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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 유일한 생존자 정철용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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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과거사 진상규명 정국’이다. 친일과 군사독재 등 한국현대사의 음습한 그늘을 비추려는 움직임과 이를 저지하려는 또다른 기류가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는 가운데 정부수립 직후 출범했다가 친일세력들의 책동으로 좌절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새삼 이목을 끌고 있다. 당시 반민특위 조사관으로 활동했던 정철용옹(79)을 청주에서 만나 친일문제를 포함한 과거사 청산의 의의와 당시의 경험담 등을 들어보았다. 그는 조사위원·조사관·서기관 등으로 반민특위에 참여했던 100여명의 인사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이다.

-55년전 첫 시도 ‘친일청산’ 실패-

인터뷰는 정철용이 살고 있는 청주시 흥덕구 분평동 서민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경로당에서 진행됐다. 아파트의 노인들이 자신들의 공동 공간을 그의 개인사무실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는 사실에서 왕년의 반민특위 조사관에 대한 각별한 예우와 배려를 읽을 수 있었다. 오척단구에 깡마른 몸매, 깊이 파인 주름살의 팔순노인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차 거물급 친일파들을 조사했던 패기만만한 20대 청년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정철용은 “최근 과거사 정국의 소용돌이를 지켜보면서 참으로 답답하다”고 말했다. 나라가 세워진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잘못된 과거가 단 한번도 제대로 청산된 적이 없는 것이 답답하며, 당시 반민특위가 활동할 당시나 지금이나 과거청산의 움직임을 ‘빨갱이’로 매도하려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닮았는지 또한번 답답하고 서글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논란과 어지러움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진통’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정철용은 “무릇 모든 것이 새로워지려면 그 직전에는 격심한 고통이 따르는 법”이라며 “새 생명을 낳기 위해 어미는 제 살을 찢으며 병아리 한 마리가 세상에 나올 때도 껍질이 산산조각 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구수세력의 완강한 저항과 발호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어쩌면 당연한 것인 만큼 두려워하거나 문제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1925년 충북 영동출생으로 청주상고를 졸업한 정철용은 해방직후 미군정이 운영하던 신한공사(New Korea Company) 대전지점에서 근무하던 중 당시 제헌의회 국회의원으로 같은 고향출신이자 선친의 친구였던 박유경 의원의 권유로 반민특위와 인연을 맺었다. 신한공사는 일제의 악명높던 동척(동양척식주식회사)의 후신이었지만 하는 일은 그 이전과는 상당히 달랐다고 한다. 정철용은 “그런 큰 일을 할 자격이 없다”며 몇번이나 사양했으나 박의원이 “민족의식이 강한 너희 집안 가풍을 보고 추천하는 것이니 거절하지 마라”고 강하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결국 수락했다.

48년 8월 제헌의회 헌법 제101조에 따라 구성된 반민특위는 이듬해 1월5일 중앙청에서 시무식을 갖고 본격활동에 들어갔다. 이날 점심식사를 한 특위 관계자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초대를 받아 경무대에서 다과회를 가졌는데 사무실로 돌아오던 정철용은 이대통령이 집무실에서 손수 타이프를 치고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옆에서 도와주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대통령의 이런 모습을 보고 신뢰감이 생기면서 이전에 가졌던 의구심이 사라졌다”면서 “그러나 친일파들과 함께 반민특위를 와해시킨 주범이 대통령이라는 것을 알고 분노를 가누지 못했다”고 말했다.

처음 중앙청 202호실에 둥지를 튼 반민특위는 곧 을지로 국민은행 자리에 별도의 사무실을 차렸다. 당시 특위는 국회의원 10명의 조사위원 아래 제1·2·3조사부로 구성돼 있었고 각 부에는 조사관 5명과 서기관 5명이 딸려 있었으며 각 도마다 도지부가 있었다. 특위 조사관들에게는 야간통행증·무기휴대증·정부문서열람증이 주어졌고 극장·숙박업소 등지에 대한 임검권과 군사시설 통행권도 부여됐다.

이와는 별개로 특별검찰과 특별재판부가 있었는데 검찰부장은 권승렬 검찰총장이, 재판장은 김병로 대법원장이 겸하고 있었다. 각부 조사관들이 주요 친일행적을 조사해 특별검찰로 넘기면 특검이 기소하고 재판부가 판결을 하도록 돼 있었다. 반민특위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정철용은 “사무실로 직접 찾아와 ‘친일파를 처단해달라’로 호소하는 시민들도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춘원 이광수 직접 연행하기도-

한달 뒤인 2월7일 아직도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고 있던 그날 저녁 젊은 조사관 정철용은 특경대원(특위에 배속된 경찰)들과 함께 체포영장을 갖고 서울 세검정 춘원 이광수의 집으로 가서 그를 연행했다. 한때 조선 최고의 지성이자 젊은이들의 사표였으나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부르짖고 학병참여를 독려하는 등 최고의 친일파로 변신했던 춘원은 모든 것을 체념한 채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학창시절 춘원의 소설 ‘무정’ ‘흙’ 등을 읽고 존경심을 가졌던 정철용은 “선생님 같은 분이 어떻게 그런 일까지 하셨느냐”고 물었다. 춘원은 “조선에 창씨 개명 안한 사람이 누가 있느냐.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모두 황국신민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철용은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 ‘그럼 선생님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셨느냐’고 물었더니 묵묵부답이었다”고 말했다.

춘원이 친일을 했다고는 하지만 아마도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였으며 이제는 크게 반성하고 있을 거라는 짐작이 어긋나자 정철용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춘원을 지프에 태우고 특위로 향하던 도중 그는 “‘가야마(가야마미쓰로·香山光郞)’ 선생!” 하고 큰 소리로 춘원의 창씨명을 불렀다. 춘원은 순간적으로 “옛!” 하고 일본식으로 대답했다가 스스로도 계면쩍었던지 쓴웃음을 지었다.

정철용은 일제경찰 출신인 전봉덕 헌병부사령관을 찾아가 친일장교 명단을 제출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어린 내 생각에도 학도병은 강제로 끌려갔지만 적어도 장교는 자진해서 친일행위를 한 자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봉덕은 “나라가 있어야 친일단죄를 하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냐. 일단 공산당과 싸워 이겨야 나라를 지킨다”며 오히려 일장훈시를 하는 것이었다. 이에 격분한 정철용은 “나라 팔아 먹은 자들이 무슨 나라 걱정이냐. 당신들은 나라 걱정할 자격조차 없다”고 반박했다고 한다.

반민특위의 활동기간은 그러나 고작 다섯달이었다. 친일경찰들이 실행에 옮기고 이대통령이 승인한 ‘6·6사건’으로 인해 친일파 처단을 통한 민족정기수립이라는 국민적 여망은 철저히 짓밟혔던 것이다. 49년 6월6일 아침 출근길에 정철용은 평소 경비를 서던 특경대원들 대원과 낯선 경찰들이 잔뜩 몰려와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정부수립 반세기 이젠 바로잡아야-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경찰들이 갑자기 총을 들이대면서 신분증을 뺏고 뒷마당으로 끌고 갔다. “이놈들 무슨 짓이냐!”고 호통치며 경찰의 뺨을 때리는 순간 여러명이 달려들어 소총 개머리판으로 그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찍었고 군홧발로 짓밟았다. 정철용은 “지금도 날씨가 궂으면 옆구리가 욱신거린다”고 말했다. 뒷마당에는 먼저 출근한 동료들이 뒷머리에 손을 얹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특검부장이던 권승렬 검찰총장도 있었다. 그런 치욕이 있을 수 없었다. 정철용는 “6월6일 반민특위로 상징되는 민족주의세력은 치욕스럽게 패배했고, 친일 경찰·군부는 승리했으며 반민족행위자들은 해방됐다”고 말했다.

졸지에 할 일을 잃어버린 정철용은 집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도피생활까지 해야 했다. 반민특위가 ‘빨갱이 소굴’이라는 소문까지 퍼졌기 때문이었다. 이 일은 정철용에게 끔찍한 좌절감과 패배감을 안겨다 주었다. 그는 “그 일을 겪고 나니 세상이 귀찮고 만사가 싫어졌다”고 말했다. ‘6·6쿠데타’ 이후 정철용은 평생을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았다. 상업학교 출신의 장점을 살려 대전공단 기업체 등에서 경리일을 주로 맡았으며 조선피혁의 영업과장을 지내기도 했다.

반민특위를 ‘젊은 날의 참담한 초상’으로 가슴속 깊숙이 넣고 다녔던 정철용은 2년전 자신보다 3살 연상이었던 이원용 조사관이 부천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실로 오랜만에 ‘반민특위 동창회’를 가졌다. 두 사람은 서로 오가면서 우애를 나눴으나 그해 이원용이 세상을 등지는 바람에 정철용은 반민특위 멤버로서는 유일한 생존자가 됐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정철용에게 “반민특위 활동으로 국가유공자 신청을 한번 해보시는 것이 어떻냐”고 물어보자 그는 강하게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마땅히 해야 할 일도 제대로 못한 죄인에게 무슨 공로가 있느냐”고 단호히 말을 잘랐다. 이제 살 날도 얼마남지 않았는데 굳이 욕심이 있다면 친일파 명단 작성 등의 작업에 참여해 자신이 경험을 나누고 싶을 뿐이라는 것이다. 정철용은 “55년 전에는 짓밟혔지만 이번의 과거사 청산작업 만큼은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전문위원 sdw@kyunghyang.com〉(경향 04.08.30)
작성 날짜 : 2004-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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