍정적 사례(프랑스, 독일, 대만, 남아공 등)가 있는 반면, 과거 권위주의의 잔당들에 의한 지속적 저항으로 국가가 양분되다시피 하여 과거청산은 커녕 퇴행적 경로를 밟고 있는 국가(필리핀, 태국 등)들이 있다.


과거청산은 크게 두 가지 모델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진실모델'(truth commission model)이다. 1970년대 제3의 민주화물결 이래 민주화를 경험했던 포르투칼, 그리스, 우간다, 1980년대 남미지역, 1990년대 남아공,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등은 ‘진실위원회’를 통하여 과거청산을 시도하였다. 만델라가 주도한 남아공의 백호주의(apartheid) 청산 작업은 진실모델을 통한 주요 성과로 꼽힌다. 다른 한편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 뉘른베르크 재판을 통한 독일과 프랑스의 나찌 청산 작업의 경우 ‘정의모델'(justice model)에 입각하였다. 우리는 ‘5월 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을 사법적 처리에 근거하여 진행한 바 있는데, 이 구분에 따를 경우 정의모델에 근거한 과거청산 방식을 취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군사반란 및 내란에 저항하여 민주주의를 수호했던 5월 민주화운동 무력진압자의 사법적 처리까지 약 17년의 세월을 필요로 했다.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이어지는 신군부 세력의 연이은 집권, 이에 편승했던 김영삼 정부 중반까지 군사반란으로 인하여 정당성을 상실한 국가권력의 억압적 통제로 청산작업은 지지부진할 수 밖에 없었다.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이라는 전국민적 요구에 더 이상의 퇴로를 찾지 못한 문민정부는 특별법 제정을 지시, 1995. 12. 21.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 ‘헌정질서파괴범죄의공소시효등에관한특례법’을 제정함으로써 정의모델을 통한 법리적 기반을 마련, 전세계가 주목했던 세기의 재판을 통해 그 책임자를 처벌하였다. 관련자에 대한 ‘배상’ 및 명예회복이 진행되었고, 현재는 다양한 기념사업이 전개되고 있다.


이 경험을 토대로 하여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등이 설치되었고 본격적인 과거 청산 작업이 한창이다. 최근 이내영, 박은홍 교수는 필리핀의 ‘퇴행적’ 과거청산, 태국의 ‘지체된’ 과거청산과 달리 한국의 사례를 발전적 과거청산으로 유형화하고 후한 점수를 주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한국의 과거청산 모델이 뒤늦게 민주화를 경험한 후발국가들의 규범모델이 되기에는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우리사회에서 진행중인 과거청산은 그 성격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에 촛점을 맞추는 경우로 ‘제주 4·3’ 사건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헌정질서 파괴(또는 유린)행위에 대한 항거를 통하여 국민의 기본권 신장 및 민주헌법을 수호한 행위에 대한 국가적 인정 및 명예회복 차원이 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작업이 이에 해당한다. 의문사 진상규명의 경우 이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갖는다. 전자가 국가폭력에 대한 ‘진상규명’에 핵심이 있다면, 후자는 권위주의 통치에 대한 능동적 항거의 사회적 재평가가 중요하다.


1997년 종결된 5월 민주화운동에 대한 사법적 처리과정이 1980년 5월 광주를 대상으로 하였다면, 그 이후 계속되고 있는 과거청산 작업은 시점과 내용, 범위, 방법 등에 있어 한국 현대사 전반과 전지역을 대상으로 확장되었다. 1940년대 중반 해방정국에서 발생한 제주 4. 3 사건에서부터 1990년대 후반의 민주화운동까지 걸쳐 있다. 청산의 방식에 있어서는 ‘정의모델’에 입각한 처리 방식이라기 보다는 ‘진실모델’을 통한 청산 방식을 취하고 있다.


진실모델의 핵심은 가해자의 처벌에 있다기 보다는 민주적 규범의 사회적 확립과 그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학습효과를 갖는 미래지향적 작업이라는 데에 있다. 국가폭력에 의한 범죄행위의 공개와 규명은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더불어 그 만행을 감추기 위해 공론장을 조작하고, 정보를 독점함으로써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하고, 왜곡된 역사의 주입으로 국민기본권을 침해해 온 행위에 대한 반성까지를 포함한다. 이 과정은 부끄러운 과거사 들추기가 아니라 사회적 정의 실현이라는 미래적 가치의 창출작업이자 국가 바로 세우기이다.


권위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과정에 대한 분석을 수행했던 오도넬 등이 정식화한 민주화 이행기와 공고화기의 구분에서 본다면, 과거청산이란 민주주의의 공고화에 대한 중요한 척도가 된다. 정초선거나 절차적 차원의 민주주의 기반 조성이 이행과정에서 진행되는 것인 반면, 과거청산은 국민의 민주적 의식과 사회적 공감대 확산을 통한 민주적 가치의 제고라는 측면을 향하기 때문에 절차적 측면에 대한 버팀목으로 기능하는 실질적 차원을 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진행중인 우리 사회의 과거 청산 작업은 이와 같은 의의를 확증하는 과정으로 진행되고 있는가? 관련 단체들과 운동진영의 요구에 떠밀려 정치적 타협으로 봉합되었던 의문사진상규명법과 민주화보상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누더기 옷 꿰메듯 손질을 해야 했으며, 인정 당사자들은 사회적 무관심 속에서 도대체 무엇이 명예회복 된 것인지 의아해 하고 있다. 오히려 ‘보상’을 두고 형평성 문제가 불거지고, 경제적 가치로 계량화되어 버린 민주화 정신의 파편화가 심각한 지경이다. 과거청산 작업은 국가의 민주적 기틀을 바로 세우는 미래의 가치 확립과정으로 삼지 못할 경우 자칫 정의의 실현이냐, 사회적 안정이냐의 소모적 논쟁에 휘말려 국가발전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5월 11일 텔레비젼의 한 방송 프로그램인 ‘PD수첩’에서 국군에 의한 집단양민학살의 내용들이 방영된 적이 있다. 몇 십 만명의 대한민국 국민이 이유를 모른 채 야산에서 집단 총살 된 채 방치되었다. 그 가족들은 누가, 왜 죽였는지는 고사하고 억울한 누명이나 벗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반면 방송 도중 인터뷰에 응한 재향군인회의 관계자는 지금에 와서 왜 과거사를 들추어 혼란을 조장하느냐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5월 광주 학살의 책임자에 대한 재판이 끝난 직후 광주사회조사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진상규명이 ‘대체로 미흡'(48. 2%)하다는 견해와 ‘매우 미흡'(22.8%)로 70%를 넘었다. 이것이 바로 진상규명이 필요한 사회적 단상이며, 우리 사회의 현 주소이다. 우리는 제대로 된 국가차원의 진상규명을 경험하지 못했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에 분노하면서, 친일파를 청산하자고 하면서 우리의 역사가 우리 위정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부정되어 온 것에 대해서는 너무 관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진상규명은 책임자 처벌의 문제가 아닌 국가 바로 세우기의 기반공사이다.


진상규명에 있어 범정부적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개혁은 공허한 외침이어서는 안된다. 권위주의적 잔재 청산과 민주적 가치의 확립이 개혁의 내용이어야 한다. 자의적 권력 행사로 인해 국민의 기본권이 짓밟힌 채 국민 위에 군림하였던 강권국가의 반성이 개혁 아닌가? 기업에 대한 편법 특혜와 이에 대한 응분의 거래가 국가 효율성을 저해했던 것이지 민주주의의 실질화에 그 책임이 돌아와서는 안된다.


국가폭력에 대한 반성이 진상규명을 선행조건으로 한다면, 반민주적 국가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명예회복은 법, 제도적 타당성의 영역에 대한 구조적 검토를 필요로 한다. 국가보안법과 집시법에 의한 유죄판결 대상자들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고 있는 마당에 한 켠에서는 동일한 법률에 의해 구속자가 발생하고 있는 역설적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현재 진행중인 민주화운동에 대한 명예회복은 국가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항거행위를 인정하고 배상하는 것이 법리적으로 옳을 것인데, 국가의 위법한 행위에 대한 ‘배상’이 아닌 적법한 행위를 전제하는 ‘보상’으로 명목이 정해진 것을 보아도 과거청산에 대한 국가적 자세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적법한 행위에 따른 보상은 유죄판결의 적용은 타당했지만 그 피해가 안쓰러워 시혜적 조치를 취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과거청산의 실패는 자칫 국가적 분열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의견의 불일치를 넘어서 인권과 기본권을 전제하는 민주주의의 사회적 가치를 담보로 하는 극단적 분열로 내달을 수 있다. 과거청산은 몇몇 관련 단체들과 위원회가 사회적 무관심 속에서 당사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절차를 거친다고 해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다. 과거청산은 국가 차원의 구체적 청사진 속에서 과거 회귀가 아닌 미래적 승화를 향한 민주주의의 제도화, 실질화 과정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우리 사회의 과거청산이 아시아의 대표적 인권국가, 민주화의 모범국가로 이어지는 발전적 경로로 진행되어 민주적 국가발전의 에너지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발간 열사회보 2004년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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