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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60주년, ”한국판 드골”은 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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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오마이뉴스 기자]과거사청산 관련 특별법 제정을 놓고 국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오마이뉴스>는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사례와 피해자들의 증언을 묶어 총 4차례에 걸쳐 관련 기고를 싣습니다. 이 글은 두번째로 주섭일 내일신문 상임고문이 보내왔습니다…. 편집자 주














▲ 전후 프랑스의 나치 청산을 주도한 샤를 드골 전 프랑스 대통령
드골은 군부출신의 우파정치인이었다. 그가 강경우파가 중심이 된 나치협력자를 인적·법적으로 청산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을 패배시킨 전쟁영웅이며 군의 대선배인 페탱원수와 나치독일과 패전에 대한 견해를 달리한 것이 원인이었다.

나치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해 북부를 점령하자 국방차관 드골은 영국의 런던에 망명정부 ‘자유 프랑스’를 세우고 미영연합국과 동맹해 항전했다. 그 때 국방담당 부총리였던 페탱은 독일의 승리에 승복해 휴전협정을 맺고 나치독일과 동맹해 히틀러의 비위를 맞추며 조국을 지키려 했다.

그래서 드골은 항전파의 총수가 되었고 페탱은 투항파의 두목이 되었다. 드골은 ‘자유 프랑스’를 통해 민주주의라는 전통성을 지켰으나 페텡은 중부 소도시인 비시에 정부를 세워 민주주의폐지와 나치즘을 모방한 독재수립으로 히틀러의 괴뢰로 전락했다. 유태인과
저항운동(레지스탕스)을 탄압하고 드골을 테러분자로 매도하는 등 나치에 추종했다.

1944년 8월 26일 파리가 해방되자 드골과 페탱의 운명은 정반대로 갈렸다. 드골은 파리의 샹제리제 대로에 입성, 1백만 시민들과 승리행진을 벌렸다. 그는 ‘자유 프랑스’를 프랑스임시정부로 전환시켜 대통령에 추대되었다. 페탱은 독일로 피난을 갔으나 패전이 확실해지자 귀국길에 올라 국경에서 민족반역혐의로 체포되고 말았다.

드골은 반나치라면 이념을 묻지 않았다

드골은 임시정부를 거국내각으로 출범시켰다. 반나치 레지스탕스의 이념을 묻지 않고 민족주의자든 우파든 좌파든 입각시켰다. 오직 나치독일과 비시정권에 협력한 자들을 나치협력자로 규정해 배제했다. 그리고 이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루스벨트와 영국의 처칠은 비시정권을 공식 승인했기 때문에 드골의 나치협력자 숙청을 말렸지만 드골의 숙청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혁명 이래 겪은 최악의 숙청이 드골임시정부의 이름으로 실시되었다. 드골의 숙청은 프랑스의 운명을 민주적 선진국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드골은 망명시절에 페탱의 비시정권을 ‘불법무효이며 나치독일에 협력한 범죄집단’으로 규정했다. 이 때문에 어렵지 않게 나치협력자를 숙청할 수 있었다. 드골은 나치협력자를 심판하기 위해 최고재판소, 각지역 숙청재판소, 그리고 시민법정을 설치했다.

최고재판소는 페탱과 라발총리 등 비시정권 최고지도부를 심판하며, 숙청재판소는 각지역의 공직자·언론인·지식인·작가·예술인·학자 등의 재판을 담당했고, 시민법정은 경범에 해당되거나 최고재판소와 숙청재판소에서 처벌을 모면한 나치협력자들을 처리했다.

숙청재판소가 형법상 이적죄와 간첩죄를 적용했기 때문에 거의 모든 나치협력자들이 사형·무기·장기강제노동형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드골 자신이 ‘전쟁회고록’에서 “1만842명이 희생되었다”고 기록할 정도로 가혹한 숙청을 기록했다. 드골의 숙청은 특히 언론인을 포함한 지식인과 페탱 등 비시정권 지도층에 가혹했으며, 조사대상 200만 명에 99만 명이 구속된 최대의 숙청이었다.

후에
노벨문학상을 받아 유명해진 <이방인>과 <페스트>의 작가 알베르 까뮈가 언론인과 지식인 숙청에 앞장섰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있지 않다. 그는 반나치 저항신문 <콩바>의 주필을 맡아 저항운동의 선두에서 싸우면서 ‘해방된 프랑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이 되었다.

그는 사설에서 “누가 감히 용서를 말할 수 있는가. 무기를 잡아야 승리할 수 있다는 진실을 우리는 레지스탕스투쟁에서 알게 되었다. 내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기억을 기초로 하는 정의이다”라고 역설해 숙청을 대세로 만들었다. 레지스탕스 작가인 모리악이 드골에 관용을 호소했으나 드골은 까뮈의 손을 들어주며 숙청을 단행했다.

드골은 먼저 언론인과 지식인부터 철저히 응징했고 다음에는 비시정권 지도부, 그리고 각계각층으로 숙청을 확산시켰다. 페탱까지도 사형선고를 받을 정도로 숙청은 너무나 엄정하게 실시되었는데, 드골은 페탱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해주어 군의 선배를 대접했다.

언론인과 지식인부터 철저히 응징

그러면 드골은 왜 나치협력자를 이처럼 가혹하게 응징했던가? 드골 자신은 숙청동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치협력자들은 정치적 결정, 정치활동과 군사행동, 그리고 행정조치 및 언론의 선전 등에서 변화무쌍한 형태로 프랑스민족의 굴욕과 타락뿐만 아니라 프랑스민중에 대한 나치독일의 박해마저도 미화했다. 나치협력자의 엄청난 범죄와 악행을 방치하는 것은 국가 전체에 전염되는 흉악한 ‘농양과 종기’를 그대로 두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들을 정의의 재판에 회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드골은 나치독일에 협력한 민족반역세력을 국가의 ‘농양과 종기’로 보았다. 그는 이를 제거하지 않으면 전국적으로 전염되어 나라를 망친다고 확신했다. 드골의 나치협력자숙청은 항전파의 투항파에 대한 거세작전이라는 비판이 있었으나, 드골이 좌·우파의 모든 레지스탕스를 통합해 나치협력세력만을 재판에 회부함으로써 미국과 영국 등 안팎의 비난을 잠재웠다.

드골은 나치협력자를 나치전체주의를 신봉하는 인종차별주의자, 민족을 배반해 외세에 빌붙는 기회주의자로 파악하고 응징한 것이다. 극우파인 나치협력자가 정치무대에 재등장한다면 민족분열과 이념혼란의 화근을 키우는 것이며, 그래서 전국에 극우반동의 종기가 퍼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인식을 한 것이다.

사실 민족반역적 극우파에 면죄부를 주면 이들이 레지스탕스를 용공으로 매도해 재집권기회를 노릴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미 나치독일은 반공주의를 큰 소리로 외쳤고 비시정권도 반공주의를 국시처럼 섬겼다. 드골은 극우파의 민족분열 음모를 간파해 이념과 정파를 초월한 레지스탕스의 단결을 끌어내 ‘국가의 종양’을 도려내 버렸다. 이것이 드골의 나치협력자 청산의 기본성격이며 정치·역사적 의미이다.

“나치, 국가 전체에 전염되는 농양과 종기”

드골의 리더십은 해방 후 한반도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취한 결정과는 정반대였다. 해방정국에서 친일파의 득세로 정치뿐만 아니라 민족이 분열한 것은 극우반공주의를 표방한 친일파의 재등장에 기인한 것이다. 드골의 나치협력자숙청은 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만의 특수현상이 아니라 유럽의 일반적 현상이었다.

나치독일의 점령상태에 있었던 노르웨이,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에서도 나치협력자 숙청이 단행되었다. ‘프랑스의 숙청’은 유럽나라들에 견주어보면 오히려 약했다는 것이 최고전문가 로베르 아롱교수의 연구결과이다.

아롱은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3만8천여 명이 무기 등 징역형이 집행되었으며 10만 명에 평균 94명이 감옥에 갔는데, 덴마크는 10만 명당 374명, 네덜란드는 419명, 벨기에는 596명, 노르웨이는 633명이 각각 징역을 살았다고 밝혔다.














▲ 이승만 전 대통령
그는 그래서 프랑스의 숙청이 가장 약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노르웨이의 나치협력자 숙청은 인구비례로 볼 때 프랑스보다 거의 7배나 더 강했다. 반면 한국은 친일파에게 완전 면죄부를 준 특수한 나라가 되었다.

유럽의 나치협력자 숙청은 전후 독일의 나치청산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숙청이 마무리단계에 들어간 1946년에 뉴렌베르그의 국제전범재판소가 나치수괴들을 심판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전승 4강대국의 나치지도부 숙청은 독일국민이 자발적으로 행한 것이라기 보다는 전승국에 의해 패전국에 강요된 숙청이었다.

그러나 유럽의 나치협력자 응징은 당연히 전후 새로운 독일로 거듭나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초기 아데나워정권이 나치청산에 미온적이라는 비난이 있었으나, 1960년대
브란트의 좌파정부가 들어서면서 나치독일이 패망한 날을 ‘독일국민이 나치전체주의에서 해방된 날’로 규정하고 특별재판소를 설치해 나치전범을 재판한 것이다.

이는 일본의 전후 궤적과는 전혀 다르다. 프랑스와 한국의 전후가 다르듯이, 독일과 일본의 전후가 다른 것이다. 독일이 모범적 민주선진국으로 재도약한 것은 역시 나치청산으로 가능했다. 독일 브란트총리가
바르샤바 게토에서 무릎을 꿇어 용서를 빈 것은 독일의 과거청산을 증명한 것이다. 반면 고이즈미의 신사참배에서 보듯 일본은 전후청산을 스스로 거부하며 향수에 젖어 있어 피해국들의 저항을 받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 한국과 일본

프랑스와 독일이 유럽통합의 기관차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드골이 나치협력자에 면죄부를 주어 나치협력자가 재등장했다면 유럽의 민주선진화는 어려웠을 것이다. 좌·우파가 정책경쟁으로 정권을 주기적으로 교체해 국민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선진민주주의를 꽃 피우게 된 이유는 바로 극우적 나치협력세력과 나치즘을 청산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정치경제체제의 동질성과 기독교문명이라는 정신의 통합성을 기초로 유럽통합이 성공하기 이른 것 역시 나치청산이 기초가 된 것이 확실하다. 프랑스와 영국, 독일의 현대민주주의가 유럽통합의 길을 열었다. 먼저 그리스·스페인·포르투갈의 군사독재가 종식되었고, 드디어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 붕괴로 공산주의마저 멸망해 역시 서구민주주의에 합류하지 않았는가.














▲ 주섭일 고문
여기에 유럽이 오늘도 프랑스의 투비에와 파퐁 등 나치협력자재판에서 보듯 나치잔당을 계속 색출해 재판하며 나치협력세력의 등장을 날카롭게 경계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친일파청산은 비록 역사적 시대적 지역적 배경이 다르지만 매국세력과 극우전체주의를 응징해 민주주의와 정의를 구현한다는 점에서 맥이 닿고 그 필연적 당위성이 있다.

내년 8월 15일은 광복 60주년이다. 그날, 우리 민족이 과거 ‘친일의 유산’에서 해방되는 진정한 ‘광복절’의 기점이 될 수 없는 것인가?

/오마이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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