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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 청산, 성공한 나라 실패한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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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선(sunnijang) 기자   


 


과거사 청산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떠오른 가운데 조사범위와 주체, 과거사 기구의 형식과 역할에 대한 논란이 점점 가열되고 있다. 여기에 한나라당이 ‘친북·용공행위도 조사하자’고 주장해, 과거사 청산문제는 점차 복잡성을 더해가고 있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외국 과거청산기구의 성공, 실패사례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 아르헨티나의 ‘실종자들에 관한 국가위원회’에서 발행한 보고서 <눈까마스> (왼쪽)와 남아공 ‘진실과 화해 위원회’에서 발행한 보고서.



외국의 진실위원회, 그 절반의 실패

미국의 유명한 과거사청산 연구자 프리실라 B. 헤이너 ‘민주주의 이행기 정의실현을 위한 국제센터'(International center for transitional justice) 공동창립자는 지난 94년 ‘외국의 진실위원회 비교연구’ 논문을 발표해 세계적 관심을 끌었다.

프리실라는 이 논문에서 “전세계의 진실위원회는 우간다,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칠레, 차드, 남아공, 독일 등 15개(이중 사라진 위원회도 있다)에 이른다”고 밝혔다. 그는 “과거사 청산 국가기구는 대부분 오랫동안 침묵 속에 묻어두었던 과거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중요한 조치를 취하는 기구”이지만 “실제 모든 진실위원회가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또 프리실라는 이 논문을 통해 “나라의 과거사를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은 역사나 정부의 말썽많은 행위를 올바르게 기록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라며 “인권침해에 대한 정직한 보고서를 쓰는 이유는 과거로부터 얻은 교훈으로 다시는 똑같은 인권침해행위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 우간다 ‘실종자조사위원회’

이 가운데 전세계 최초로 생긴 진실위원회는 74년 우간다 ‘실종자 조사위원회’다. 이디 아민 다다 대통령은 74년 국민들의 요구로 이 위원회를 만들어 군에 의한 실종사건을 조사토록 했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전혀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다. 아민 정부의 폭력행사뿐만 아니라 12년 뒤에 태동한 밀톤 오보테 정부 치하의 권력남용도 풀 수 없는 난제였던 것이다.

밀톤 오보테 정권을 무너뜨린 요웨리 무세베니 반군세력이 집권하면서부터 우간다에서는 20여년에 걸친 정부군의 테러 조사를 위한 ‘인권침해 조사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위원회도 국민들의 신뢰를 얻는데 실패했다. 우간다는 2개의 정부지원 ‘진실위원회’가 설치된 유일한 나라이지만, 그 활동력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 볼리비아 ‘실종조사 국가위원회’

라틴아메리카 진실위원회는 볼리비아에서 첫번째로 창설됐다. 에르난 실레스 수아소 대통령정부는 82년 10월 민주정치로 복귀한 다음, ‘실종조사 국가위원회’를 만들었다.

법무부차관, 하원·상원의원, 군 대표, 노동자·농민연합회 대표, 인권기구 대표 등이 참여한 이 위원회에서는 155건의 실종사건에 대한 증거를 수집했다. 몇가지 사건에서는 실종자들의 유골도 찾았으나, 이 위원회에서 결정적인 조사가 이뤄진 사건은 단 하나도 없었다. 정부로부터 열악한 재정적 지원을 받았던 이 위원회는 활동을 마무리하는 시점까지도 충분한 재정과 정치적 협조를 얻지 못했다.

고문사건과 감금 등 심각한 인권침해 사례를 들춰내지 못했고, 결국 실패한 위원회가 됐다. 이 위원회는 최종보고서도 내지 못했다.

▲ 필리핀 ‘진실위원회’

아시아의 경우 86년 코라손 아키노 정부가 수립된 직후 설립된 ‘필리핀 진실위원회’는 72년 필리핀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벌어진 권력남용 행위를 모두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관련내용을 조사할 직원도 없었고 예산도 없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어마어마한 분량의 진정을 접수했다. 이 내용은 대부분 과거사건과 연결된 것들이었다.

이때 상당수 군 장교들은 마르코스에 대항한 쿠데타에서 그들이 벌인 역할 때문에 민중의 지도자가 돼있었다. 이 때문에 군대는 무장반군에 맞서는 전쟁을 계속 벌였다.

군의 비타협적인 태도와 정치적 제약으로 이 활동은 지연됐다. 결국 이 위원회는 군대가 마닐라에서 평화적인 시위대를 공격함으로써 전 위원이 사임하게 됐다. 이 위원회에서는 1년간의 조사와 중대한 사건들을 법원에 제소했으나, 결정적인 결과를 만들지 못하고 마무리됐다.

성공한 진실위들, 고문과 살육의 역사를 인권의 이름으로

▲ 아르헨티나 ‘실종자들에 관한 국가위원회’

아르헨티나의 진실위원회는 국제적 관심을 끌었던 최초의 과거사청산기구였다. 군 장교에 대한 재판과 함께 이뤄진 진실위원회의 노력으로 아르헨티나는 어려운 과도기에 진실과 정의를 세운 나라의 상징이 됐다. 특히 아르헨티나는 “대대적인 인권침해를 자행한 사람들에게 성공적으로 책임을 물었던 나라”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1983년 군부종식 이후, 아르헨티나 정치는 민주정치로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때 아르헨티나 NGO들은 새 대통령이던 라울 알폰신에게 군사정권이 저지른 인권침해 상황을 조사하자고 주장했다. 당시 새 대통령이던 라울 알폰신은 국내외 유명인사 10명을 위원으로 위촉해 ‘실종자들에 관한 국가위원회’를 설치했다.

이때 선임된 대표들은 모두 인권옹호자들로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당시 아르헨티나 NGO들은 실종자에 대한 자료를 위원회 측에 넘겨주었다. 따라서 이 위원회의 위원들은 수용소와 비밀묘지, 경찰시설물들을 시찰했다.

당시 해외에 머물던 많은 망명자들이 증언에 나섰고, 위원회가 청취한 2시간짜리 증언요약편은 TV를 통해 방영되기도 했다. 이때 이 위원회가 발간한 보고서 <눈까마스>는 거의 9천명에 달하는 실종자에 대한 사건기록으로 평가받으며, 전국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 남아공 ‘진실과 화해 위원회’

남아공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는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 치하에서 벌어진 인권침해 진상규명을 위한 핵심기구였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92년 3월 ‘전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죄수와 구금자들의 고발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위원회는 앙골라, 탄자니아, 잠비아를 포함해 남아프리카 전역 ANC(아프리카인의 민족해방운동조직)수용소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초점을 맞췄다.

7개월 뒤 이 위원회는 지난 수년간 ANC수용소에서 자행된 고문과 학대행위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었다. 이 보고서는 깊은 국제적 관심을 끌었다.

넬슨 만델라는 이에 대해 “ANC수용소에서 심한 학대행위와 불법행위가 있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누가 학대를 가했는지 실명을 밝히지 않았고, 개인적 책임을 묻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첫번째 위원회의 활동이 마감된 이후,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ANC수용소에서 자행됐다는 인권침해 행위를 재조사할 새로운 조사위원회를 만들었다. 두번째로 만든 기구의 이름은 ‘ANC 회원들이 자행한 ANC 죄수와 구금자들에 대한 만행과 인권침해 조사위원회’이다.

이 위원회는 미국, 짐바브웨, 남아프리카 출신 위원 3명이 이끌었다. 새 위원회의 조사방식은 형식상 법정의 심리와 비슷하게 구성했고, 위원회는 원고를 대리하는 법률고문과 인권침해 혐의를 받고있는 피고를 대리하는 변호인 팀을 채용했다.

이 위원회에서는 자그마치 2만1천명의 희생자와 가족들의 증언과 자료를 통해 백인정권 시절 벌어진 고문과 처형, 살인과 성폭력 등에 대한 범죄사실을 낱낱이 공개했다. 그로 인한 국제사회의 반향은 매우 뜨거웠다. 그러나 ‘보복 없는 과거청산’을 주장했던 이 위원회는 피터 보타 전 남아공 대통령 같은 백인 지도자들을 단죄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 르완다 ‘진실위원회’

르완다는 새로운 진실위원회의 모델을 보여준 사례로 유명하다. 르완다진실위원회는 르완다인권단체연합의 요구에 따라 국제NGO에 의해 설치된 위원회다.

59년 이후 종족분쟁(후투족·투치족·트와족)을 겪어온 르완다에서는 60년대 이후 후투족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뒤로 투치족 등을 해외로 몰아내기 위한 난폭한 잔혹 행위가 저질러졌다.

국제NGO에 의해 조직된 르완다 진실위원회는 르완다 내부에서 끊임없이 발발하는 인권탄압행위를 조사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들은 르완다 국민들로부터 많은 비밀정보를 입수했다. 많은 위험이 있었으나, 이 위원회의 활동은 국제적으로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연대 순으로 본 외국의 15개 ‘진실위원회’



 





















































































































국가


진실위원회 이름


보고서 제목과 공표날짜


활동기간


조사시기


소속


우간다


1971년 1월 25일 이후의 우간다 실종자조사위원회


1971년 1월 25일 이후 의 우간다 실종자 조사위원회 보고서(1975)


1974


1971,1,25-1974


대통령


볼리비아


실종조사 국가위원회


최종보고서 안 냄


1982-1984


1967-1982


대통령


아르헨티나


실종자들에 관한 국가위원회


눈까마스(1985)


1983-1984


1976-1983


대통령


우루과이


실종자 상황과 그 원인에 관한 조사위원회


실종자 상황과 그 원인에 관한 조사위원회 최종보고서


1985


1973-1982


의회


짐바브웨


조사위원회


보고서를 비밀에 부침


1985


1983


대통령


우간다


인권침해조사위원회


 


1986-


1962,12-1986,1


대통령


필리핀


대통령소속 인권위원회


보고서 미완성


1986-1987
(미완료)


1972-1986


대통령


칠레


진실과 화해에 관한 국가위원회


진실과 화해에 관한 국가위원회 보고서


1990-1991


1973,9,11-1990,3,11


대통령


차드


아브레 전 대통령과 그의 공범 및 종범들의 범죄와 횡령조사위원회


위원회 보고서(1972.5.7)


1991-1992


1982-1990


대통령


남아공


전 아프리카민족회의 죄수 및 구금자들의 고발 조사위원회


전 아프리카민족회의 죄수 및 구금자들의 고발 조사위원회 보고서


1992


1979-1991


아프리카민족회의


독일


독일 SED(독일사회주의 통일당)독재 역사와 결과를 평가하기 위한 연구위원회


 


1992-


1949-1989


의회


엘 살바도르


엘 살바도르 진실위원회


광란에서 희망으로(1993.3.15)


1992-1993


1980-1991


유엔


르완다


1990년 10월 1일 이후 르완다의 인권침해에 관한 국제조사위원회


1990년 10월 1일 이후 국제 르완다 인권침해조사위원회 보고서


1993


1990-1993


4개의 국제NGO


남아공


아프리카민족회의(ANC) 회원국들이 자행한 아프리카민족회의 죄수 및 구금자들에 대한 만행 및 인권침해조사위원회


ANC회원국들이 제기한 ANC죄수 및 구속자들에 대한 인권침해 및 잔혹행위 조사위원회의 보고서


1993


1979-1991


ANC


에티오피아


특별검사국


 


1993-


1974-1991


대통령


 


ⓒ 오마이뉴스 장윤선/프리실라 B. 헤이너(1994. 5)


 









 


























 


 


“한국이 20세기 과거청산 새 모델 세워야”


 


 


외국의 진실위원회, 국내 적용 가능할까


 


 


 



외국의 ‘진실위원회’는 국내에 적용할만한 사례들인가. 이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적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피력한다.

안병욱(역사학) 카톨릭대 교수는 “군사독재가 심각했던 중남미나 남아공 모두 성공한 모델로 보기는 힘들다”며 “그들의 위원회를 한국에 적용한다면,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저지른 5·18 광주민중학살 정도일 뿐, 지난 20세기 60∼70년간의 역사를 ‘총체적 과거사 청산모델’로 대비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특히 안병욱 교수는 “현재 진행되는 과거사청산 논의는 크게 3가지 쟁점으로 추릴 수 있다”며 “그 내용은 첫째 피해자 명예회복(군 위안부·일제강점 징용자·군사정권하 의문사 및 살상자), 둘째 살아있는 가해자에 대한 사법처리, 셋째 진실을 바탕으로 한 반성과 화해”라고 말했다.

김동춘(사회학) 성공회대 교수도 “우리에게 딱 맞는 해외모델은 없는 셈”이라며 “남아공의 경우 성공사례로 손꼽을 수는 있지만, 한국에 적용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한국이 ’20세기 과거사 청산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며 “가해주체별, 사안의 성격에 따라, 시기별로 나눠 과거사청산 활동을 벌일 수 있다”고 밝혔다.

“우선, 가해주체별로 나눠본다면, 일제강점 동원문제나 친일문제는 한국외교부가 직접 상대국가에 공식자료를 요청함으로써 조사를 벌여나갈 수 있다. 60년대 이후에 벌어진 국가폭력은 한국정부가 정보를 내놓아야 한다. 일제시대 진상규명 문제는 역사학자들이 학술연구를 통해 밝혀낼 연구과제라면, 한국전쟁이후 군사독재시절까지 벌어진 공안기구와 군·경찰에 의한 국가폭력은 진상조사를 통해 명예회복을 이뤄야 한다.”

김 교수는 과거사청산 국가기구에 대해서도 확고한 자기생각을 갖고 있다. 김 교수는 “국회 안에 과거사청산 국가기구가 설립된다면 사사건건 정쟁에 휘말릴 것”이라며 “반드시 대통령 혹은 국무총리 산하의 독립된 기구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과거청산위원회(가)가 생긴다면, 식민지·한국전쟁전후·60년대 이후 군사독재 3개 위원회로 나눠 3개년 활동시한을 두고 진상조사를 벌인 뒤, 조사활동이 마무리되면 3개 위원회를 통할하는 ‘과거사재단’을 만들어 미결과제를 학자들에게 넘기는 방식이 좋겠다”며 “과거사청산위원회(가)에서 밝혀낸 진실은 교과서 개정작업을 통해 반영하고 국민교육을 통한 ‘진정한 역사바로세우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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