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대 국회처럼 희한한 일이 많이 벌어진 적도 드물다.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을 말하려는게 아니다. 아마 기억해내기도 쉽지 않을지 모른다. 국회가 뚜렷한 이유도 없이 ‘친일(親日)인명 사전’ 예산 5억원을 전액 삭감해 버린 일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진행중이던 사전 편찬작업이 중단될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불과 7개월 전인 지난 1월 있었던 얘기다. 이 위기를 극복할 계기를 만든게 한 네티즌의 아이디어였다. 국민모금 운동이었다.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가 이를 받아 본격적 홍보활동을 펼쳤고 불과 11일만에 5억원 모금이 완료됐다. 이번 8월15일 광복절까지 하려던 8개월 운동계획을 단숨에 이루어낸 것이다. 국민이 친일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매우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이같은 운동에도 정치권은 멀뚱한 표정이었다. 무슨 모금운동만 나오면 지면과 시간을 할애하던 신문방송도 손을 놓았다. 심지어 이 모금운동의 불법성을 제기해 말썽을 일으켰던 행정자치부에 공감을 표하는 자칭 주요 보수신문도 있었다. 모금완료후 서울 명동의 옛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본부가 있던 자리에서 기념모임이 열렸다. 여기서 보듯 시민사회의 지향점은 분명하다. 친일청산이다. 사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일제(日帝)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친일진상 규명법)’이라는 지난한 과제가 자리해왔다. 친일세력을 척결하려던 반민특위가 그 친일세력에 의해 해체된지 50여년만이다. 지난해 8월 155명의 여야의원 서명으로 제출된 법안은 몇개월동안 법사위에 계류돼 빈사상태를 헤매고 있었다. 참으로 답답한 국면이었다. 이에 대한 분노의 한 자락이 모금운동으로 터진 셈이었다. 요즘 벌어지고 있는 여야간의 과거사 논란이나 국가정체성 문제 역시 그 뿌리는 친일진상 규명법에 닿아있다. 이 법의 시간적 궤적을 따라가 보면 그 정답에 이르게 된다. 친일진상 규명법안이 폐기될지 모른다는 우려는 국회의 친일인명 사전 예산삭감의 시기와 때를 같이했다. 이 법안의 천적은 그때도 한나라당이었다. 당시 법사위 제2법안 심사소위원장인 한나라당의 김용균의원이 그 중심이었다. 그는 이 법안이 통과되면 “국민 모두가 친일행위자가 될 것”이라며 물귀신 작전을 폈다. 결국 법사위는 2월초 이 법안을 국회 과거사 진상규명 특위에 반려했다. 이에 특위는 법안을 법사위의 요구대로 뜯어 고쳤고 3월초 마지막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법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죽을 고비는 넘겼으나 무수한 칼질로 제 모습을 잃어버렸다. 조사대상은 대폭 축소됐고 조사위의 활동기간도 5년에서 3년으로 줄었다. 조사위의 권한은 단서조항으로 크게 제한됐다. ‘친일면죄법’이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특히 문제는 축소된 조사대상이었다. 그중에서도 초점은 ‘일본군 장교’가 ‘일본군 중좌(중령)이상’으로 변했고 ‘문화 예술 언론 교육 학술 종교등 각분야의 친일행위’가 ‘문화기관이나 단체’로 바뀐 점등이었다. 이는 박정희 전대통령과 동아일보 조선일보등을 조사대상에서 제외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해 보였다. 당시 관련자나 해당신문은 이 법안의 논란과 통과를 백안시하는 태도였다. 그런 입장이 180도 바뀐게 지난달 14일 여야의원 171명이 이 법의 개정안을 국회에 내면서부터다. 개정안은 16대 국회에서 칼질했던 문제의 조사대상 부분을 복원한 것이다. 16대 국회에서 스쳐 지나쳤던 ‘조중동’등 일부 언론이 개정안에 대한 일제사격에 나섰다. 이 개정안이 정치공세이자 특정인및 특정언론을 겨냥한 것이라고 몰아붙였다. 여당의 대선전략이라는 비난도 나왔다. 한나라당과 박근혜 대표는 “야당과 언론을 탄압하려는 정치보복의 시작”이라고 공격했다. 이어 박대표가 불을 지폈던 국가 정체성 논란과 함께 과거사 문제가 통째로 여야간 이전투구식 정쟁의 도마 위에 올랐다. 경제침체와 행정수도 이전논란까지 여기에 어우러졌다. 우리 스스로의 역사 바로세우기와 외교문제가 뒤범벅이 되는가 하면 과거사를 왜 들추느냐는 힐난까지 쏟아진다. 이 땅의 여론몰이식 ‘완장정치’는 여전히 완강하다. 여야의 사사로움 없는 친일진상 규명법 재론이야말로 그 완장정치를 끝내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
기사 게재 일자 2004/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