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인기가수 백년설(1914∼1980·본명 이창민)의 친일행적을 둘러싼 경북 성주군민들의 논쟁이 법정공방으로까지 비화됐다. 성주 출신인 백년설은 ‘나그네 설움’ ‘번지없는 주막’ ‘마도로스 박’ 등 히트곡을 남긴 1940년대 초반의 대표적 대중가수다. 정치권이 시작한 과거사 진상규명작업으로 전국 각지에서 가열되고 있는 ‘내고장 출신자 친일행적 재조명’ 움직임이 주민들의 감정싸움으로 번진 것이다.
성주군은 지난해 5월 ‘백년설 가요제’를 신설했다. 성주가 낳은 유명가수의 이름을 따 지역축제로 육성하려고 행정적,재정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성주농민회 등 일부 주민이 백년설의 친일행적을 문제삼아 반발했고,위안부 출신 할머니들까지 찾아가 항의하자 올해부터 ‘성주가요제’로 이름을 바꿨다. 백년설은 일제시대 ‘아들의 혈서’ ‘위문편지’ ‘이 몸이 죽고 죽어’ ‘혈서지원’ 등 태평양 전쟁 참가를 독려한 친일가요를 불렀다는 게 농민회측의 주장이다.
문제는 지난 6월말 성주군의회 전모(73) 의원이 “백년설 가요제 부활을 위한 공청회를 열고,고인과 유족의 명예를 훼손한 농민회를 상대로 거액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겠다”며 지역신문에 광고를 내면서 시작됐다. 백년설 가요제 저지 대책위원장을 지낸 농민회 여모(45)씨는 즉각 성주군 홈페이지에 전 의원 앞으로 공개서한을 띄워 “백년설이 친일파란 증거가 속속 나오고 있다. 전 의원은 벌써 치매에 걸렸나,아니면 같은 친일파인가”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농민회는 또 군청 경찰서 보건소 주변에 ‘전 의원은 망언을 즉각 철회하라’ ‘군민앞에 사죄하라’ 등 현수막을 내걸고 비난유인물을 배포하며 백년설 가요제 부활 반대운동에 나섰다.
이에 전 의원은 지난 7월 명예훼손 혐의로 여씨 등 농민회원 4명을 성주경찰서에 고소하고,대구지방법원에 1인당 2000만∼3000만원씩 모두 1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여씨는 검찰에서 혐의가 인정돼 약식재판으로 100만원의 벌금이 부과되자 정식재판을 요청,지난 3일 선고유예판결을 받았다. 여씨측 변호인은 “혐의는 인정됐지만 공익차원의 행위란 점이 참작돼 이례적으로 선고가 유예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여씨에 대한 3000만원 민사소송은 재판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전 의원은 “백년설은 성주가 배출한 유명인물인 만큼 지역발전을 위해 기념해야 한다”며 “농민회가 가요제 부활에 찬성하면 소송을 취하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씨는 “일제시대 백년설 노래를 듣고 전쟁터로 나간 사람들이 있는데 추모 가요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 “민사소송은 가요제 반대파를 압박하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친일문제 연구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시대 유명인사의 기념관,동상,이름을 딴 상(賞) 등을 둘러싸고 분쟁이 발생한 지역이 전국적으로 90여곳이나 된다고 밝혔다. 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은 “가곡 ‘선구자’ 작곡가 조두남의 고향인 경남 마산,운보 김기창 화백 출생지인 충북 청원,유치환 시인이 태어난 경남 통영 등지에서 비슷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04.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