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행자위는 9일 전체회의를 열고 시민연대가 기초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특별법 개정안을 크게 수정한 여야의 절충안을 표결처리로 통과시켜 법사위로 회부했다.
수정안은 위원전원에 대한 국회추천을 포기하고 시민연대안에서 동행명령권․실지조사권을 제한적으로나마 수용하는 등 일부 진전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16대 국회에서 제정된 구법에 비해 미미하게 개선된 측면이 있다고는 하나 독소 조항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시민사회의 조사권 강화 요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도로 누더기 법’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으로 평가된다.
열린우리당은 수구언론의 전방위적 여론 호도와 한나라당의 대안 없는 막무가내식 버티기에 굴복하여 입법 취지를 크게 훼손하는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먼저 법안의 핵심이라 할 반민족행위자 선정 부분을 삭제한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정의 조항의 반민족행위자를 반민족행위로 위원회의 업무 조항에서 반민족행위자 선정을 반민족행위 결정으로 바꿈으로써, 해방된 지 60여년 만에 만들어지는 진상규명법이 명예형에 해당하는 최소한의 징벌적 조치마저 배제되고 허울만 남은 법으로 또 다시 전락하게 되었다. 행위가 앞서고 책임을 져야 할 주체는 뒤로 숨는 기형적인 법이 되고 만 것이다. 국가가 반민족행위자를 선정하여 반민족적 반인도적 범죄에는 그 시효가 없음을 명명백백하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대다수 국민의 여망은 무시되고, 이제 위원회가 공포하는 보고서를 샅샅이 훓어 보아야만 누가 어떤 짓을 하였는지 알 수 있게 될 형편이다.
또 지위범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조사대상자의 반민족행위 혐의를 입증해야 할 엄청난 부담을 위원회가 떠안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직위의 고하와 직무의 반민족성에 관계없이 증거주의 논란이 일게 될 것이 자명해 보인다.
친일반민족행위의 정의에도 문제점이 다수 발견된다. 한나라당은 필요에 따라 삭제하고 추가하는 원칙 없는 태도로 일관하였다.
반민족행위 규정 비교표(수정 부분)
시민연대 개정안 |
행자위 수정안 |
독립운동 또는 항일운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에서 적극 활동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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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그 단체의 의사결정을 중
심적으로 수행하거나 그 활동을 주도한 행위
(항일운동 제외, 간부 이상으로 제한) |
일제강점기에 고등문관 이상의 관리로 재직
한 자와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행위가 현저한 일반관리 |
일제강점기에 고등문관 이상의 관리로 재직 한 자 (일반관리 삭제)
|
일제강점기에 군대 또는 경찰에서 소위 또는 경시 이상의 고등관으로 재직한 자와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행위가 현저한 일반 군경 |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헌병 또는 경찰로서 주로 무고한 우리 민족 구성윈의 감금 고문 학대 등 탄압에 앞장 선 행위 (일반 군 삭제) |
각종 지방행정기관의 장과 도 부 읍 면의 의원으로서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행위가 현저한 자 |
(전문 삭제)
|
학병 지원병 징병 징용 또는 공출을 선전 선동하거나 강요한 자 중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행위가 현저한 자 |
학병 지원병 징병 또는 징용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 선동하거나 강요한 행위
(전국적 차원 삽입, 공출삭제) |
문화 예술 언론 교육 학술 종교 등 사회 각 부문에서 황민화운동을 비롯한 일제의 식민통치정책과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자 |
사회 문화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
경제침탈을 위하여 일본제국주의가 만든 각종 경제기관과 단체에 재직한 자 중 침탈행위에 적극 협력한 자 |
동양척식회사 또는 식산은행 등의 중앙 및 지방조직 간부로서 우리민족의 재산을 수탈하기 위한 의사결정을 중심적으로 수행하거나 그 집행을 주도한 행위 (간부로 제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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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주의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신설) |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지배와 침략전쟁에 협력하여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자 |
(전문 삭제) |
해외에서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하여 위 각목의 어느 하나에 상당한 자 |
(전문 삭제) |
한나라당은 16대 국회에서 친일진상규명법과 관련하여 전국민적 지탄을 받은 엊그제의 교훈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법안을 무력화하기에 급급하였다. 수정된 반민족행위 규정을 보면조사대상을 확대시켰다는 언론의 일반적인 평과 달리 교묘하게 단서를 붙여 대상을 축소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간부로 제한한다든지 전국적 차원으로 국한한다든지 행위를 특정하는 등 구법에서 동원했던 수법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지방의 부역행위에 대해서는 사실상 면죄부를 부여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문화․예술․언론․교육․학술․종교 등 당시 사회적 영향력이 컸던 ‘사회지도층’에 대해서는 보다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전문연구자들의 견해와 국민여론을 무시하고 모호한 표현을 채택함으로써 벌써부터 논란이 되고 있는 점도 쉽사리 간과해서는 아니 될 문제이다.
또 반인도적 범죄를 제외하여 연합군 포로나 점령지역 주민들을 고문 학대 살상한 전범들이 빠져나갈 여지를 준 점도 최근의 국제법 추세에 역행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해외에서 저질러진 반민족행위를 삭제한 것은 더욱 큰 문제이다. 이렇게 되면 예컨대 일본이나 괴뢰 만주국, 기타 점령지 또는 제 삼국에서 행해진 허다한 부역행위를 어떻게 처리할지 의문스럽다.
도대체 어떤 합당한 이유가 있어 이렇게도 과감하고 무식하게 손질을 하였는지 자못 궁금할 뿐이다.
다음으로 법상식에 어긋나는 조문을 거론하고 싶다. 그간 관련 학계와 언론, 시민사회단체들에 의해 누누이 지적된 바와 같이 위헌적 요소는 법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치명적 사안이다.
행자위의 수정안 제5조 제3항은 ‘(위원으로) 추천․지명을 받고자 하는 자는 본인의 부모 및 조부모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의 기간중 친일반민족 행위를 하지 아니하였음을 소명하여야 한다.’ 고 하여 연좌제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조항이다. 여당의 강력한 문제제기로 친공반민족행위 부분이 삭제되긴 하였으나 한나라당이 이 조항을 극구 유지하려는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 이 조항에 해당하는 자가 추천될리도 없겠지만 혹여 위원 후보가 된다 하더라도 언론 보도와 국회 동의과정에서 충분히 검증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조항이 헌재 만능 시대에 법의 안정성을 해치는 빌미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제23조 조사대상자의 보호 조항도 위헌 소지가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①누구든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의 기간중 행정기관 군대 사법부․조직 단체 등의 특정한 직위에 재직한 사실만으로 그 재직자가 이 법에 의한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것으로 신문․잡지․방송(인터넷 신문 및 방송을 포함한다) 그 밖의 출판물에 의하여 공개하여서는 아니된다. 다만,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②누구든지 제24조제1항의 규정에 의한 보고 및 제25조의 규정에 의한 사료편찬 전에 신문․잡지․방송(인터넷 신문 및 방송을 포함한다) 그 밖의 출판물을 통하여 조사대상자 및 그의 친일반민족행위와 관련한 위원회의 조사내용을 공개하여서는 아니된다.
공공의 이익이란 애매한 예외 규정이 추가되긴 하였으나 기본적으로 언론․출판․학문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매우 큰 조항이다. 명예훼손 등 현행법에서도 충분히 제재할 수 있는 사안을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이라는 어마어마한 처벌 규정을 두면서까지 얻으려는 목적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위원회로 하여금 조사를 독점하게 함으로써 언론의 추적 보도나 민간연구단체의 조사활동을 위축시키려는 저의가 깔려 있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은 친일파가 생사람을 잡는 형국이 벌어지지 않을까 자못 염려스럽다.
위와 같은 장치를 마련함으로써 언뜻 보기에 한나라당이 조사행위에 대한 위원회의 배타적 권한을 보장하려 노력한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수정안의 곳곳에는 어떻게 하면 위원회의 조사권을 억제하고 조사대상자의 안녕을 담보할 수 있을까 고민한 흔적이 역력함을 쉽게 알 수 있다.
시민연대안과 비교해볼 때 조사기간은 최장 6년에서 4년 반으로, 상임위원은 3인에서 2인으로 축소하였으며 전문가로 구성되는 심사위원회 조항은 아예 삭제하였다. 학계의 일제강점기 전문연구자들로 구성되는 심사위원회의 심의과정 없이, 비전문가가 다수 포함되고 상임이 2인밖에 되지 않는 위원회가 무슨 수로 업무를 처리해 나갈지도 우려스럽다.
동행명령 불복시 처벌을 과태료로 낮춘 것도 사실상 모든 기관 단체 개인에게 진상규명에 협조하지 말라고 공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강제력이 없는 조사기구에 진상규명을 바라는 일이 불가능함은 이미 다른 특위의 선례에서 여실히 증명되었다고 본다. 진상조사와 피해조사 신청을 없애고 단지 제보만을 허용한 것도 적극적인 진상규명 의지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한편 반민족행위 혐의자의 권익 보호에는 온갖 장치를 마련하였다. 조사대상자의 사생활과 명예보호를 명시하고 이의신청을 강화하였다. 또 위원 기피신청을 도입하였으며 독립운동 지원사실을 병행 조사하도록 의무화하였다. 더구나 통지의무와 진술기회 부여를 조사대상자, 그 배우자와 직계 존비속 외에 이해관계인이라는 불특정 다수에 확대함으로써 향후 갖가지 명분으로 위원회의 조사를 지연․방해할 개연성을 크게 열어 놓았다.
처벌 조항에서도 한나라당은 극도의 균형 감각 상실을 보여준다. 실지조사 거부자 동행명령 불응자 업무수행 또는 진술 방해자 정보제공자에 불이익을 준 자에 대한 처벌은 과태료 1,000만원으로 대폭 낮춘 반면, 허위 진술자․허위자료 제출자 명예훼손자에게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비밀준수 불이행자․자격사칭자 등에게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있어 크게 형평성을 잃고 있다. 즉 혐의자는 과도히 보호하고 있는 반면 정보제공자나 조사관들은 심리적 압박을 피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고 분석된다.
친일진상규명법과 관련하여 한나라당의 목표는 다음과 정리할 수 있다. 가능하면 법 개정을 저지한다. 그것이 불가능하면 첫째, 물타기를 한다. 둘째 위원회의 권한을 약화시킨다. 셋째, 조사대상자에 대한 보호장치를 극대화한다. 넷째, 언론과 시민단체나 학계에 재갈을 물린다. 한나라당은 이 같은 목표를 이미 상당 수준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법사위에서 문제점이 시정되지 않고 행자위의 안대로 개정된다면 역사정의의 실현과 사회적 가치 기준의 확립이라는 특별법 제정의 본래 목적은 실종되고 말 것임이 분명하다.
국민적 지지로 인해 60여 년 만에 비로소 가시화된 역사청산의 호기를 이런 식으로 저버린다면 정치권은 여야를 불문하고 다시 한번 국민여론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