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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유기불안에 대한 공포와 유아독존적인 자기애는 서로의 영역을 보완해주거나 자극하면서 한덩어리로 커졌다. 유기불안을 이기기 위해 더 많은 자기애가 공급되어야 했던 것이다. 소아기에 습득한 유기불안의 공포로 인한 동물적 생존욕과 그에 부수된 공격성 그리고 어머니의 편애가 키워준 과도한 자기애적 유아독존 성향은 박정희의 일생동안 번갈아 또는 혼효되어 나타난다. 박정희의 소아기와 가계 그리고 히틀러와의 유사성 과문해서 또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박정희는 히틀러다!’라고 쓴 사람은 이병주다. 이승만 프로이트에 의하면 1~4세 사이의 소아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 특히 자신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가족 내의 일들을 오해하기 마련이고 어릴 때 받아들인 잘못된 전제 위에 자신의 인격구조를 형성한다고 한다. 우리가 이 가정에 온전히 동의하든 않든 월터 C. 랑거가 히틀러의 『나의 투쟁』가운데서 얄미울 정도로 잘 뽑아낸 다음의 구절은, 히틀러 스스로 자신의 인격이 소아기의 경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자, 세 살짜리 소년이 있다. 바로 이 나이에 소아는 자신의 첫인상을 의식하게 된다. 똑똑한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초기 기억의 흔적이 노령에서조차 발견된다.” 『박정희 정신분석, 신화는 없다』를 쓴 신용구는, 정치가와 정치가의 행동에 대해서 잘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심리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교사에서 군인으로, 남로당 간부에서 반공주의자로, 또 5 박정희의 아버지 박성빈(1871~1938)은 부농이자 4대 독자였던 아버지의 큰 기대와 편애 속에 자랐다. 부모의 과보호 아래서 무책임하고 무절제하게 자랐던 것으로 평판이 난 박성빈은, 아버지가 전답을 거의 탕진하면서까지 뒤를 밀어 주었으나 아무런 관직을 얻지 못한데다가 동학에 가담하여 체포되었다가 고종의 대사면령을 받고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전력을 갖고 있다. 그런 장남에게 실망한 아버지는 남은 재산을 막내아들 박일빈에게 물려주고 박성빈에게는 단 한 푼도 남겨주지 않았다. 유기불안에 시달리던 아이의 자기애적 환상 부모의 편애 속에서 세상을 자기 것으로 여기며 살았던 박성빈은 아버지의 태도 변화로 상당한 혼란을 겪게 됐고, 그것이 그의 나머지 일생을 술이나 마시고 시조나 읊는 한량 생활로 일관하게 했다. 박정희는 그런 아버지 밑에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박정희가 태어나던 1917년, 20년 연상의 큰형 박동희는 부도를 낸 채 만주로 도피한 한 상태였고, 아버지 대신 둘째 형인 박무희가 농사일로 집안을 꾸려 나가던 중이었다. 박정희의 어머니 백남의가 당시엔 고령에 속하던 45세의 나이로 임신했을 때 큰 딸인 박귀희도 임신을 하고 있었다. 모녀가 동시에 출산을 해야하는 부끄러운 상황은 백남의로 하여금 여러 차례 유산을 시도하게 만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태어난 박정희는 모유를 거의 먹지 못했으며, 어머니로부터 “널 낳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었다”는 얘기를 자주 들으며 자랐다. 이 일화를 놓치지 않고 낚아챈 신용구는 “아직까지 사고체계가 미숙하고 단순한 5세 이전의 아이가 어른들의 농담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면서, 이때 박정희는 “엄마가 진짜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유기불안”에 빠져들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한다. 훗날 박정희는 자신의 소년 시절에 대해 밝히면서 “우리 어머니만한 사람은 없고 모든 것이 어머니 덕택”이라고 자주 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영받지 못한 탄생’이라는 박정희의 ‘원죄’는 죽는 순간까지 그를 따라다닌 짙고 어두운 그림자”가 되었다. 워낙 늦둥이였던 탓에 형제들과 나이 차이가 많았던 박정희는 어머니의 편애를 시기하거나 질투할 경쟁자가 없는 상태에서 ‘사랑의 독점’을 누린데다가, 고의적인 유산을 시도했던 여성들이 핍박(?)을 딛고 태어난 아이에게 보이는 특별한 애정(‘취소 기제’라고 부름)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어머니의 눈길과 손길이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유아는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믿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어린 시절에 형성되는 자기애(自己愛)의 핵심이다. 건강한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심리적 자산’에 해당하는 자기애는 현실의 고통에 대한 면역력을 높여주고 쉽게 좌절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강화되면 일찌감치 유아독존적인 인격을 형성하게 된다. 유기불안에 시달리던 아이가 어머니의 편애를 받게 될 때, 자기애적인 환상은 겉잡을 수 없이 증폭된다. 어머니가 자기를 버리거나 죽일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형제들보다 더 사랑하게 된 것은, 자기가 그만큼 뛰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믿게 만드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런 박정희에게 유기불안과 자기애를 균형감있게 처리해 줄 반대급부가 없었다. 농담처럼 흘린 어머니의 유기위협을 완화해줄 아버지가 그에게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없는 거나 마찬가지’ 였던 아버지는 또 백남의의 과도한 모성애에 제동을 걸어 주지도 못했다. 다시 말해 박정희에게는 어머니의 편애로 인해 아버지의 미움을 사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거세위협은 있었지만, 모든 남아들이 겪는다고 상정되는 심각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부재했다. 그것은 박정희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우리나라의 일반적 사정일 수도 있다.
소아기의 유기불안 공포가 동물적 생존욕과 공격성 낳았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지탱하는 주춧돌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모든 신경증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하지만 중국의 수필가 임어당이 『생활의 발견』 가운데 ‘중국인들과 같은 대가족 사회에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따위가 생겨날 수 없다’고 단언한 바 있었듯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문화적 일반화는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전인권의 『남자의 탄생』(푸른숲,2003)은 서양과 달리 한국의 육아 문화는 사내아이로부터 어머니를 차단하지 않는다고 한다. 서양식 육아법은 아이의 성장에 따라 체계적으로 어머니에 대한 접근을 막지만, 한국에서는 심하면 12세가 되기까지 남아(男兒)에게 동침권이 부여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아이가 자라는 동안 어머니에게 홀대 받는 것은 남편(아버지)이다. 이렇듯 대폭적인 구강 만족(젖빨기)을 맞본 한국의 남아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말 그대로 ‘바다 건너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한국의 남성에게는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의 성적 박탈감이나 아버지로부터의 견제(거세위협)가 문제되는 게 아니라, ‘동굴 속 황제’로 키워진 유아독존적인 자기애가 문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난관 극복 과정이 생략된 소황제(小皇帝)들의 사회 적응이 여간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아버지들은 어머니를 놓고 아들과 성적 경쟁을 벌이지 않는다. 유교 문화를 체현하고 있는 한국의 아버지들은 가정 내에서 도덕적 소아기에 습득한 유기불안의 공포로 인한 동물적 생존욕과 그에 부수된 공격성 그리고 어머니의 편애가 키워준 과도한 자기애적 유아독존 성향은 박정희의 일생동안 번갈아 또는 혼효되어 나타난다. 박정희는 미군정 당시 금지되어 있던 남로당에 가입해 조직도상 중요한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여순반란사건 직후 대대적인 숙군 작업 중에 군정보부에 구속되자 “이럴 때가 올 줄 알았다”며 단번에 자술서를 써내려갔다. 박정희를 미화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더라도 비굴한 인생은 살지 않겠다”는 “사무라이적 인생관”으로 이 일화를 치장한다. 하지만 신용구의 분석은 정반대다. 소아기 때부터 저장되어 있던 끈질긴 생존 욕구가 죽음의 위협 앞에서 가차없이 동지들을 배신하게 했던 것이다. 제국주의 ‘일본’이라는 새 아버지로 그의 생존욕과 공격성은 자신의 안위를 위협하는 상황이 닥칠 때마다 극단적인 행동도 불사하게 했다. 5 무리한 3선개헌과 유신헌법 선포 역시 국민으로부터 유기된다는 두려움이 낳은 생존욕과 공격성의 발로였으며, 그 일에는 결코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유아독존적 성향이 가세했다. 인권을 내세운 카터 정부의 압박 역시 박정희에게는 유기불안의 공포를 연상시켰으며, 뒤에 다시 부연되겠지만, 요즘 박정희 신화의 새로운 연료가 되고 있는 핵개발 또한 “자주국방의 틀을 다진다는 의미도 있지만 [····] 거세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미국에 대항할 힘이 필요했던 박정희의 신경증적인 욕구가 현실에 투영된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대구사범 4학년에 재학중이던 1935년, 박정희는 18세의 나이로 김호남과 결혼을 한다. 아버지의 강권에 의한 원치 않는 결혼이었다. 저자는 아들에게 강제결혼을 시킨 것으로 보아, 강한 아버지와 약한 아들 사이의 지속적인 긴장과 거세위협이 있었다고 추론하지만(이것이 이 책의 단점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박정희의 문제는 아버지가 부재했다는 것이다. 강제결혼을 행사할 수 있었던 아버지는 형식적으로만 존재하는 ‘꼰대’에 불과했지, 존경하고 동일시되고픈 ‘위대한 아버지’는 아니었다.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부실한 아버지는 그로 하여금 나폴레옹과 히틀러 전기를 탐독하게 했고, 식민시대라는 상황과 맞물리면서 박정희에게 강한 남성성에 대한 갈구와 ‘나에겐 나라가 없다’는 고아의식을 심어 주었다. 박정희가 불현듯 교사직을 집어 치우고 군인이 된 까닭과 일본을 자신의 조국으로 여기게 된 심리 기저에는 역할모델로서의 아버지가 부재했던 원인이 크다. 부실한 아버지는 단순히 자기 집안의 문제만 아니라,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조선의 상황과 동일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그런 심리 속에서 박정희는 자신을 고아로 느끼는 것과 동시에 남성성으로 충만한 제국주의 일본을 자신이 닮고 싶은 아버지, 즉 새 아버지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박정희 미 박정희의 ‘유신’은 ‘메시아 콤플렉스’ 반면 핵폭탄에 의해 새 아버지(일본)를 잃고, 해방과 함께 모든 꿈을 잃어버리고 졸지에 실업자가 됐던 박정희로서는 미국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박정희와 미국 사이가 벌어진 것은 1979년 지미 카터 방문을 전후해서라고 알고 있지만, 서중석의 『비극의 현대지도자』(성균관대학교 출판부,2002)의 일절에 따르면 “한국군 장교로는 드물게 미국에 가서 훈련받거나 미국적 사고를 익힐 기회나 의사도 없”었던 사람이 박정희였고 “그가 이해하고 긍지를 느끼며 정체성(identity)을 가질 수 있는 세계는 불행히도 그것에[=일본] 한계지어져 있었다”고 한다. 군 생활 중에 미군과 상당한 마찰을 빚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박정희가 미국과 유대를 가지려고 했던 때는 자신의 사상을 의심받던 쿠데타 초기와 달러를 벌기 위해 월남에 파병을 했던 시기에 집중되며, 나머지 기간은 늘 미국의 국내 정치 간섭과 북한에 대한 우유부단한 태도로 불편한 심기를 꾹 눌러 참고 있었다. 박정희의 핵무기 개발은 그의 마음 속에 은닉되어 있던 반미(反美) 혹은 탈미(脫美) 감정의 소산이다. 5 국민으로부터 유기 공포와 부마사태 박정희 사후, 우리는 두 개의 수수께끼와 대면한다. 하나는 박정희 주변 인사들(김정렴 신용구는 첫 번째 수수께끼에 대해 다분히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라고 말한다. 평생 거세불안과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던 박정희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메시아적 환상에 매달렸는데 1977년 쌀 생산량이 4천만 섬을 돌파해 자급자족의 길이 열림으로써 메시아적 욕구와 자기애적 환상 충족에 바짝 다가섰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핵개발에 의한 자주국방에만 성공하면 폭군적이고 변덕 많은 아버지인 미국의 종속에서 탈피하거나 최소한 대등한 입장을 맺음으로써 무의식적인 죽음의 공포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아의 안정을 되찾고 정치적 유연성도 회복하게 되었으리란 게 저자의 추측이다. 두 번째 수수께끼에 대해서 역시 저자는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말한다. 박정희의 생존욕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공격성 그리고 자기애적 환상은 절대 국민으로부터 유기되는 자신의 처지를 방관하지 않았을 것이란 게 그 이유로, 그 예들은 앞서 충분히 기술되었다.
히틀러와 박정희의 메시아 콤플렉스는 ‘아버지의 부재’가 불러 박정희의 심리세계를 통해 통치 스타일의 한 자락을 밝혀 보이는 이 책은 이미 괄호 속에 내가 썼듯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공식에 박정희를 억지로 끼워 맞춘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아버지-어머니-아들’ 세 꼭지점으로 이루어진 오이디푸스 삼각형이 허물어질세라 자꾸만 일으켜 세운다. 하지만 박정희 집안엔 일반적(‘정상적’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으로 볼 수 있는 오이디푸스 삼각형 대신, 아버지의 자리에 세째 형이 들어선 변형 신용구의 『박정희 정신분석, 신화는 없다』는 2차대전 중 CIA의 전신인 OSS의 의뢰로 쓰여진 월터 C. 랑거의 『히틀러의 정신분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신용구의 책 가운데 월터 C. 랑거의 선행작업이 자주 언급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독자들은 두 저술 간의 유사성을 금새 간파했을 것이다. 까닭은 월터 C. 랑거가 모주망태의 아들로 태어난 히틀러의 메시아 콤플렉스를 설명하는 대목이, 누군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가족소설’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처럼 매우 정형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어머니는 그를 낳기 전에 두 세 명의 자식을 잃은 경험이 있었고 히틀러 자신도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왜 다른 애들은 죽었는데 자기는 살아 남았는지 궁금”해 했을 아이가 끌어낸 자연스런 결론은, 자신이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선택”되었다는 믿음으로 낙착된다. 얼토당토 않은 그 신념은 두 의붓자식에 비하여 어머니가 자신을 더 선호하였다는 사실에 의해 보강된다. 이 이야기들은 마치 똑같은 주제와 갈등이 약간씩 변형 반복되는 텔레비전 연속극 같지 않은가! 히틀러의 메시아 콤플렉스를 더욱 강화했던 조건은 박정희의 예에서와 같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혹은 ‘없는 게 차라리 낳았던’ 부재하는 아버지의 존재였다 : “환자들 중에는 어린 시절에 제멋대로 자라면서 어머니와 강한 애착을 형성한 아이들이 친아버지를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맏이일수록 그런 경향은 심해지며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은 경우 더욱 그렇다. 히틀러의 경우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스물 세 살이 많았다. 거의 어머니 나이의 두 배였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심리학적 관점에서는 그런 경우, 자신의 아버지를 실제 아버지로 믿지 않고 자신의 친아버지를 초자연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 심리학, 정치적 무지와 무관심 양산할 수도 독재자들이 자신의 출생과 성장과정은 물론이고 가족의 역사를 밀봉해 놓고 대중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는 까닭은, 그래야만 자신의 ‘처녀수태’를 쉽게 조작할 수 있으며 메시아로 등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용구와 월터 C. 랑거의 책은 분석 방법이나 분석 대상에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결정적으로 틀리는 것이 있다. 단지 갈등의 처리과정이 성공적이지 못했을 뿐 박정희는 결코 “정신병적 수준은 아니었”던데 반해, 히틀러는 “정신 분열증의 경계에 위치한 신경증 환자”(경계선 인격장애)였다. 그래서 히틀러는 정신분석에 양성반응을 보이고 (정신분석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사례가 많고) 박정희는 음성반응을 보인다(정신분석의 잣대로만 설명하는 것이 부적절한 사례가 많고). 지면이 모자라서 히틀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피력하지 못하는 아쉬움은 뒤로하고, 대신 두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약간의 공소(空疎)함에 대해 말하고 싶다. 『비주류의 역사』(녹두,2003)를 쓴 마이클 파렌티가 「정치심리학에 대하여」라는 글 가운데 아프게 지적했듯이 정치 지도자들의 행동이나 정치적 문제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은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왜곡시키고 역사에 대한 정치적인 의미를 축소시킬 수 있다. 가부장적이고 부르주아 가치 지향적인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정치 지도자나 그들의 행동에 잘못 적용하면, 중립적인 학문(정신분석)을 가장한 교묘한 이데올로기 공세가 되기 십상이다. 실제로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이 미국 사회를 지배하던 50~ 60년대에 미국의 정치심리학자들은 유 유년기가 성년기보다 앞서기 때문에 유년기의 경험이 성인이 되어 경험한 것보다 강력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준다는 정신분석학적인 모델이 정치가들에게 적용될 때, 정치심리학적인 해석은 중요한 현실을 정확하게 설명하기 보다는 오히려 현실 자체를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면서 그럴듯한 변명거리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혁명의 본질적인 문제와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데도 아버지에 대한 감정 때문에 혁명가가 되었다고 일단 확신하게 되면, 혁명 그 자체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며 결국은 정치적 무지와 무관심을 양산하게 된다. 박정희와 히틀러에게 성찰을 따져야 한다 정치심리학적 ‘전이 이론’을 거부하는 마이클 파렌티는, 개개인의 정치적 인격은 어린 시절 T.V 다행히도 『히틀러의 정신분석』은 히틀러 개인에 관심을 쏟는 게 아니라 그의 발달 과정에 영향을 미친 “사회적 영향력”을 분석하고자 한다. 그런 노고 끝에 저자는 많은 독일 남자들이 “남자다운” 성격으로 덮여 있지만 그들의 과시하는 복종적 행동 박정희나 히틀러는 정치 지도자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을 연구한 경우보다 더 뚜렷하게 과장된 형태의 풍부한 사례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을 뿐, 우리 역시 타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티끌 같지만 혼자 감내하기에는 산더미처럼 큰 정신적 장애를 지니고 산다는 의미에서 ‘오이디푸스의 가족’임을 부인할 수 없다. 자기 손으로 두 눈을 멀게 하고나서야 비로소 자기 내면을 직시할 수 있었던 오이디푸스처럼 박정희와 히틀러에게도 그런 용기와 성찰의 힘이 있었는지를 감히 따지지 않는다면, 이 책들은 그들만 아니라 우리 자신마저 한없는 연민의 눈으로 살피게 만든다. *<피플> 2004년 10월호에 소설가 장정일 씨가 쓴 글을 <피플>지의 양해를 얻어 싣습니다. |
주요기사
우리들은 모두 오이디푸스의 가족이다
By 민족문제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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