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대한 범죄
노무현, 그는 누구인가 그는 스스로 대통령 권좌에 오르기 전과 오른 뒤의 노무현은 다르다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그를 뽑은 국민에게 그는 미국에 대한 그의 인식이 “사진 찍으로 미국가지 않겠다”에서 “미국이 없었다면 정치범 수용소에 있었을 것”으로 왜 달라졌는지 설명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게 당연하다고 믿는 듯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대통령이라는 권좌가 그를 그렇게 바꾸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말하자면, 노무현은 이미 사라졌고 대통령 권좌만 남은 것이다.
그래서 노무현이 아닌 대통령 권좌에게 당부한다. 노무현이라면 이렇게 당부할 필요도 없었을 터이다. 대통령은 그 누구보다 침략전쟁을 부정하고 있는 우리나라 헌법을 지켜야 한다고. 대답은 없고 ‘국제적 약속’과 ‘국익’이란 말만 돌아온다. 국제적 약속의 그 ‘국제’가 부시와 네오콘의 ‘미제국주의’를 뜻함을 솔직히 말하지 않는다. ‘국익’이란 대개 ‘그것을 주장하는 자들의 사익’이라고 지적해도 소용없다. 이라크에 파병을 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국익이 있는지, 또 파병을 하지 않으면 어떤 불이익이 있는지 국민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마침내 김선일씨가 처절하게 권좌를 향해 “이것은 당신의 실수입니다”라고 외칠 때, 그는 미국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추가파병 방침 변함없다”고.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이 말했듯이, “한 사람 잡혀갔다고 파병 철회하는 나라”도 없겠지만, ‘테러에 굴복한다’고 말하는 나라도 없다.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버릴 수 없어 깡패의 바지가랑이 사이를 긴다는 한신에게 엎드려 간곡히 당부한다. 테러 위협에 굴복하는 게 아니라 잘못된 전쟁에서 발을 빼는 것이라고. 그러나 권좌는 육중하여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이라크 파병에 대한 권좌의 의지가 확고하게 느껴진다. 충성경쟁이 벌어지고 모두 입을 다문다. 서희, 제마 부대를 보낼 때 전투병이 아니라고 강조하던 입들도 입을 다문다. 신기남 당의장이 앵무새처럼 입을 연다. 테러에 굴복 없고 파병 방침에 변함없다고. 이에 뒤질세라 신임 이해찬 총리가 말한다. 파병 방침 변함없다고. 386세대건 전대협 출신이건 별 차이가 없다. 국민의 과반수가 반대해도 파병은 그들에게 이미 기정사실이다. 그래도 그들 자신이 젊은 한 때나마 민주주의를 그렇게 외쳐 불렀듯, 타는 목마름으로 간곡하게 당부한다. 미제국주의의 보충병 노릇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역사적 범죄를 저질러선 안 된다고. 이라크 파병은 분단 이후 반세기 이상을 기다려 집권한 개혁세력의 역사적 소명을 정면에서 배반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열린 우리당의 귀는 이미 닫혀 있다.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그들은 누구인가 개혁을 내건 세력이다.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를 내건 세력이다. 반세기 동안 배반과 굴종으로 얼룩진 역사를 개혁으로 바로잡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하고 집권한 세력이다. 하지만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세력이 역사를 바로잡는다 역사적 범죄행위를 아랑곳하지 않는 세력이 개혁을 한다 오늘의 기록은 내일 역사가 된다. 설령 이 땅이 일제부역세력을 정리하는 못한 이래 사회구성원들이 역사에 대한 외경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하더라도 역사는 영원한 것이다.
그리하여 개혁은 이미 파탄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상생’을 말할 때부터 우려된 일이었지만 이른바 ‘개혁’세력의 기득권세력화의 속도는 놀랄 지경이다. 수구세력이 접어야 했던 테러방지법의 칼을 다시 꺼내드는가 하면 의정 첫날부터 동료의원 감싸기를 실행에 옮겨 상생이 ‘기득권세력화’의 다른 이름임을 보여주었다.
강철민 이병을 아는가 이라크 파병에 반대한 죄로 육군 교도소에 갇힌 그는 지금 단식중에 있다. 파병 반대를 아무리 외쳐도 대답 없는 이른바 ‘개혁’세력과 동시대인이라는 점이 부끄러운 나에게 그의 존재는 작은 위로가 되어 다가온다.
한겨레 2004.07.01 홍세화 칼럼
http://www.hani.co.kr/section-001012000/2004/06/00101200020040630162062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