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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의 추악한 뒷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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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8월13일 김용호 회원이 서프라이즈에 올린 글입니다.


일본제국주의의 전쟁막바지였던 1945년, 중국대륙 동북부를 점거하여 구 만주를 지배한 일본 관동군은 8월6일 선전포고 후 밀고 들어오던 소련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군은 각지의 전선에서 연합군의 맹렬한 공습을 받아 괴멸되고 있었고, 퇴역군인들이나 무차별 동원된 초년병들이 다수였던 60여만 명의 관동군은 소련군의 남하에 속수무책으로 후퇴를 거듭하다 결국은 소련군의 포로로 전락하였다. 이중 약 1만에서 1만5천명 정도는 일제에 의해 강제 징병된 조선의 젊은 청년들이었다.



“블라고베시첸스크 강변 언덕을 올라가서 보니, 우리를 싣고 갈 지옥행 포로수송 화물열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화차에는 입추의 여지가 없을 만큼 많이 타고 보니, 눕기는 고사하고 다리조차 펼 수 없었다. 마치 콩나물시루를 연상케 했다. 화차의 출입문에 자물쇠가 채워졌다. 가다가는 멈추고, 멈추었다가는 또 달린다. 이 화차 안에서 이틀 동안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 먹지 못하고 공포와 수심에 찬 포로들은 한 마디 말도 없이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 사흘 만에 포로수송 열차는 개선을 구가한 듯이 시골 역에 들어섰다. 여기가 죽음과 싸운 생지옥 세레칸이다.” 
– 이규철님의 증언 
 


이런 식으로 시베리아 각지에 끌려간 이들은 평균 영하 4,50도 혹한의 추위 속에서 굶주림과 강제노동, 그리고 고독과 싸우며 오로지 집으로 돌아갈 날만은 기다렸다. 이들의 굶주림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바이칼호(湖) 부근에 수용되어 있던 어느 일본인 포로는 “혁대를 풀어서 구워서 먹기도 했고”, “작업하러 가는 도중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포로는 길가에 떨어져 있는 말똥을 헤쳐서 소화되지 않고 섞여 있는 귀리, 보리 등을 후벼내서 먹고 있었다”는 증언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이다.



추위는 그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직접적인 또 다른 적이었다.


“천막 속의 지면은 영하 30도가 넘었다. 〔…〕 한국인 포로들은 하복차림 이여서 차가운 지면에 누울 수가 없었다. 작업을 마치고 돌아올 때 고목을 잘라 땔감을 메고 와서 천막 속에 불을 피운다. 담요도 외투도 없는 한국인 포로들은 모닥불을 둘러싸고 앉아서 서로 몸을 맞대고 잔다. 〔…〕 지칠 대로 지친 몸에 매달리고 있는 목숨이 정말 질기고 모질더라.”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들은 상상을 초월할 혹독한 강제노역에 시달려 매우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 한 예로, 네야 벌목장에서 일하던 일본군 포로의 경우 2백여 명이 8개월 벌목작업을 했는데, 끝까지 살아남은 자는 50여명에 불과하였다.


일본군 포로의 경우 1946년 가을에 소위 「미소협정」의 체결로 그 해 12월 5일부터 귀환이 시작되었으나, 한국인 포로는 미군정이 어떠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결국 1948년 5월부터 귀환이 시작되었고 결국 한인포로들은 무려 4년에 가까운 세월을 지옥에서 살았다.


이 지옥에서 살아온 2000여명의 한인포로 중 남한으로 귀환한 500여명의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살아 돌아온 사람들 역시 남한과 북한이라는 조각난 조국의 현실 속에서 소련에서 돌아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빨갱이로 오인 받으며 평생 낙인이 찍혀 잊혀진 사람으로 살기를 강요당했다.


이제 6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그 피해자들이 만든 모임이 「시베리아 삭풍회」이다. 회원들은 모두가 80세를 넘는 고령의 할아버지들. 이들은 이제야 자신의 세월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기 위해 일본정부와 한국정부를 상대로 힘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다.


2003년 6월12일 한국인 군인·군속 생존자와 유족 164명을 대표해 고령의 피해자 2명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시베리아 억류기간 중 받지 못한 미불임금의 반환과 손해배상 등 17억5천여만 엔을 청구하는 소장을 일본 동경지방재판소에 접수했다. 시베리아 억류 생존자 모임인 「시베리아삭풍회」 이병주 회장과 이재섭 부회장은 제소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해방 후 3∼4년에 걸친 시베리아 억류 당시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그리고 일본국회를 방문하여 오카자키 도미코 일본 민주당의원을 통해 일본정부의 전쟁책임을 통렬하게 질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돌아온 대답은 일명 「김종필-오히라 메모」라 불리우는 「한일협정」에 의거 배상이 어렵다는 소리였다. 도대체 「한일협정」이 어떻게 이루어졌기에 4년의 지옥에서 살아온 80순 할아버지들의 절규를 공허한 메아리로 만들어 버리는가.



「김종필-오히라 메모」사건


5.16 군사 구테타로 집권에 성공한 다까끼 마사오, 오카모도 미노루라는 이름의 일본인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 김종필로 하여금 10년을 넘게 협상하던 「재산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을 빠른 시간에 마무리하라는 밀명을 내린다. 김종필은 일본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와 회담을 한 결과 “재산청구권에 대해 일본이 무상으로 3억 달러를 10년간에 지불하고, 경제협력으로 정부간의 차관 2억 달러를 연리 3.5 %, 7년 거치 20년 상환이라는 조건으로 10년간 제공하며, 민간 상업차관으로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그 후 한국 내에서는 1964년 3월 24일 학생시위에 이어 한일회담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으나 1965년 2월 20일 일본 외무장관 시이나가 방한, 기본조약의 가조인 함으로써 일방적으로 타결을 보았다. 김-오히라 회담의 핵심의제는 청구권 문제였는데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액수 타결에만 주력함으로써 청구권의 명분이나 독도문제와 관련, 뒷날 ‘굴욕적’이란 비판의 소지를 남기게 된다.


이 한일협정의 이면에는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과 압력이 주효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미국이 전후 국제체제를 지배한 동서 냉전구조하에서 공산권에 대한 봉쇄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즉, 미국은 서방진영에 위치한 일본과 한국을 정치경제적으로 결속시킴으로써 중국, 소련 북한으로 이어지는 공산권에 대항하는 동아시아의 반공전선을 확고히 구축하고, 미국의 경제원조 부담을 줄이는 의도였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노골적인 외교간섭을 서슴지 않았다. 미국은 한국에 대해 배상의 의미가 있는 청구권을 강조하지 말고 총액도 축소할 것을 강요하고 구체적 액수까지 조정하고 있으며 한일간의 협상에 문안까지 제시하는 등 선의의 중재자라기보다는 고압적 지배자로서의 면모를 유감 없이 보여주었다. 


한편 일본 측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회담 타결론의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 것은 안보적 고려였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조선은 일본의 심장을 겨누고 있는 비수”라는 인식은 명치 이래 일본의 한반도 정책에 흐르고 있는 일관된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외무성 문서에는 “일본은 한국의 방위에 있어서 불가결한 기지이며 일본의 안전보장에 극히 중요하다”라는 표현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일본의 대한정책의 핵심이 안보문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치욕적인 「한일협정」은 미국과 일본의 국익에 절대적인 필요에 의해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부 박정희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한국이 받은 5억 달러는 당시 일본 외환 보유액이 18억 달러임을 상기했을 때 적은 액수는 아니었고, 물가 상승률을 비교해 보면 현재 가치로 23억 달러가 넘는 액수로 한국의 경제 발전에 중요한 종자돈 노릇을 했다”는 논리는 일고의 가치가 없다.


오죽하면 〈중앙일보〉 김영희 기자조차  “36년 간의 ‘노예생활’ 에 대한 대가로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액수”라고 했을까. 


그런데 왜 박정희 정권은 이런 터무니없는 액수에 협정을 체결했을까?


물론 미국의 압력과 차관의 필요성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료 발굴로 박정희 정권의 추악한 뒷거래가 드러남에 따라 그 이면의 모습이 일부 드러난다.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 현대사 사료 조사팀(팀장 이세일 선임연구원)」은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해외수집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한일협정 체결과정의 뒷거래와 관련된 세간의 풍문이 사실임을 입증해주는 일련의 문건을 발굴하여 12일 이를 언론에 공개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일부를 발췌한다. 


이 중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문건은 ‘한일관계의 미래’ 라는 제목의 1966년 3월 18일자 미 중앙정보국 특별보고서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기업들이 1961-1965년 사이 당시 민주공화당 총 예산의 2/3를 제공한 바, 각 개별 기업의 지원 금액이 각각 1백만$에서 2천만$에 이르며 6개의 기업이 총 6천6백만$을 지원했다. 〔…〕 민주공화당은 또한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기업으로부터도 지불을 받았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정부방출미 60,000톤을 일본에 수출하는 과정에 개입한 8개의 한국회사가 민주공화당에 115,000$을 지불했다.’는 것이다.
 
CIA 정보보고의 정확도를 감안할 때 이 같은 내용은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보고서의 내용대로라면 박정희 정권은 국교 수립 이전 적대적 관계에 놓여있던 일본의 기업자금을 토대로 수립되었으며 매판자금 수수에 대한 보상으로 굴욕적인 한일협정 체결을 서둘렀던 것으로 분석된다.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짐작되는 일본기업들은 박정희가 불법 쿠데타를 일으킨 61년부터 한일협정이 체결된 65년까지 지속적으로 민주공화당에 정치자금을 제공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박정희는 일본의 이익을 가장 완벽하게 보장할 친일인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배상금이 아닌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주어진 일제 36년간 수탈의 대가가 무상차관 3억$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그것의 1/5이 넘는 거액의 불법 정치자금을 한일협정 체결 이전에 수수한 박정희 정권은 매국 정권으로 규정되어 마땅할 것이다.”


머리 기를 자유와 미니스커트를 입을 자유도 박탈당했던 공화국. 텔레비전 화면에 나가는 박정희 사진에 지문이 묻었다는 이유만으로 피디가 끌려가 고문당하던 공화국. 내부부장관 해임 안을 가결했다고 국회의원 수십 명을 잡아다가 인간이하의 고문을 했던 공화국. 그로 인해 폐인이 되고 죽음을 맞이한 국회의원들이 있던 공화국. 사상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져야만 했던 공화국. ‘북한에도 사람이 살더라’라는 한마디에 수십 년을 감옥살이했던 공화국. 민족주의자만으로 살아도 의문사를 당했던 공화국. 양심과 비판이 허용되지 않았던 공화국. 미국의 신식민지로 전락하여 미국의 자본과 자유를 위해 소련, 중국의 전쟁터로의 위험을 겪고 있는 공화국. 지역갈등을 부추켜 정권을 지켜내던 공화국. 이런 개 같은 경우를 하루 종일 적어도 모자랐던 공화국. 그 공화국을 누가 만들었는가.


그리고 숫한 동료들의 한 맺힌 죽음을 가슴에 묻고, 4년의 지옥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와, 60년을 고독 속에서 살아온 「시베리아 삭풍회」 할아버지들의 한을 짓밟는 자가 과연 누구인가를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오늘 매국노 송병준이 조선을 일본에 넘기는 댓가로 1억 5천만엔을 요구했다는 소식을 저녁뉴스로 들으면서,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통해 6600만 달러를 받은 박정희와 송병준이 나란히 오버랩 되면서, 이 땅의 근현대사는 왜 이리 매국으로 점철되었는지를 생각하니 자꾸 눈물이 났다. 


 


보태는 글


1.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번에 발굴한 박정희 정권의 6,600만 달러 불법 자금 수수문제와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을 다룬 추악한 뒷거래 내용이 광복절인 15일 저녁 8시에 「KBS 일요스페셜」에 자세히 방영된다고 합니다. 많은 시청 바랍니다.


2. 위 글은 박민영님의 「소련군 포로가 된 시베리아지역 한인의 귀환」 이라는 논문과 「세종연구소」 이원덕 연구위원님의 「한일조약의 문제점과 개정방향」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의 보도자료를 기초로 작성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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