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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문학평론가 김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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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을 할 때에는 나름의 논리가 정교하게 구사됩니다. 당시 자료들을 꼼꼼하게 읽다보니 몇 가지 논리가 파악되더군요. 그래서 저는 ‘굴종’에서 ‘협력’으로 패러다임을 바꾸었습니다. 임종국 선생이 ‘굴종과 저항’으로 접근한다면 저는 ‘협력과 저항’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협력과 저항』의 의미는 여기에 있을 겁니다.”


홍기돈 | 문학평론가


친일 논리구조의 발견, 그것이 청산이다


  임종국의 『친일문학론』(평화출판사, 1966)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친일 청산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내 생각은 그러하다. 예컨대 나는 ‘친일진상규명특별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는 열린우리당 위에 물음표를 하나 얹어두고 접근한다. 그들의 파병 주장은 친일행각에 나섰던 이들의 논리를 반복하면서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자, 일제에 동조했던 소설가 이석훈의 항변을 보라. “나는 진실을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으로 충분해. 자네야말로 위선자잖아. 동포의 운명에 눈을 가리는 교활한 위선자잖아.”(「고요한 폭풍」, 『매일신보』, 1940.12) 친일 행위가 작가 양심의 추락이라는 비판에 대한 작가의 대응이다. 그가 보기에 친일을 거부하는 행위는, ‘동포의 운명’을 몰각한, ‘일신의 만족’에 머무르는 유아적인 이기주의 발현에 불과하다. 개인적인 소신과는 무관하게 ‘민족의 안위’를 위해 파병에 찬성하는 열린우리당 일부 국회의원들의 모습이 이 위에 그대로 겹쳐진다. 파병 반대에 나선 민주노동당에 대해 ‘무책임한 주의주장’으로 덧씌우는 태도 또한 마찬가지다. 이러한 열린우리당이 ‘친일진상규명특별법’ 개정을 추진한다니 의문부호가 자연스럽게 떠오르지 않겠는가.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여야겠다. ‘친일진상규명특별법’은 당연히 개정되어야 한다. 동시에 우리 군대의 이라크 파병을 옹호하는 논리 또한 마땅히 비판하여야 한다. 그리고, 파병한 군대는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철군해야 한다. 문제는 사안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친일분자, 파병 찬성론자=악’이라는 등식을 전제하고 나면 더 이상의 논리는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남은 것은 오로지 ‘단죄’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친일 청산에 관한 문학계 최고의 업적으로 손꼽히는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을 굳이 문제삼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친일의 논리 구조를 발견할 수 있을 때라야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친일 행각의 문제점을 과거에 한정시키지 않고 현재화시켜 전유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 때마침 『협력과 저항』소명출판, 2004)이 출판되었다. 내용을 살펴보면 친일문학(인)의 논리를 이해하는 밑그림으로서 오랫동안 기억될 저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협력과 저항』의 저자 김재용을 찾아갔다. 그는 『친일문학론』을 다음과 같이 평한다.


친일, 강요에 의한 굴종이 아니라 협력이다


  “임종국 선생은 친일을 강요에 의한 굴종으로 파악했습니다. 맷집의 문제라고 할까요? 맷집이 되는 사람은 강요에 견디었습니다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강요에 굴종하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굴종이라면 다른 논리가 필요 없게 됩니다. 강요에 대항하여 꿋꿋하게 견디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게 되어버리거든요. 이는 또한 선과 악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굴종은 곧 상대편으로 넘어간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선악의 문제’를 ‘시비의 문제’로 바꾸어서 봐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친일을 할 때에는 나름의 논리가 정교하게 구사됩니다. 당시 자료들을 꼼꼼하게 읽다보니 몇 가지 논리가 파악되더군요. 그래서 저는 ‘굴종’에서 ‘협력’으로 패러다임을 바꾸었습니다. 임종국 선생이 ‘굴종과 저항’으로 접근한다면 저는 ‘협력과 저항’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협력과 저항』의 의미는 여기에 있을 겁니다.”


  결국 친일 문제를 바라보는 임종국과 김재용의 차이는 ‘굴종인가, 협력인가’의 차이가 되겠다. 그렇다면, 시비를 가려야 할 친일의 논리는 과연 어떤 것인가. ‘굴종이 아니라 협력’이라는 김재용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이를 따져 보아야 하겠다. 김재용은 친일의 논리를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서 설명하였다.


  “친일의 첫 번째 유형은 근대화론입니다. 이 때 주목해야 할 사건이 ‘무한 삼진의 함락’이지요. 무한 삼진은 ‘동방의 마드리드’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1938년 10월 일본군에 의해 함락됩니다.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이길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은 이로써 완전히 사라지게 되죠. 이를 계기로 친일의 논리가 발흥하기 시작합니다. 중국은 봉건, 즉 전근대에 머물러 있고 일본은 근대로 나아갔는데, 전근대와 근대의 대결에서 근대가 이겼다는 겁니다. 근대적인 국가 일본이 봉건에 발목잡힌 국가 중국을 해방시켰다는 논리입니다. 백철의 ‘사실수리론’은 이런 논리의 가장 앞자리에 놓입니다. “기왕 허물어질 성문이라면 하루라도 속히 허물어져 버리는 것이 역사적으로 진보”라고까지 주장을 펼치니까요. 백철의 이런 논리를 체득하여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사람으로는 이광수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광수가 왜 내선일체의 신민화를 맹렬히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조선인은 일본인이 되어야만 차별을 넘어설 수 있다는 나름의 ‘차별 극복론’이었던 셈입니다. 여기에는 물론 ‘근대의 완성’이라는 태도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유형은 근대초극론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사건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합니다. 첫째는 1940년 3월 왕정위 정부가 수립되어 일제에 협력하는 사건입니다. 중국인이 자발적으로 일본 중심의 동양사회에 편입되는 것을 보고 조선인들은 일본 중심의 동양 건설을 인정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둘째는 1940년 6월에 일어난 독일에 의한 파리의 함락입니다. 프랑스 파리는 근대정신의 상징으로 남아있었습니다. 인류는 프랑스대혁명으로 획득한 자유평등박애의 이념을 바탕으로 ‘근대’라는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런 파리가 함락되었던 것이지요. 근대초극론자들은 여기에서 하나의 의미를 읽어냅니다. ‘파리’로 대표되는 근대는 이제 한계에 봉착하였다. 그러니 새로운 가치 체제로 가자, 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근대는 낡은 체제이고, 새로운 가치 체제는 ‘신체제’가 되는 것이지요.


  물론 신체제라고 했을 때 유럽은 나찌의 독일이 중심이 되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가운데 자리합니다. 하지만, 일본에서 내세우는 것은 서구의 근대를 극복하는 동양 이미지였습니다. ‘근대=유럽’, ‘근대초극=일본’이었으니까요. ‘대동아공영권’은 이런 논리 위에서 유포되었고, 그런 대결 구도를 통해 일제가 벌이는 전쟁은 성전(聖戰)으로 격상됩니다. 대표적인 이론가라면 최재서를 꼽을 수 있고, 작가로는 서정주채만식이 여기에 속합니다.


  첫 번째 유형과 두 번째 유형은 친일의 논리가 다릅니다. 그러니까 친일의 시기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즉 1938년 10월이 지나면서 친일을 시작하느냐, 1940년에 친일로 접어드느냐는 우연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가 그들의 친일 행위에서 자발성을 읽어내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 논리를 통해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었습니다. 친일을 독려하면서 벅찬 해방감을 토로할 수 있었던 근거도 여기서 이해해야 합니다.”   







일제에 저항한 문학(인) 연구가 필요하다


  사실, 백철의 「시대적 우연의 수리」(『조선일보』, 1938.12.2∼7)라든가 「이상주의의 신문학」(『동아일보』, 1939.1.15~21) 등은 나 또한 이미 읽은 바 있다. 그런데, 나는 이런 흐름과 논리를 파악하지 못했고, 김재용은 분석해 내었다. 아마 여기 ‘나’의 자리에 다른 사람의 이름을 집어넣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 차이는 어디서 발생하였을까. 생각해 보건대, 자료를 둘러싼 시대 환경을 얼마만큼 면밀하게 이해하고 있는가와 관련이 있을 성싶다. 『협력과 저항』의 여기저기에 삽입되어 있는 사진들은 이를 드러낸다. 그는 농담처럼 “책 내용은 볼 게 없지만, 사진만은 그래도 볼 만하지요. 사진 구하는데 애 좀 썼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그저 흘려 듣지 못하였던 까닭이다. 유인물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무한 삼진을 함락한 직후 조선총독부에서 찍어낸 유인물의 내용을 그는 이렇게 인용하고 있다. 읽고, 읽지 않고에 따라 당대의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 실감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가.


  「한구나 광동이 함락하여도 지나사변은 아직 끝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저 편도 저 편을 도와주는 외국도 일본 국민이 이쯤에서 마음을 놓고 전쟁에 활기를 잃고 마음을 늦추기를 속으로 기다렸다가 그 틈을 타서 덤비려고 하고 있다. ‘이기고 투구끈을 졸라맨다’는 말은 참으로 이런 때에 할 말이다. 어떤 점으로 보든지 지금 여기서 우리의 마음을 늦추어서 이때까지의 전승의 결과를 헛되이 하는 실패에 빠져서는 안 된다.」(『협력과 저항』, 83∼84쪽)


  김재용이 친일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문득 떠오른 궁금증이다. 사실 식민지 말기의 문학계는 그동안 암흑기로 폄하되었기 때문에 관심이 비교적 덜 가는 영역이었다. 실증적인 사실의 복원을 통해 단죄를 행하는 것도 의미는 있을 테지만, 문학적 논리를 재구성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거라는 선입견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흥미로운 문학사의 한 대목으로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먼저 개인적인 수준에서 연구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우리 문학사에서 공백으로 남아있는 부분을 채워 넣고자 연구의 방향을 잡아왔습니다. 박사 논문 대상을 카프로 설정한 까닭은 그 때문입니다. 우리 선배 세대에서는 카프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고 있었거든요. 다음에는 북한문학 연구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친일문학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지요.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다’는 입장이 수용되는 상황이었는데, 저는 여기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작품을 읽어보면 자발성이 분명하게 느껴지는데 내적인 논리가 없을 리 만무하거든요. 그런 입장을 수용하고 나니 친일은 그저 에피소드처럼 다루어지고 있었고요. 저는 친일문학이 우리 근대문학의 중간결산인 동시에 해방 이후 새로운 시작의 길을 여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친일문학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문학사를 조망하는 틀에서 말씀드리자면 포스트콜로니얼의 도입 풍토와 연관이 있습니다. 포스트콜로니얼 이론을 비판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을 겁니다. 첫 번째는 이론에 뛰어들어 문제점을 비판하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은 잘해 봐야 본전입니다. 그 틀 안에서만 논의가 진행될 테니까요. 두 번째는 식민주의와 문학의 관계를 복원하여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포스트콜로니얼과 직접 마주치지는 않지만, 그런 이론으로 결코 미치지 못하는 장면을 복원해 놓으면 비판의 한 방식이 되는 것이지요. 저는 두 번째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이런 입장으로 연구를 계속 이어나가다가 아까 말씀드린 새로운 패러다임, 그러니까 ‘굴종에서 협력으로’라는 다른 문제틀을 발견하면서 『협력과 저항』을 써 내려갔던 겁니다.


  저는 친일문학을 연구할 때, 일제에 저항했던 문학(인)을 의식적으로 많이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누구나 다 친일하지 않았는가’하는 소리가 수그러지지요. 보세요, 누가 민족의식으로 무장해서 저항하였나, 라고 물으면 이육사윤동주를 넘어서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월북작가가 많아서 그러했을 테지만, 이제 이 부분을 살려내어야 합니다. 저는 저항의 방식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서 파악합니다. 침묵과 우회적 글쓰기와 망명이지요.


  사실 저항의 방식으로 침묵을 선택했는가는 판단이 어렵습니다. 경제생활을 영위하느라 글을 안 썼는지, 저항의 성격으로 글을 안 썼는지 쉽게 드러나지 않으니까요. 저는 김기림을 이 쪽으로 묶는데, 근거는 이렇습니다. 침묵하기 바로 직전까지 그는 활발하게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니까 갑작스런 침묵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는 말이 되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발표한 「동양에 대한 단상」에 주목합니다. 『문장』 1941년 4월호에 실린 이 글에서 그는 근대에 대한 차분한 결산을 주장합니다. 1940년 이후 불어닥친 ‘대동아공영론’이라든가 ‘신체제’의 분위기를 경계했던 겁니다. 그러고 나서 침묵이에요.


  우회적 글쓰기의 대표주자는 한설야입니다. 「피」라는 작품을 보면, 표면적으로는 조선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의 로맨스이지만, 기실 작가정신은 내선통혼 비판에 가 닿아 있습니다. 당시 한설야의 「피」가 로맨스인가 내선통혼 비판인가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한설야는 그만큼 훌륭하게 우회적 글쓰기를 수행해 내었던 것입니다. 내선통혼 비판은 「그림자」에서도 이어집니다.


  망명길에 오른 문인으로는 김사량을 꼽을 수 있습니다. 염상섭요? 글쎄요, 염상섭은 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만주국과 조선의 차이에서 기인합니다. 조선에서는 ‘내선일체’가 이야기되었습니다만, 만주에서는 ‘오족협화(五族協和)’라는 표어가 나부끼었습니다. 형식적이기는 합니다만 일본인, 만주인, 조선인, 러시아인, 몽골인이 화목하게 지내자는 말은 각 민족의 차이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조선에서는 ‘나는 조선인이지만’이라는 말이 성립될 수 없었던 반면, 만주에서는 그러한 식의 어법이 가능했다는 것이지요. 그 차이 위에서 만주행을 선택한 염상섭의 판단을 살필 수 있을 터인데, 이는 섬세한 접근을 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포스트콜로니얼, 위험한 너무도 위험한…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적시하고 넘어가야 하겠다. 카프에서 북한문학, 친일문학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그는 소략하게 정리하였지만, 그가 내놓은 성과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예컨대 북한문학에 대한 그의 저서 『북한문학의 역사적 이해』(문학과지성사, 1994), 『분단구조와 북한문학』(소명출판, 2000)은 북한문학 연구의 디딤돌 역할을 한다. 자료조차 취합하기 힘든 상황에서 그는 나름의 방식으로 자료를 모아서 역사적인 안목을 바탕으로 흐름의 변천과 개별 작가의 특성을 포착해서 선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우스갯소리로 ‘이중 간첩’ 운운하기도 한다. 벌써 평양에만 네 번 다녀왔고, 중국의 여러 곳에서 북한 연구자들과의 만남을 이어왔다고 하니 그의 성실성이 놀라울 따름이다. 아마도 그의 자료 취합은 이러한 넓은 활동 반경과 이어져 있으리라.


  다음으로 포스트콜로니얼의 문제. 요새 유행하는 이론인데, 나 또한 이러한 논리는 상당히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과연 비서구 주변부 식민지의 저항을 서구 제국주의의 야만적 폭력과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해도 무방한 것일까. 다시 말해서, 식민지민의 저항이 표면적으로는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지만, 그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제국주의의 기초가 되었던 내셔널리즘과 동일한 것일까. ‘민족 담론’의 해체는 ‘동일하다’는 판단 위에서 속도감 있게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의 파시즘’ 논리가 결합해 있는 양상이기도 하다. 물론 근대 서양의 역사가 보여준 바는 그런 대립틀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길이 전혀 없으라는 법은 없다. ‘하나의 근대’가 아니라 ‘다양한 근대’를 내실 있게 이야기하려면 먼저 다른 길의 가능성부터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국민주의, 국제주의, 세계주의라는 김재용의 접근 태도이다. 인터뷰에서 진행시키지는 못했지만, 흥미 있는 내용이므로 잠깐 인용해 두기로 한다.


  「한국 근대문학을 그 정치적 사상적 지향 특히 국가간 관계에 대한 견해에 따라 나누어보면 국민주의, 국제주의 그리고 세계주의로 나누어볼 수 있다. 국민주의는 1920년대 국민문학론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국민국가를 역사의 종점으로 간주하고 그 속에서 모든 것을 사고하는 경향이다. 국제주의와 세계주의는 국민주의가 전제로 하는 국민국가 자체를 부정한다. 국민국가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한 자국에 대한 충성과 타국에 대한 배제로 인하여 지구상의 진정한 평화와 인류의 결합이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둘은 이를 넘어서는 방식에 있어서 상이한 태도를 보여준다. 국제주의는 국민국가는 부르주아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이는 반드시 넘어서야 하며 진정 인류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계급이라고 본다. 세계주의 역시 국민국가를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근대 자체에 대한 반성과 전복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협력과 저항』, 77∼78쪽.)


지식인의 친일에는 반드시 논리가 있다


  덧붙이자면, 김재용은 「피」를 쓴 한설야가 국제주의자이면서도 민족 문제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친일 파시즘으로 기울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어디 한설야 뿐이겠는가. 이육사의 조서를 보면 그는 ‘민족공산주의자’로 분류되어 있다. 이육사 또한 국제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민족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제3휴머니즘’을 주장하며 근대 비판에 나섰던 김동리는 분명한 세계주의자였다. 그렇지만, 그 또한 ‘화랑’을 정점으로 하여 민족문제에 관심을 가졌기에 친일을 거부할 수 있었다. 반면, 김동리의 평생 절친했던 벗 서정주는 그저 세계주의자에만 머무를 따름이었다. 그래서 그는 친일의 길로 쉽사리 접어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열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김재용이 제시하는 세 가지 틀을 유연하게 접합시키며 사고한다면 누군가가 그려나갔던 ‘다른 길’이 풍성해질 수 있다는 것. 이를 쉽게 포스트콜로니얼의 이론으로 묶을 수는 없으리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이후 작업에서 기대해 볼 수 있으리라 판단한다.


  김재용의 역사 의식 혹은 역사 감각을 보건대, 그저 친일문학 연구가 재미있어서 하는 것만은 아닐 터이다. 그렇다면 그는 친일문학 연구의 현재적 의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파병의 논리와 친일의 논리에 대한 나의 판단을 곁들여서 그에게 물었다.


  “듣고 보니 그럴 수 있는 이야기네요. 분명한 사실은 논리가 없는 행위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식인의 경우에는 더할 말이 없지요. 그 점이 무서운 겁니다. 국가주의자들은 국가가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지요. 국가가 나약한 상태에서의 삶을 생각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나’를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우리’(국가)를 이야기하고, 그 뒤에 숨어 버립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논리를 이어나가게 되지요.


  저는 친일만을 두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친일’이 아니라 ‘식민주의와 문화(문학)’가 논의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논의를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식민주의가 과연 끝났습니까. 이라크를 예로 들면, 이라크는 지금 식민주의 상태에 빠져들지 않기 위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식민지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식민주의의 나락에 빠지지 않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이지요. 식민지 없는 식민주의가 문제 아닙니까. 신식민지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친일문학을 둘러싼 논의는 과거에만 한정시킬 수 있는 것이 분명 아닙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이고, 지금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여지껏 ‘식민주의’와 정면에서 대면했던 적이 없습니다. 대결했던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식민주의를 대상화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적 청산만을 문제삼아서는 곤란합니다. 식민주의 자체를 문제삼고, 그와 관련된 제도 전반까지도 문제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범할 수 있는 오류들까지도 돌아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식민지 지식인들의 콤플렉스는 현재진행형


  언제나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은 동일한 법이다. ‘앞으로의 계획’ 혹은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 의례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 역시 이런 물음을 빼 놓지는 못한다. 마지막으로 연구 풍토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과 후학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바를 의례적으로 물었다. 이런 경우에도 우문현답이라고 하는 걸까. 김재용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색깔을 보여주었다.


    “식민지를 겪었어도 우리는 가장 악독하게 겪었습니다. 그런데 왜 자신들이 받은 상처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지 못하고 다른 나라의 이론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는 건가요? 왜 그 이론에다가 우리의 상처를 끼워 맞추려고 하는 걸까요? 서양의 동양 지배 방식과 동양의 동양 지배 방식은 다르지 않았습니까? 서구의 이론을 참고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것을 연구의 중심에 두어서는 곤란합니다. 저는 이것을 식민지 지식인들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치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불만은 인문학 전반에 대해 가지고 있습니다.


  후배 연구자들에게는 진취적 태도가 아쉽습니다. 선행 연구자가 하지 않은 영역을 개척해 나가고자 하는 시도를 좀처럼 볼 수 없으니까요. 과감하게 새로운 영역을 열고 나아가는 태도를 기대해 봅니다. 홍선생께서 활동하고 있는 『비평과전망』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존 연구에 대한 비판만 승한 것이 아닌가. 펼쳐진 문학판에 새로운 문학적 태도를 가지고 개입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을 겁니다. 첫째, 기존 연구 방식과 성과의 허점을 지적하는 방식. 둘째, 기존 연구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며 새로운 장을 펼쳐나가는 방식. 제가 『비평과전망』에 기대했던 것은 새로운 장을 스스로 만들면서 문학적 입장을 개진하는 것이었거든요. 그런데 기존의 연구틀 내에서 허점을 지적하는 방향으로 나가 버리더군요. 모쪼록 잘 되시길 빕니다.


  아마 이 정도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다면, 임종국의 『친일문학론』 바로 옆에 김재용의 『협력과 저항』을 연이어 놓아도 별다른 이의가 없으리라고 판단한다. 현재의 사회 분위기를 보건대 『협력과 저항』은 당분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없을 것이다. 7월 23일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떠올리면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든다. 친일진상규명특별법을 주도하고 있는 김희선 의원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이 그들 매체에 기사화 되어 실렸던 것이다. ‘독립군 친척 사칭 논란’. 독립군 김학규 장군의 아들이 나타나서 사실을 증명하여도 논란이 가라앉지 않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대체 우리 사회는 어떻게 생겨먹은 것일까. 그래도 누군가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만들며 나아가고 있어야 한다. 그 길에 『협력과 저항』이 놓여 있다. <피플 200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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