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특별법 발효 한달넘게 위원회 구성도 안돼 정부 ‘과거사 기본법’ 논의 겹쳐 “차일피일” “피해자 날마다 죽어가는데” 비판 목소리 해방 60년을 앞두고 우리 정부가 처음으로 벌이는 일제하 강제동원피해 진상조사가 시작부터 주춤거리고 있다.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 특별법’이 지난달 6일 발효되고 닷새 뒤 시행령이 공포됐지만, 한달이 지난 11일 현재 실무기구인 진상규명위원회조차 구성되지 않아 피해 신고를 위한 절차도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특별법 시행령에는 시행일부터 60일 안에 진상조사 신청과 피해 신고에 관해 공고를 하고, 공고 뒤 1년6개월 동안을 신고기간으로 정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3월 특별법이 공포된 지 7개월이 지나도록 정부가 진상규명위 위원 인선작업도 마무리하지 못하고 있어, 사무국을 갖추고 진상규명위가 활동을 시작하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피해 신고 기간이 짧아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 단체들로 구성된 강제동원진상규명시민연대 쪽은 “피해자들이 나서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고 역사적 진실을 알리는 데 노력한 결과 특별법이 만들어졌지만 정부의 무성의로 진상 조사를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며 “피해자들이 한 명이라도 더 생존해 있을 때 증언을 들을 수 있도록 정부는 하루빨리 위원회 구성을 마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열린우리당이 국회에 발의할 예정인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한 기본법’도 진상규명위가 구성되는 데 발목을 잡고 있다. 일부에서는 통합 진상규명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면 새 법에 따라 활동을 시작하는 게 낫다는 의견도 흘러나오고 있다.
박은희 강제동원진상규명시민연대 간사는 “정부가 위원 인선 작업의 어려움 등을 이유로 위원회 구성을 미루고 있다”며 “생존자가 날마다 줄어드는 상황에서 아직 발의조차 되지 않은 통합 진상규명법이 통과되도록 기다릴 여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위원회 구성 실무를 맡고 있는 청와대 관계자는 “통합 진상규명법 추진 일정과 상관없이 이미 발효된 특별법에 따라 위원회가 구성될 것”이라며 “현재 추천받은 위원들의 검증작업을 진행 중인데 늦어도 이달 안에는 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특별법은 지난 9월부터 3년 동안 효력이 있는 한시법이며, 진상규명위는 1930년대부터 1945년까지 전쟁에 강제징용된 한국인들의 피해상황을 조사하고 유골 수습 등 사후 처리를 맡는다.
“발효된 특별법 시행도 못하고 여, 통합 과거사법 추진 무책임” ■ 진상규명시민연대 김광열 공동대표 김광열(46·사진·광운대 교수·일본학) 강제동원진상규명시민연대 공동대표는 “정부가 과거사 청산에 의지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말문을 열었다.
“8·15 이후 과거사 문제는 해방 이전의 과거사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것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과거사 청산은 일제 피해 진상조사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친일 문제가 국내에서 일제 청산이라면, 강제동원 문제는 일본을 상대로 한 과거사 청산입니다. 그런데 정부의 무관심으로 과거사 규명이 시작부터 주춤거리고 있습니다.” 김 교수는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 특별법이 공포된 지 7개월이 지나도록 위원회와 사무국조차 꾸리지 못한 데 대해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김 교수는 이른바 ‘과거사 기본법’에 관해서는 “이미 발효된 특별법도 제때 시행하지 못하는 정부와 여당이 다시 성급하게 과거사 통합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아직 발의도 되지 않은 통합법 때문에 날마다 생존 피해자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강제동원 피해 조사를 미루는 것은 역사 앞에 무책임한 태도”라며 “하루빨리 진상 조사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재 강제동원 특별법은 외교 문서 등 관련 정보에 대한 접근 권한과 진상 조사 권한이 약해 진상 규명에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지적하고, “통합법에 독립적인 강제동원 진상규명위원회를 두고 조사 권한이 강화된다면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겨레신문, 2004.10.11)
대구/박주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