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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모두 오이디푸스의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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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신분석, 신화는 없다'(뜨인돌, 2000)
월터 C.랑거의 ‘히틀러의 정신분석'(솔, 1999)


 


박정희의 유기불안에 대한 공포와 유아독존적인 자기애는 서로의 영역을 보완해주거나 자극하면서 한덩어리로 커졌다. 유기불안을 이기기 위해 더 많은 자기애가 공급되어야 했던 것이다. 소아기에 습득한 유기불안의 공포로 인한 동물적 생존욕과 그에 부수된 공격성 그리고 어머니의 편애가 키워준 과도한 자기애적 유아독존 성향은 박정희의 일생동안 번갈아 또는 혼효되어 나타난다.


박정희의 소아기와 가계 그리고 히틀러와의 유사성


과문해서 또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박정희는 히틀러다!’라고 쓴 사람은 이병주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에 대한 간략한 평전이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들의 초상』(서당,1991)을 쓰면서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박정희를 “히틀러와 동렬에 서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오래 전에 읽었으나 이제야 독후감을 쓰게 된 신용구의『박정희 정신분석, 신화는 없다』(뜨인돌,2000)와 월터 C. 랑거의『히틀러의 정신분석』(솔,1999)은 전체주의라는 정치 이데올로기 관점에서 박정희와 히틀러를 동일시했던 이병주와는 다른 방법으로  ‘두 사람은 똑같다!’라고 말하고 있다. 정신분석의인 신용구와 월터 C. 랑거가 대상으로 다룬 인물과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모두 다르지만 “[성인의] 성격 형성에 소아기 4년간이 매우 중요하다”(『히틀러』)는 프로이트의 정론을 충실히 따른 두 사람은, 독재자의 소아기(小兒期)와 가계(家系) 분석을 통해 히틀러와 박정희의 유사성에 접근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1~4세 사이의 소아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 특히 자신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가족 내의 일들을 오해하기 마련이고 어릴 때 받아들인 잘못된 전제 위에 자신의 인격구조를 형성한다고 한다. 우리가 이 가정에 온전히 동의하든 않든 월터 C. 랑거가 히틀러의 『나의 투쟁』가운데서 얄미울 정도로 잘 뽑아낸 다음의 구절은, 히틀러 스스로 자신의 인격이 소아기의 경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자, 세 살짜리 소년이 있다. 바로 이 나이에 소아는 자신의 첫인상을 의식하게 된다. 똑똑한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초기 기억의 흔적이 노령에서조차 발견된다.”


『박정희 정신분석, 신화는 없다』를 쓴 신용구는, 정치가와 정치가의 행동에 대해서 잘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심리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교사에서 군인으로, 남로당 간부에서 반공주의자로, 또 516쿠데타를 일으키고 삼선개헌을 거쳐 유신 독재의 길을 걷다가 급기야는 미국과도 불화하게 된 박정희의 극적인 궤적이 “외형적으로는 정치적인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본질적으로는 철저히 심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아버지 박성빈(1871~1938)은 부농이자 4대 독자였던 아버지의 큰 기대와 편애 속에 자랐다. 부모의 과보호 아래서 무책임하고 무절제하게 자랐던 것으로 평판이 난  박성빈은, 아버지가 전답을 거의 탕진하면서까지 뒤를 밀어 주었으나 아무런 관직을 얻지 못한데다가 동학에 가담하여 체포되었다가 고종의 대사면령을 받고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전력을 갖고 있다. 그런 장남에게 실망한 아버지는 남은 재산을 막내아들 박일빈에게 물려주고 박성빈에게는 단 한 푼도 남겨주지 않았다.


유기불안에 시달리던 아이의 자기애적 환상


부모의 편애 속에서 세상을 자기 것으로 여기며 살았던 박성빈은 아버지의 태도 변화로 상당한 혼란을 겪게 됐고, 그것이 그의 나머지 일생을 술이나 마시고 시조나 읊는 한량 생활로 일관하게 했다. 박정희는 그런 아버지 밑에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박정희가 태어나던 1917년, 20년 연상의 큰형 박동희는 부도를 낸 채 만주로 도피한 한 상태였고, 아버지 대신 둘째 형인 박무희가 농사일로 집안을 꾸려 나가던 중이었다. 박정희의 어머니 백남의가 당시엔 고령에 속하던 45세의 나이로 임신했을 때 큰 딸인 박귀희도 임신을 하고 있었다. 모녀가 동시에 출산을 해야하는 부끄러운 상황은 백남의로 하여금 여러 차례 유산을 시도하게 만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태어난 박정희는 모유를 거의 먹지 못했으며, 어머니로부터 “널 낳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었다”는 얘기를 자주 들으며 자랐다. 이 일화를 놓치지 않고 낚아챈 신용구는 “아직까지 사고체계가 미숙하고 단순한 5세 이전의 아이가 어른들의 농담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면서, 이때 박정희는 “엄마가 진짜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유기불안”에 빠져들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한다. 훗날 박정희는 자신의 소년 시절에 대해 밝히면서 “우리 어머니만한 사람은 없고 모든 것이 어머니 덕택”이라고 자주 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영받지 못한 탄생’이라는 박정희의 ‘원죄’는 죽는 순간까지 그를 따라다닌 짙고 어두운 그림자”가 되었다.


워낙 늦둥이였던 탓에 형제들과 나이 차이가 많았던 박정희는 어머니의 편애를 시기하거나 질투할 경쟁자가 없는 상태에서 ‘사랑의 독점’을 누린데다가, 고의적인 유산을 시도했던 여성들이 핍박(?)을 딛고 태어난 아이에게 보이는 특별한 애정(‘취소 기제’라고 부름)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어머니의 눈길과 손길이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유아는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믿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어린 시절에 형성되는 자기애(自己愛)의 핵심이다. 건강한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심리적 자산’에 해당하는 자기애는 현실의 고통에 대한 면역력을 높여주고 쉽게 좌절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강화되면 일찌감치 유아독존적인 인격을 형성하게 된다.


유기불안에 시달리던 아이가 어머니의 편애를 받게 될 때, 자기애적인 환상은 겉잡을 수 없이 증폭된다. 어머니가 자기를 버리거나 죽일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형제들보다 더 사랑하게 된 것은, 자기가 그만큼 뛰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믿게 만드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런 박정희에게 유기불안과 자기애를 균형감있게 처리해 줄 반대급부가 없었다. 농담처럼 흘린 어머니의 유기위협을 완화해줄 아버지가 그에게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없는 거나 마찬가지’ 였던 아버지는 또 백남의의 과도한 모성애에 제동을 걸어 주지도 못했다. 다시 말해 박정희에게는 어머니의 편애로 인해 아버지의 미움을 사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거세위협은 있었지만, 모든 남아들이 겪는다고 상정되는 심각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부재했다. 그것은 박정희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우리나라의 일반적 사정일 수도 있다.        














 


소아기의 유기불안 공포가 동물적 생존욕과 공격성 낳았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지탱하는 주춧돌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모든 신경증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하지만 중국의 수필가 임어당이 『생활의 발견』 가운데 ‘중국인들과 같은 대가족 사회에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따위가 생겨날 수 없다’고 단언한 바 있었듯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문화적 일반화는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전인권의 『남자의 탄생』(푸른숲,2003)은 서양과 달리 한국의 육아 문화는 사내아이로부터 어머니를 차단하지 않는다고 한다. 서양식 육아법은 아이의 성장에 따라 체계적으로 어머니에 대한 접근을 막지만, 한국에서는 심하면 12세가 되기까지 남아(男兒)에게 동침권이 부여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아이가 자라는 동안 어머니에게 홀대 받는 것은 남편(아버지)이다. 이렇듯 대폭적인 구강 만족(젖빨기)을 맞본 한국의 남아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말 그대로 ‘바다 건너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한국의 남성에게는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의 성적 박탈감이나 아버지로부터의 견제(거세위협)가 문제되는 게 아니라, ‘동굴 속 황제’로 키워진 유아독존적인 자기애가 문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난관 극복 과정이 생략된 소황제(小皇帝)들의 사회 적응이 여간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아버지들은 어머니를 놓고 아들과 성적 경쟁을 벌이지 않는다. 유교 문화를 체현하고 있는 한국의 아버지들은 가정 내에서 도덕적사회적 모범으로 간주되며 권력의 상징이자 실체로 군림한다. 하지만 박정희의 아버지는 일반적인 한국 상황에서 아버지가 가져야할 긍정적인 권위를 가지지 못했고, 경제와 같은 기본적인 의무도 제대로 완수하지 못했다. 때문에 박정희의 유기불안에 대한 공포와 유아독존적인 자기애는 서로의 영역을 보완해주거나 자극하면서 한덩어리로 커졌다. 유기불안을 이기기 위해 더 많은 자기애가 공급되어야 했던 것이다.


소아기에 습득한 유기불안의 공포로 인한 동물적 생존욕과 그에 부수된 공격성 그리고 어머니의 편애가 키워준 과도한 자기애적 유아독존 성향은 박정희의 일생동안 번갈아 또는 혼효되어 나타난다. 박정희는 미군정 당시 금지되어 있던 남로당에 가입해 조직도상 중요한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여순반란사건 직후 대대적인 숙군 작업 중에 군정보부에 구속되자 “이럴 때가 올 줄 알았다”며 단번에 자술서를 써내려갔다. 박정희를 미화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더라도 비굴한 인생은 살지 않겠다”는 “사무라이적 인생관”으로 이 일화를 치장한다. 하지만 신용구의 분석은 정반대다. 소아기 때부터 저장되어 있던 끈질긴 생존 욕구가 죽음의 위협 앞에서 가차없이 동지들을 배신하게 했던 것이다.  


제국주의 ‘일본’이라는 새 아버지로


 그의 생존욕과 공격성은 자신의 안위를 위협하는 상황이 닥칠 때마다 극단적인 행동도 불사하게 했다. 516쿠데타의 경우 『국가와 혁명과 나』의 말미에 스스로 “주지육림의 부패 특권사회를 보고 참을 수 없어 거사”를 일으켰다고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방어기제가 무능한 정치인들과 군부의 주요 인사들에게 투사된 것일 뿐이다. 쿠데타 직전에 박정희가 처했던 상황은 강제예편이 확실시 된 때로, 문경보통학교 교사를 집어 치우고 “긴 칼 차고 싶어” 만주군관학교를 자원했던 그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저자는 “쿠데타를 일으키는 데는 물론 현실적인 명분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개인적 무의식의 차원에서 조망해 볼 때 516은 박정희가 자신의 갈등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일으킨 사건”이라고 본다.


무리한 3선개헌과 유신헌법 선포 역시 국민으로부터 유기된다는 두려움이 낳은 생존욕과 공격성의 발로였으며, 그 일에는 결코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유아독존적 성향이 가세했다. 인권을 내세운 카터 정부의 압박 역시 박정희에게는 유기불안의 공포를 연상시켰으며, 뒤에 다시 부연되겠지만, 요즘 박정희 신화의 새로운 연료가 되고 있는 핵개발 또한 “자주국방의 틀을 다진다는 의미도 있지만 [····] 거세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미국에 대항할 힘이 필요했던 박정희의 신경증적인 욕구가 현실에 투영된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대구사범 4학년에 재학중이던 1935년, 박정희는 18세의 나이로 김호남과 결혼을 한다. 아버지의 강권에 의한 원치 않는 결혼이었다. 저자는 아들에게 강제결혼을 시킨 것으로 보아, 강한 아버지와 약한 아들 사이의 지속적인 긴장과 거세위협이 있었다고 추론하지만(이것이 이 책의 단점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박정희의 문제는 아버지가 부재했다는 것이다. 강제결혼을 행사할 수 있었던 아버지는 형식적으로만 존재하는 ‘꼰대’에 불과했지, 존경하고 동일시되고픈 ‘위대한 아버지’는 아니었다.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부실한 아버지는 그로 하여금 나폴레옹과 히틀러 전기를 탐독하게 했고, 식민시대라는 상황과 맞물리면서 박정희에게 강한 남성성에 대한 갈구와 ‘나에겐 나라가 없다’는 고아의식을 심어 주었다.


박정희가 불현듯 교사직을 집어 치우고 군인이 된 까닭과 일본을 자신의 조국으로 여기게 된 심리 기저에는 역할모델로서의 아버지가 부재했던 원인이 크다. 부실한 아버지는 단순히 자기 집안의 문제만 아니라,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조선의 상황과 동일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그런 심리 속에서 박정희는 자신을 고아로 느끼는 것과 동시에 남성성으로 충만한 제국주의 일본을 자신이 닮고 싶은 아버지, 즉 새 아버지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박정희 미일 외교를 복기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군사정권을 최초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1965년의 한일국교정상화 회담은 대다수 한국인들에게는 굴욕외교로 비쳐졌지만 박정희의 입장에서는 보은외교였다.


박정희의 ‘유신’은 ‘메시아 콤플렉스’


반면 핵폭탄에 의해 새 아버지(일본)를 잃고, 해방과 함께 모든 꿈을 잃어버리고 졸지에 실업자가 됐던 박정희로서는 미국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박정희와 미국 사이가 벌어진 것은 1979년 지미 카터 방문을 전후해서라고 알고 있지만, 서중석의 『비극의 현대지도자』(성균관대학교 출판부,2002)의 일절에 따르면 “한국군 장교로는 드물게 미국에 가서 훈련받거나 미국적 사고를 익힐 기회나 의사도 없”었던 사람이 박정희였고 “그가 이해하고 긍지를 느끼며 정체성(identity)을 가질 수 있는 세계는 불행히도 그것에[=일본] 한계지어져 있었다”고 한다. 군 생활 중에 미군과 상당한 마찰을 빚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박정희가 미국과 유대를 가지려고 했던 때는 자신의 사상을 의심받던 쿠데타 초기와 달러를 벌기 위해 월남에 파병을 했던 시기에 집중되며, 나머지 기간은 늘 미국의 국내 정치 간섭과 북한에 대한 우유부단한 태도로 불편한 심기를 꾹 눌러 참고 있었다. 박정희의 핵무기 개발은 그의 마음 속에 은닉되어 있던 반미(反美) 혹은 탈미(脫美) 감정의 소산이다.


516이라는 원죄와 3선개헌이라는 얼룩이 있긴 했지만 유신 이전까지만 해도 박정희는 최소한 ‘실패한 대통령’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저자는, 박정희를 유신의 길로 인도한 것은 강박적인 ‘메시아 콤플렉스’라고 지적한다. 메시아는 신적인 존재이며 인간을 고통에서 구원해 줄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고 영원하다는 특성을 가지는 바, 박정희가 메시아적 존재를 자신의 자아 이상으로 설정한 것은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 공포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 “유기불안과 거세불안으로 인해 늘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그로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 역시 그만큼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이런 문제들에 시달리던 그의 입장에서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메시아적 인물이 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불안 해소 방법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와의 힘의 대결에서 우위를 확보해 거세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고, 자기애적인 환상을 현실로 끌어 올림으로써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을 자신에게 영원히 묶어 둘 수 있고, 그럼으로써 어머니가 안겨준 유기불안에서도 완전히 탈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으로부터 유기 공포와 부마사태


박정희 사후, 우리는 두 개의 수수께끼와 대면한다. 하나는 박정희 주변 인사들(김정렴선우연)이 제기한 평화적 정권이양 가능성으로 그들은 김재규를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박정희가 핵을 개발하고 자주 국방의 기틀을 완전히 다진 다음에 김종필에게 대권을 물려주고 미련없이 정계를 은퇴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유신 헌법 아래서 똑같은 공화당 인사 그것도 조카사위에게 선거도 아닌 추대로 ‘대권을 물려주는’ 것을 일컬어 평화적 정권이양이라고 말하는 박정희 주변 인사들의 요상한 사고구조는 따지지 말자. 첫번째 수수께끼는 평화적 정권이양과 박정희의 정계은퇴 가능성에 국한된다. 다음은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박정희를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는 김재규의 주장이다. 그는 군사법정에서 공개하기를, 부마사태로 인한 데모가 다른 도시로 확산될 것 같다는 보고를 받은 박정희가 “만약에 서울에 419와 같은 사태가 일어난다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어.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 같은 친구들이 발포명령을 내렸다가 사형을 받았지만, 대통령인 내가 명령한 걸 가지고 누가 뭐라고 할거야? 나를 사형에 처할 수 있을 것 같애?”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때 곁에 있던 차지철이 “캄보디아에서는 3백만명이나 죽었는데 우리가 1∼2백만명쯤 희생시키는 것이야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라고 응대했었고. 하므로 두 번째 수수께끼는 부마사태의 확산에 따른 유혈사태 여부가 될 것이다.


신용구는 첫 번째 수수께끼에 대해 다분히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라고 말한다. 평생 거세불안과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던 박정희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메시아적 환상에 매달렸는데 1977년 쌀 생산량이 4천만 섬을 돌파해 자급자족의 길이 열림으로써 메시아적 욕구와 자기애적 환상 충족에 바짝 다가섰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핵개발에 의한 자주국방에만 성공하면 폭군적이고 변덕 많은 아버지인 미국의 종속에서 탈피하거나 최소한 대등한 입장을 맺음으로써 무의식적인 죽음의 공포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아의 안정을 되찾고 정치적 유연성도 회복하게 되었으리란 게 저자의 추측이다. 두 번째 수수께끼에 대해서 역시 저자는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말한다. 박정희의 생존욕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공격성 그리고 자기애적 환상은 절대 국민으로부터 유기되는 자신의 처지를 방관하지 않았을 것이란 게 그 이유로, 그 예들은 앞서 충분히 기술되었다.   














 


히틀러와 박정희의 메시아 콤플렉스는 ‘아버지의 부재’가 불러


박정희의 심리세계를 통해 통치 스타일의 한 자락을 밝혀 보이는 이 책은 이미 괄호 속에 내가 썼듯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공식에 박정희를 억지로 끼워 맞춘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아버지-어머니-아들’ 세 꼭지점으로 이루어진 오이디푸스 삼각형이 허물어질세라 자꾸만 일으켜 세운다. 하지만 박정희 집안엔 일반적(‘정상적’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으로 볼 수 있는 오이디푸스 삼각형 대신, 아버지의 자리에 세째 형이 들어선 변형대체 형태의 삼각형만 보인다. 구미 일대에서 천재로 소문이 파다했던 사회주의자로 박정희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박상희가 아버지 대신 삼각형의 한 꼭지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박정희는 세째 형이 대신 점거한 ‘부재하는 아버지’의 존재를 의식하며 강한 아버지를 소망했고, 경쟁자였던 세째 형이 1946년 10월 대구폭동의 와중에 진압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자 그 자리를 자신이 접수했다. 그리고 무능하고 부실했던 아버지에 대한 반동형성이 그로 하여금 10월 유신으로 표상되는 권위적이고 전제적인 아버지, 국부(國父)가 되게 했다.


신용구의 『박정희 정신분석, 신화는 없다』는 2차대전 중 CIA의 전신인 OSS의 의뢰로 쓰여진 월터 C. 랑거의 『히틀러의 정신분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신용구의 책 가운데 월터 C. 랑거의 선행작업이 자주 언급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독자들은 두 저술 간의 유사성을 금새 간파했을 것이다. 까닭은 월터 C. 랑거가 모주망태의 아들로 태어난 히틀러의 메시아 콤플렉스를 설명하는 대목이, 누군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가족소설’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처럼 매우 정형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어머니는 그를 낳기 전에 두 세 명의 자식을 잃은 경험이 있었고 히틀러 자신도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왜 다른 애들은 죽었는데 자기는 살아 남았는지 궁금”해 했을 아이가 끌어낸 자연스런 결론은, 자신이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선택”되었다는 믿음으로 낙착된다. 얼토당토 않은 그 신념은 두 의붓자식에 비하여 어머니가 자신을 더 선호하였다는 사실에 의해 보강된다. 이 이야기들은 마치 똑같은 주제와 갈등이 약간씩 변형 반복되는 텔레비전 연속극 같지 않은가!  


히틀러의 메시아 콤플렉스를 더욱 강화했던 조건은 박정희의 예에서와 같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혹은 ‘없는 게 차라리 낳았던’ 부재하는 아버지의 존재였다 : “환자들 중에는 어린 시절에 제멋대로 자라면서 어머니와 강한 애착을 형성한 아이들이 친아버지를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맏이일수록 그런 경향은 심해지며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은 경우 더욱 그렇다. 히틀러의 경우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스물 세 살이 많았다. 거의 어머니 나이의 두 배였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심리학적 관점에서는 그런 경우, 자신의 아버지를 실제 아버지로 믿지 않고 자신의 친아버지를 초자연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 심리학, 정치적 무지와 무관심 양산할 수도


독재자들이 자신의 출생과 성장과정은 물론이고 가족의 역사를 밀봉해 놓고 대중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는 까닭은, 그래야만 자신의 ‘처녀수태’를 쉽게 조작할 수 있으며 메시아로 등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용구와 월터 C. 랑거의 책은 분석 방법이나 분석 대상에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결정적으로 틀리는 것이 있다. 단지 갈등의 처리과정이 성공적이지 못했을 뿐 박정희는 결코 “정신병적 수준은 아니었”던데 반해, 히틀러는 “정신 분열증의 경계에 위치한 신경증 환자”(경계선 인격장애)였다. 그래서 히틀러는 정신분석에 양성반응을 보이고 (정신분석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사례가 많고) 박정희는 음성반응을 보인다(정신분석의 잣대로만 설명하는 것이 부적절한 사례가 많고).  


지면이 모자라서 히틀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피력하지 못하는 아쉬움은 뒤로하고, 대신 두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약간의 공소(空疎)함에 대해 말하고 싶다. 『비주류의 역사』(녹두,2003)를 쓴 마이클 파렌티가 「정치심리학에 대하여」라는 글 가운데 아프게 지적했듯이 정치 지도자들의 행동이나 정치적 문제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은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왜곡시키고 역사에 대한 정치적인 의미를 축소시킬 수 있다. 가부장적이고 부르주아 가치 지향적인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정치 지도자나 그들의 행동에 잘못 적용하면, 중립적인 학문(정신분석)을 가장한 교묘한 이데올로기 공세가 되기 십상이다. 실제로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이 미국 사회를 지배하던 50~ 60년대에 미국의 정치심리학자들은 유소년기에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억누르고 있었던 사람은 왕이나 자본가들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게 되고, 가난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자본계급의 무자비한 착취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어렸을 때 가족에 대한 적개심을 가졌던 사람들이라는 주장을 대중에게 널리 퍼뜨렸다. “모든 권력에 대한 저항은 가부장적인 권위에 대한 반항에서 출발한다”고 보는 그들에게 마르크스엥겔스는 물론 레닌 트로츠키체 게바라 등의 혁명가들은 모조리 가족 관계에서 얻은 상흔을 사회관계에 까지 연장하여 보상 받으려고 했던 미성숙아로 치부된다.  


유년기가 성년기보다 앞서기 때문에 유년기의 경험이 성인이 되어 경험한 것보다 강력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준다는 정신분석학적인 모델이 정치가들에게 적용될 때, 정치심리학적인 해석은 중요한 현실을 정확하게 설명하기 보다는 오히려 현실 자체를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면서 그럴듯한 변명거리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혁명의 본질적인 문제와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데도 아버지에 대한 감정 때문에 혁명가가 되었다고 일단 확신하게 되면, 혁명 그 자체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며 결국은 정치적 무지와 무관심을 양산하게 된다.


박정희와 히틀러에게 성찰을 따져야 한다


정치심리학적 ‘전이 이론’을 거부하는 마이클 파렌티는, 개개인의 정치적 인격은 어린 시절  T.V영화학교공동생활 등을 통해서 받아들인 ‘사회적 가치의 내면화’ 과정을 통해 완성되어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개인과 가족이 그들이 태어난 사회보다 시간상 앞선다고 보는 고전적인 프로이트 이론 대신 그는 사회가 가족이나 개인의 출생과 성장보다 선행한다고 주장하며, 정치심리학은 그런 방법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그의 주장은 정치심리학의 근거가 되고 있는 정신분석학 자체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부단한 도전과 수정재구성의 역사라는 것을 상기할 때 더욱 수긍이 간다.    


다행히도 『히틀러의 정신분석』은 히틀러 개인에 관심을 쏟는 게 아니라 그의 발달 과정에 영향을 미친 “사회적 영향력”을 분석하고자 한다. 그런 노고 끝에 저자는 많은 독일 남자들이 “남자다운” 성격으로 덮여 있지만 그들의 과시하는 복종적 행동규율희생 같은 가치들은 반대로 그들의 “강한 여성적-피학 성애적 경향”을 나타내 준다고 말한다. 독일 남자들은 그런 혼란을 숨기기 위해 더더욱 극단적인 용기호전성결단성을 지향하는 바, 히틀러는 그런 독일 남성의 이중적 성향을 잘 알았기 때문에 “독일 국민의 무의식적 경향을 이용하고 그들의 대변자 역할을 하는 자신의 능력을 통해 자신의 개인적 갈등”마저 해결할 수 있었다. 저자에 의하면 독일 문화의 집단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특질이 히틀러라는 악마를  쉽게 수락했다는 것이다.


박정희나 히틀러는 정치 지도자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을 연구한 경우보다 더 뚜렷하게 과장된 형태의 풍부한 사례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을 뿐, 우리 역시 타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티끌 같지만 혼자 감내하기에는 산더미처럼 큰 정신적 장애를 지니고 산다는 의미에서 ‘오이디푸스의 가족’임을 부인할 수 없다. 자기 손으로 두 눈을 멀게 하고나서야 비로소 자기 내면을 직시할 수 있었던 오이디푸스처럼 박정희와 히틀러에게도 그런 용기와 성찰의 힘이 있었는지를 감히 따지지 않는다면, 이 책들은 그들만 아니라 우리 자신마저 한없는 연민의 눈으로 살피게 만든다. 


*<피플> 2004년 10월호에 소설가 장정일 씨가 쓴 글을 <피플>지의 양해를 얻어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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