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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은 한일관계사에서 한 획을 긋는 해가 될 것이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압적으로 박탈한, 이른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지 100년이 된다. 또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지 60년, 그리고 1965년 그들과 국교정상화 조약(한일협정)을 맺은 지 40년이 되는 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박정희 정권은 군사쿠데타를 한 1961부터 한일협정을 체결한 65년 사이 5년간에 걸쳐 6개의 일본기업들로부터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 총예산의 2/3에 해당하는 6600만 달러를 제공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한국정부는 일본을 상대로 조선인 징용, 징병, 위안부, 학도병 등 일제하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보상명목으로 청구권 자금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 기업들이 공화당에 정치자금을 제공한 것은 이 와중에 발생한 것으로, 결국 박 정권은 앞에선 청구권자금 협상을 하면서 뒤로는 이를 빌미로 비밀 정치자금을 받아 챙긴 셈이다. 공화당은 이밖에도 1967년 제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재일 한국기업을 상대로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보고서는 “알려진 바에 의하면 정부방출미 6만톤을 일본에 수출하는 과정에 개입한 8개의 한국 회사가 민주공화당에 11만5000달러를 지불했다”고 적었다. 이들이 돈을 건넨 창구는 당시 권력 제2인자 김종필 전 중앙정보부장이었다. 한일협정 체결과정의 검은 ‘뒷거래’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의 큰 의제 가운데 하나는 35년간 일제의 강압지배에 대한 대일 청구권 문제였다. 이에 대해 이승만, 장면 정권에서는 이렇다할 진전을 보지 못하다가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에 와서 급진전을 보았다. 여기엔 박정희의 일제하 경험(대구사범학교, 만주 군관학교, 일본 육사 등)과 일본측 ‘만주 인맥’의 도움이 컸다. 이들은 막후에서 한일회담 성사를 도왔으며, 또 박정권 하에서 한일간 밀월외교의 연결고리 노릇을 하였다.
공식 축배가 끝 난 후 박 의장은 술병을 들고 테이블 끝머리에 앉은 이 노인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는 국가원수의 체면도 차리지 않고 이 노인에게 머리를 조아리고는 술을 한 잔 올렸다. 그리고는 유창한 일본어로 “교장 선생님, 건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건넸다. 이 노인은 박정희가 2기생으로 졸업한 만주 신경군관학교에서 교장을 지낸 나구모(南雲親一郞)였다. 이날 만찬장 주빈이었던 이케다(池田) 수상은 “사은(師恩)의 미덕을 안다는 것은 우리 동양의 미덕으로, 박정희 선생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라고 박 의장에게 극도의 찬사를 바쳤다. 박 의장의 이같은 태도는 신의를 중시하는 사무라이 후손을 자처하는 일본측 인사들로부터 커다란 호의를 이끌어 냈다. 박정희 “명치유신의 지사를 본받아…” 박 의장의 이같은 ‘낮춤 자세’는 다음날 있은 일본 집권 자민당 간부들과의 모임에서도 이어졌다. 도쿄 시내 중심가 아카사카의 한 요정에서 열린 일본 정계의 막후 실세들과의 모임에서 그는 일본식 예법을 갖췄다. 그리고는 통치철학을 묻는 한 일본측 인사의 질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아무 경험조차 없는 우리는 다만 맨주먹으로 황폐한 조국을 건설하려는 의욕만 왕성합니다. 마치 일본 메이지(明治)유신을 성공시킨 젊은 지사들과 같은 의욕과 사명감을 가지고 그 분들을 본받아 우리 나라를 가난에서 벗어나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그의 입에서 돌연 ‘명치유신의 지사’가 튀어나온 것이었다. 참가한 일본측 인사들도 당황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집권 기간 중 일본을 배우거나 따라잡자는 얘기를 자주 했었다.
특히 그는 청와대 시절 일본식 복장으로 말타기를 즐겼으며, 술자리에선 일본 군가와 ‘교육칙어’를 줄줄 낭독해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에게는 일본식 교육의 결과로 ‘일본 향수’가 짙게 배어 있었다. 그 시기 박정희는 앞선 일본을 배우려면 한일 국교정상화가 절실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1962년 10월 20일 미국 방문 길에 오르는 박정희 의장은 하루 전인 19일자로 이케다 일본 수상 앞으로 친서 한 통을 썼다. 친서 전달자는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다. “… 본인은 극동의 안녕평화와 자유진영의 단결이라는 견지에서 한일 양국의 국교정상화가 조속히 이룩돼야 한다는 요망이 증대해 감에 따라 양국간의 제 현안문제 해결을 위한 호전된 기운이 마련되고 있음을 보고 이를 흠쾌(欽快)히 생각하는 바입니다. 본인으로서는 이와 같이 이룩된 좋은 분위기를 현재 진행중인 국교정상화 회담을 상호 만족할 수 있는 타결로 이끌도록 하는데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표현은 두루뭉수리한 것이었지만 핵심은 한일회담을 조기에 타결짓자는 것이었다. 박 의장은 김종필 부장에게 친서를 쥐어보내면서 이번엔 청구권 문제를 타결지으라고 특명을 내렸다. 김 부장을 만난 이케다 수상은 11월 4일 유럽순방에 앞서 11월 3일자로 박 의장 앞으로 보낸 답신에서 “조속한 타결을 기대한다”고 화답했다. 일본 정계의 막후거물 오노 반보쿠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직후인 1963년 11월 5일 박정희 의장(당시는 대통령 당선자 신분)은 오노 앞으로 사신(私信) 하나를 보낸 적이 있다. 그는 사신에서 “한일 양국 국교교섭에 관해 음양으로 배려해 주신 데 대해 경의를 표한다… 다가오는 귀국의 총선거에서 승리하시길 바란다”고 적었다. 물론 이 사신에는 한 한국인 기업가에게 도움을 달라는 개인적인 부탁도 있다. 그러나 당시 한국측 최고권력자인 박정희 의장이 일본 집권당 부총재인 오노에게 사신 말미에서 자신을 낮춰 ‘시사(侍史)’라고 지칭한 걸로 봐 그에 대해 최고의 예우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한 달 뒤 박 대통령 취임식에 축하사절로 방한했다가 귀국길에 “아들의 성공을 보는 아버지의 흐뭇함을 느꼈다”고 발언해 물의를 빚었다. 공식 외교채널이 아닌 막후인사를 통한 비밀협상은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다. 김-오히라 간에 대일 청구권 문제가 굴욕적으로 마무리 된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박 정권은 거센 저항에 직면하게 됐다. 이른바 ‘6.3사태’로 불리는 1964년 중반기 학생들의 한일협정 반대투쟁이 그것이다. 이 해 4.19를 시작으로 반대시위가 본격화 된 후 6월 3일 시위대가 급기야 청와대 입구까지 몰려가 마치 4년전의 ‘4.19’를 연상시켰다. 박 정권은 급기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반대시위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사태가 악화되자 박 정권은 이를 수습할 희생양이 필요했고, 결국 청구권 협상의 주역인 김종필 당시 공화당 의장이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좀처럼 사태가 수습되지는 않자 정부는 일본측의 사죄 사절을 물색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측 외교라인은 ‘만주 인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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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족문제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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