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서의 배경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졌다는 우리 민족사회가 20세기에 들어와서 이웃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받게 된 일도 기이한 일이지만, 해방된지 반백 년이 지나도록 반민족행위자를 전혀 청산하지 못한 일은 유례 없는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 사회의 뒤틀린 과거사는 해방 후 잘못 끼운 첫 단추에서 비롯된다. 세계 어느 나라나 식민지배에서 해방되면, 독립운동세력이 정권을 세우게 마련이지만, 우리의 경우 친일잔존세력이 남북분단과 미군정체제의 혼란기를 틈타서 정권의 지배세력 또는 하수인으로 그대로 안존했다. 해방 후 이승만 정권 당시 행정·경찰 관료 및 교육계와 군부의 상층부 등에는 일제협력분자들이 그대로 자리를 틀었고, 따라서 반민족행위자처벌특별법이 제정되어 친일파 청산노력이 있었으나 곧 좌절되고 말았다.
4·19혁명으로 장면정권이 들어섰으나 상층부의 다수가 일제협력자들이었으니 친일반민족세력 청산은 불가능했다.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소장은 일본군 장교 출신이어서 역시 반민족세력 청산은 있을 수 없었으며, 전두환·노태우 정권도 박정권의 아류로 그런 역사의식을 가질리 만무했다. 군사정권 30년 만에 문민 김영삼 정권이 들어섰으나 군부독재세력과의 타협, 즉 합당으로 성립된 정권이어서 친일파청산을 위한 역사의식이나 정치적 결단을 기대할 수 없기는 또한 마찬가지였다. 김대중 정권 역시 5·16 군사쿠데타의 주역 김종필과의 연합으로 발목이 잡힌 바람에 설령 역사의식을 가졌다 해도 반민족친일세력의 청산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친일파청산 없이, 어떻게 민족의 미래를 말할 수 있겠는가? 실로, 반만년 역사의 한민족이라고 스스로 밝히기가 부끄럽기 짝이 없다.
노무현 정권이 해방 후 처음으로 본격 추진하는 친일파 진상규명작업은 이 같은 역사적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주로 보수적인 기득권 세력의 조직적 저항과 반발을 사고 있다. 하지만, 소위 ‘보수’라고 자칭하는 이 세력은 분명히 알아둬야 할 게 있다. 그 것은 진정한 보수는 ‘부끄러운 과거’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영광’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한 평생을 프랑스 대혁명과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 연구에 매달려온 원로 언론인 주섭일 씨(67.’사회와 연대’ 출판사 회장)는 이번에 펴낸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 청산: 드골의 과거사 정리방식과 친일파 청산>에서 “진정한 보수는 영광스러운 역사를 지켜내기 위해 살신성인할 수 있어야 한다”며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은 좌파가 아니라 드골이 선두에서 총지휘한 프랑스 보수우익이 시작한 만큼, 우리의 보수세력들도 그 이름에 걸맞게 친일 청산문제에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용 및 목차
언론인 주섭일 씨가 이번에 출간한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은 4년전 그가 나치협력자 숙청 문제를 다룬 ‘프랑스의 대숙청’이라는 책을 개정 보완한 개정서이지만, 내용과 시각은 전혀 새롭고 진일보적이다. 그는 최근 국내 친일과거사의 청산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 국내 상황과 때를 같이해 드골의 나치 협력자 숙청에 대한 프랑스사료와 유럽과 미국학계의 평가를 대폭 보충했으며, 특히 나치점령 시절 프랑스 언론의 변절과 그 후 이들 과오의 청산문제들을 비중있게 다뤄 국내 언론의 친일 문제를 되짚어 보게 했다. 광복회 친일파 명단 심사위원을 역임하기도 한 그는 이번에 그의 저서에서 ‘숙청’이라는 과격한 표현 대신, ‘청산’이란 표현을 사용해 과거사 정리가 단순히 문제인사들을 도려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과거를 정리함으로써 희망찬 미래로 향하는 길이라고 밝히고 있다.
“누가 감히 용서를 말할 수 있겠는가. 칼은 칼에 의해서만 이길 수 있고, 무기를 잡아야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드디어 알게 됐다. 감히 누가 이 진리를 망각하라고 요구할 수 있겠는가. 내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중오가 아니라, 기억을 기초로 하는 정의다.”
파리 해방직후 나치협력자 숙청문제를 가장 먼저 제기한 사람은 ‘이방인’과 ‘페스트’ 등의 명작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알베르트 카뮈다. 파리가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된 감격과 흥분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는 저항신문 ‘콩바’지의 사설을 통해 나치협력자 대숙청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역설했다. 카뮈는 드골에게 나치협력자에 대한 대숙청을 사설을 통해 재촉한 것이다. 이는 적지않은 나치협력언론인들이 해방전 저항단체와 저항운동가 그리고 드골의 자유프랑스를 테러집단이나 범인으로 매도하고 영·미 연합군과 망명정부 자유프랑스를 패배시켜야 한다고 부르짓으며 나치독일의 승리를 기원했던 까닭이다.
카뮈는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민족반역 언론의 책임을 준엄하게 묻고 진정한 민주언론의 복귀와 회복을 요구했다.
그후 그의 격정적인 논설은 세계에 메아리쳐 국내에서조차 암울한 시대의 지식인 변절을 비판할때마다 인용되곤 했다. 그러나 그 것은 지식인의 현란한 수사법에 장식되는 조각난 인용어일뿐 이었다.
지은이 주섭일 씨는 “21세기로 넘어갔어도 우리가 친일협력자 청산을 못한 것은 1945년8월15일 이후 한국의 해방정국이 프랑스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의 저서는 프랑스의 나치협력이 왜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밝히는 국내 최초의 시도다. 1972년부터 96년까지 중앙일보와 세계일보의 파리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당시까지 진행돼온 프랑스의 반역자 청산과정을 직접 취재 보도해 온 주섭일 씨는 두 나라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한국판 나치 협력자라고 할 수 있는 친일파에게 완전히 면죄부를 줌으로써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과 정반대의 길을 걸어갔다. 드골은 나치 독일에 협력한 민족배반자들을 ‘외세와 내통한 이적 죄’와 ‘간첩죄’를 적용해 대담하고도 대단히 가혹하게 심판하고 처벌했다. 그리고 반 나치레지스탕스에 참여한 좌우파 정치인과 애국적 시민들만으로 새로운 주체세력을 형성해 2차 세계대전 후 민주적인 프랑스 국가를 건설했다. 드골은 레지스탕스의 주체세력에 이념문제를 크게 우려하지 않았고, 좌파든 우파든 레지스탕스에 참여한 세력을 총체적으로 통합함으로써 나치협력자들의 재등장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반대로 해방후 새로운 한국 건설이라는 미명아래 주체세력의 주류로 친일파를 재등용했다. 친일파는 이승만의 절대권력의 그늘에서 항일 독립운동 세력을 조직적으로 재거했고, 탄압도 불사했다. (…)…”
이처럼 굴욕과 잘못된 역사를 어떻게 반성하고 청산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은 달라진다. 우선, 지은이는 프랑스 드골 대통령이 진행한 과거사 정리방식을 사례별로 조망했다. 드골은 1943년부터 수년 간 조직적 반발과 저항에도 불구하고 비시 정권의 내무장관 피에르 퓌쉬의 처형에서부터 천재작가 ‘로베르 브라지야크’ 숙청에 이르기까지 나치 정권에 협력한 정계, 재계, 언론계, 사법계, 방송계의 개혁을 단행했다. 우선 놀라운 것은 숙청의 규모다.
저자에 따르면 나치협력으로 숙청된 인원은 정확한 통계로 나온 것이 없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조사할때마다 늘고 있다. 책에 따르면 나치 협력자숙청으로 죽은 사람은 1만에서 10만명, 드골이 회고록에 기록한 사망자는 전쟁과정에서 사망한 6675명을 포함해 1만842명이다. 그러나 나치협력 전과로 공직을 박탈당한 ‘공직자 복귀를 위한 프랑스 연맹’이 유엔에 보낸 각서에 따르면 즉결심판을 받아 처형된 사망자수만 11만2000명에 달한다. 또 프랑스의 권위있는 연감 ‘퀴드'(2003년판)에 따르면 나치 협력자 대숙청에 관련된 프랑스인은 150만∼200만 명으로, 체포돼 감금된 나치 협력자수만 99만 명에 달한다. 1944년 프랑스의 식민지령인 북아프리카지역 알제리에서 비시정권의 내무장관 퓌쉬의 처형을 시작으로 출발한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대숙청은 언론인, 문인과 군장교, 그리고 경찰관에게 특히 가혹했는데, 지은이는 책에서 파리해방 뒤 첫 심판대에 오른 언론인들의 숙청에 관심을 집중한다. “언론인은 도덕의 상징이기 때문”이라는 드골의 회고가 아니더라도, 사회적 파급 영향력이 큰 언론인의 반역행위야 말로, 한 개인의 그 것에 비할 바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오늘’신문의 사장이었던 쉬아레스, 브라지야크(‘내가 도처에 있다’신문의 편집국장), 장 뤼세르(‘신시대’신문 사장), 장 파키(‘라디오 파리’ 방송사 사장), 페르도네(방송인)등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드골의 단죄는 언론인 개인에 그치지 않아 900여종의 신문잡지 중, 나치협력 전과가 있다고 인정되는 694개사가 폐간되거나 재산을 전부 또는 일부 몰수당했다. 당시, 주목할만한 사실은 현재 프랑스의 보수 우익을 대변하는 르휘가로지가 나치점령시절 사장이 애국적 행동으로 레지스탕스에 가담했으며, 이로인해 파리 해방후 똑 같은 제호로 파리에서 복간된 신문이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 같은 가혹한 숙청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 혹은 관용론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 같은 역사적 결단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프랑스의 민족적 영광과 자긍심, 국민적 통합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는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이 아직 미완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프랑스가 바르비, 투비에, 파퐁을 계속 재판하는 것은 나치와 파시즘의 재등장을 막아 민주주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자, 그러면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반백 년이 넘도록 친일협력자들을 청산하지 못한탓에 일본 군국주의의 전범들이 면죄부를 받아 2차 세계 대전 후에도 여전히 지배세력을 형성해 일본 총리가 신사참배를 자행하고 있지 않은가.
-성일권 파리8대학 정치학 박사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