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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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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죄업

홍중조(논설주간)










한 평생을 올바른 길로만 걸어온 사람은 매우 드물다. 더욱이 줏대를 가지고 일관되게 산다는 것은 그 더욱 어렵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변심하지 않고 일관되게 지켜온 지조와 절의에 대해서는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뭇사람에게 그토록 존경받던 이도 하루아침에 카멜레온적 변신술로 조국을 팔고 일신의 영화만 좇는 부류들을 숱하게 보아왔다. 변절과 친일을 일삼던 인사들 중에 대대로 떵떵거리고 사는 이도 많지만 그 반대로 고통 속에 살아온 이도 더러 눈에 띈다. 친일한 아비의 변절로 그 죄업을 천형으로 여기고 고통 속에 살아온 이가 있다.

그것도 그 흔한 참회문이나 반성문 하나 없이 인고의 나날로 보낸 이가 바로 우장춘(禹長春 : 1898 ~1959)박사다. 그의 아버지 우범선(禹範善 : 1857~1903)은 대표적 친일파였고 매국노이기도 했다. 구한말 우범선은 조선군 훈련대의 제2대대장이었고 계급은 참령이었다. 그 때 미우라 일본공사의 조종에 의해 동원된 50여명의 낭인 속에 우범선은 바로 행동대장 격이었다. 그들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잔혹한 범죄를 저지름으로써 이 나라 역사에 천추의 한을 남기고 말았다. 들끓는 민심으로 신변위협을 느낀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우레시(吳市)에 정착했다. 15세 연하인 일본여성과 결혼해 맏아들 우장춘을 낳았다.

1903년 11월, 명성황후의 심복인 고영근에게 우범선은 47세 나이에 암살되는 비참한 말로를 맞고 만다.

우장춘 인재양성하며 속죄

그토록 조국을 배반하고 친일에 앞장선 우범선은 동경농대를 졸업한 농학박사요 육종학의 세계 권위자인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라는데 너무나 기이한 운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1950년 3월, 우 박사는 아버지 나라에 혈혈단신으로 들어왔다.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2남 4녀의 자녀를 남긴 채 귀국한 것이다. 부산동래서 이 나라 농업기초를 살리려고 원예고에 몸담아 인재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반역죄인으로 몰려 암살 당한 아비를 대신해 식물학자로서의 우 박사는 모든 능력을 다바치겠다는 자세로 진력해왔다. 이는 바로 민족 양심에 속죄하는 길이었고 역사 앞에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충정의 발로이기도 했으리라. 더욱이 부산에 머무는 동안 일본에 있는 부인과 자녀를 단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말없이 실천한 속죄의 깊이를 능히 읽고도 남음이 있다.

격은 떨어지지만 이 지역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다. 초대 마산 민선 시장을 지낸 김종신(金種信 : 1904 ~ 1978)은 어느 누구보다도 친일에 앞장선 인물로 꼽고 있다. 뭐니뭐니해도 일제 때 마산경방단장을 지냈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하기만 하다. 특히 앳된 처녀들을 성호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대 일본 제국을 위해 정신대에 나가라고 선동하는 등 민족양심에 대못을 박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김종신 장남도 인고의 세월

그 역시 애당초는 사회주의 운동에 몰입한 이상주의자였다. 시류 따라 바람결에 흔들리듯이 감투쓰기를 아주 좋아했음은 물론 점잖은 모습으로 유지행세를 곧잘 해왔다. 민선시장을 거쳐 국회의원을 지냈는가하면 언론계에 몸을 담기도 했다. 항상 일신의 영화만 좇는 그야말로 기회주의적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참으로 안타깝기만하다. 이런 아버지를 둔 그의 장남은 어떠했는가. 아비의 죄업을 짊어진 맏아들 재호의 얼굴은 늘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풀리지 않는 앙금을 가슴 한켠에 간직해 있는 듯 보였다.

‘친일의 아들’이라는 비아냥이 끊이지 않은데다 전화상으로 “니 애비 때문에 여동생이 죽었다” “친일한 니 애비를 생각하면 그 어찌 멀쩡하게 살수 있느냐?”하고 갖은 악담을 들을라치면 마산이 역겨워지기만 했다. 아버지를 여읜 후 뜻한바 있어 북제주군 추자도에 정착하려고 마음먹게 되었다. 오래도록 소장한 책 1만여 권으로 도서실을 만들어놓고 섬 주민들과 어울렸고 낚시질로 마음의 평정을 얻기 위해 무척 애썼다고 한다. 정든 집을 10년 가까이 제대로 찾지 않았던 그도 올 초에 71세로 한 많은 이 세상을 쓸쓸히 떠났으니 기구한 운명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무엇보다도 아비의 친일행적을 속죄하기 위한 두 아들의 역사적 평가는 어떻게 나올지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
기사게재일자 : 200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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