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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의 친일 행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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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 통과 여부를 두고 정치권이 논란을 하고 있는 와중에 남쪽의 항구 도시 통영에서는 시인 청마 유치환의 친일 여부를 둘러싸고 논쟁이 뜨겁다. 유치환과 인연이 깊은 통영의 한 우체국을 청마우체국이라 이름 붙여 선양하려는 시도에 대해, 통영시의 일부 시민단체들이 친일 의혹이 있는 시인을 기리는 사업을 중지하라고 요구하자, 시인의 유족들이 이들을 명예 훼손으로 고발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협력과 저항의 일제 말 문학을 연구한 학자로서 필자는 일제 말기 유치환 문학의 진상을 밝힘으로써 이러한 소모적이고 감정적인 논란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유치환의 친일 문학에 대한 논란은 주로 〈수〉라는 작품에 한정되어 이루어지고 있다. 유치환을 친일이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만주국’ 정부에 의해 목이 잘린 ‘비적’이 북만주 지역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사람이라고 하고, 유치환이 친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이 ‘비적’은 단지 토비에 불과하기에 〈수〉에서 비적에 대한 비난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수〉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비적’이 항일운동가인지 토비인지는 불확실하다. 따라서 이 작품을 갖고 친일 여부를 가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렇다면 유치환의 친일 여부는 가리기 힘든 근거 없는 일인가 그렇지 않다. 유치환의 친일 여부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작품 〈수니라 〈전야〉와 〈북두성〉이다. 〈전야〉는 학병의 지원을 촉구한 작품으로 유치환의 친일 행적을 가장 잘 보여준다. “화려한 새날의 향연이 예언”되는 역사의 전야에 조선 출신의 학병들이 정복과 승리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취지의 이 시는 당시 학병 특집으로 마련된 〈춘추〉 1943년 12월호에 발표되었다. 1943년 10월 20일 학도병 동원을 알리는 규정이 나오자 〈춘추〉는 11월호에는 학도병으로 참가하는 학생들 자신의 글을, 12월호에는 학도병 참여를 권유하는 글을 특집으로 마련했다. 바로 이 〈춘추〉 12월호에 유치환의 〈전야〉가 실린 것이다. 또한 일제 말 유치환과 함께 시작 활동을 했던 오장환이 해방 직후 〈민족주의라는 연막〉(〈문화일보〉 1947년 6월 4~6일)에서 청마를 두고 과거 학병 출정 장려시를 썼던 시인이 어떻게 민족주의를 운운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하고 비판했던 것도 이 시를 가리킨 것이다. 1944년 4월 〈조광〉에 실은 시 〈북두성〉은 〈전야〉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아세아의 산맥 넘어서/ 동방의 새벽을 일으키다”로 끝나는 이 작품은 서구 근대를 극복한 대동아공영권의 수립을 축원하는 시이다.


유치환의 친일은 이런 문학 작품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행적에서도 이러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김소운이 일본어로 편역한 〈조선시집(중기)〉(1943년)에는 유치환이 현재 북만의 한 마을에서 농장을 경영하면서 하얼빈 협화회에 근무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김소운은 유치환의 첫 시집 〈청마시초〉가 발간되는 데 큰 힘을 보탰던 문우였고 하얼빈에서 직접 유치환을 만난 적도 있는 사이이기 때문에 그가 해놓은 약력 소개는 신뢰할 만하다. 유치환의 북만에서의 활동 중 농장 경영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하얼빈 협화회에서 근무하였다는 것은 그동안 알려져 있지 않았다. 물론 협화회에 근무하였다는 것 자체가 곧 바로 친일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만주국’의 협화회는 그 성격이 복합적이어서 일방적으로 친일단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야〉와 〈북두성〉을 고려하면 협화회에 근무했다는 것은 친일행적의 한 정황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유치환이 친일을 하지 않았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친일이 그의 문학 전반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김재용 원광대 한국어문학부 교수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 


http://www.hani.co.kr/section-001005000/2004/08/001005000200408061817164.html


 


“친일문학은 강요아닌 자발적 선택” 


 “내가 내 어느 시집에도 넣지 않고 내던져 버린 소위 ‘친일적’이라는 시 몇편이 있지만 그것은…조선총독부의 또 하나의 새로운 이름인 ‘국민총동원연맹’의 강제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쓴 것들이니 이점은 이해해주셨으면 고맙겠다.”(‘나의 문학인생 7장’)


미당 서정주는 생전에 친일에 대한 비판여론이 일자 자신의 친일은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이러한 강압설은 친일의 면죄부를 부여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일제말에는 친일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숙명론이나 ‘작품이 친일행적을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문학지상주의도 친일 비판의 예봉을 무디게 하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문학평론가 김재용 교수(원광대)는 “일제 말기 친일 문학은 문인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며, 친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통념은 근거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김교수는 최근 출간한 저서 ‘협력과 저항’(소명출판)에서 1938년 10월부터 1945년 해방까지 일제 말기에 활동했던 작가들을 분석, ‘누구나 어쩔 수 없이’ 친일에 동참했다는 통설을 부정하며 친일에 동참한 협력그룹과 일제에 맞선 저항그룹으로 명확히 구분된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협력’ 작가로는 서정주·채만식·최정희·송영을, ‘저항’ 작가로는 김기림, 한설야, 김사량을 꼽았다.


김교수는 ‘협력’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이들의 친일은 자발적이었으며 매우 정교한 내적 논리까지 갖추고 있다고 밝혔다. 김교수는 이들 작가가 친일문학으로 진입하게 된 계기로 1938년의 중국 무한 함락과 40년 일본 괴뢰정권인 왕정위 정부의 수립을 들고 있다. 채만식의 경우 일본제국이 조선, 대만, 만주뿐 아니라 중국 본토까지 진출하는 국제적 현실을 목도하면서 친일파시즘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인다. 채만식은 일본의 전체주의를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극복으로 인식, 일본의 전체주의를 ‘신동아 질서 건설’로 미화한다. 김교수는 이러한 채만식 친일논리를 ‘멸사봉공의 이데올로기’라고 이름붙였다. 서정주는 1942년 2월 이후 친일문학을 지속적으로 발표한다. 서정주의 친일의 바탕은 내선일체와 대동아공영론. 특히 대동아공영론은 초기시에서부터 서구 근대문명의 속물성을 비판해온 서정주에게는 매력적인 요인이었다. ‘동양의 자각과 대동아공영론을 구분하지 못한’ 서정주의 친일은 ‘왜곡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게 김교수의 진단이다. 김교수는 또 최정희의 친일문학에서는 동양론을 매개로 한 모성과 국가주의가 결합된 양상을 띠고 있다고 보았다.


‘저항’ 작가들은 ‘친일은 어쩔 수 없었다’는 친일옹호론이 근거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침묵으로 저항한 김기림, 우회적 글쓰기로 저항한 한설야, 망명한 김사량 등의 작가를 유형별로 분류하고 저항의 구체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간 일제말 저항문학 연구가 전무한 상태. 윤동주, 이육사 정도로 알려져 있는 저항작가의 저변을 확대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김재용 교수는 “친일 협력을 했던 이들보다 하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았던 것이 엄연한 문학사적 현실”이라며 “친일문학 연구는 저항문학에 대한 연구가 깊어질 때 전체적인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했다.


〈조운찬기자 sidol@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4-07-26 18:23:21



협력과 저항


김재용 지음, 소명출판(02-585-7840) 펴냄, 1만3천원


일제 말, 한국 문인 중 친일 협력을 한 서정주·채만식·최정희 등과 협력을 거부하며 저항한 김기림·한설야·김사량 등을 나누어 고찰한 책. 지은이는 친일 문인들이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협력했다기보다는 내선일체와 대동아공영에 철저히 자발적으로 협력했다고 분석한다. 다른 한편에서 작가들의 다양한 저항은 민족주의라는 기반을 넘어서고 있다고 주장한다. 친일 문제가 불거져나오고 있는 시점에서, 일제 말 친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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