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를 수반한 일제의 파시즘 통치는 조선을 일제 식민지로 오래 동안 짓누른 가장 주요한 요인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또 하나 반드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으니, 이러한 일제의 식민 통치에 조직적으로 협력한 친일세력들의 발호이다. 을사오적이나 일진회와 같은 매국 행위자를 비롯해 일제의 각종 기관에 복무하면서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일제의 수탈 정책에 적극 협력한 주구(走狗)는 물론, 전시체제기(1937- 1945년 8월) 일제의 각종 수탈정책과 대외 침략정책에 적극 협력하여 제 민족을 ‘성전(聖戰)’을 위한 희생물이 되기를 강요한 반민족적· 반인륜적 범죄자들이야말로 일제의 조선 통치를 오래 동안 유지케 한 또 하나의 요인이었다.
해방 후 일제의 파시즘적 식민잔재의 청산은 타율적인 해방을 주체적인 해방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었고, 우리가 민족 공동체로서 거듭나기 위한 절대적 요청이었다. 파시즘적 질서를 해체해 민주 사회를 건설하고, 새로 건설될 독립국가의 도덕적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과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한반도 분할 전략과 이승만의 권력욕 그리고 친일파의 생존전략이 극단적 반공주의와 맞물리면서, 친일청산은 실패하고 말았다. 청산 대상인 친일 세력이 오히려 대한민국의 기득권을 온전히 장악하였고, 이후 대한민국은 ‘이들의 것’이 되고 말았다.
친일 세력과 이들과 학연지연혈연으로 이어진 후계세력들은 막강한 기득권을 형성해 우리 사회가 친일문제를 거론하는 것을 사실상 막아왔을 뿐 아니라, 나아가 친일행위자들을 민족의 지도자나 독립운동가로 둔갑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일마저 자행해 왔다. 최근에는 친일행위자들에 대한 각종 기념사업을 추진해 이들을 21세기 ‘민족의 사표(師表)’로 영원히 기념하고자 한다. 반민족행위 자체에 대한 반성보다는 은폐와 왜곡 그리고 미화를 통해 또 한번 역사의 범죄를 기도하고 있다 하겠다. 친일행위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과 미래의 문제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친일문제는 해방 후 반세기 이상 역사학계조차 방치·외면해왔다. 그러나 친일문제를 본격 연구한 임종국 선생 이래 친일잔재를 청산하자는 요구는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출범하면서 그 조직적 결실을 보았다. 이후 친일잔재 청산운동의 열기는 날이 갈수록 높아갔으며, 친일잔재의 청산은 무엇보다도 은폐왜곡미화된 친일파들의 행적과 그 실상을 제대로 기록한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라고 의견이 모아졌다. 2002년 12월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축이 되어 발족한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산하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그러한 소임을 다하기 위해 1백여명의 전문 연구자들을 주축으로 조직되었다. 일제가 우리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방대한 연구진을 모아 조직한 저 악명 높은 조선사편수회가 발족한지 무려 80년만에야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본격적인 조직이 결성된 것이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조직 결성 당일 친일파의 개념과 범주 등에 대한 국민공청회를 개최하고, 뒤이어 편찬위원회 전체 회의를 통해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해 두 가지 방향을 설정했다. 하나는 관련 자료를 최대한 수집하여 정리하고 엄격한 사료 비판을 통해 정확한 사실들을 확보하고 이를 데이터화하는 일이었다. 친일문제를 선구적으로 연구한 임종국 선생과 국내 유일의 친일문제 전문연구기관인 민족문제연구소가 축적한 방대한 성과와 학계의 관련 연구 성과는 물론 국내외에 흩어진 친일 관련 자료-이를테면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총독부 관보 만선일보 각종 기관지와 잡지 창씨자료집 등-들을 추가로 확보해 정리 분석하는 작업이 이에 해당한다. 풍부하고 정확한 자료의 확보야말로 역사의 진실에 다가서는 첫걸음이며, 객관적이고 정확한 1차 자료에 근거한 사실 기술이야말로 불필요한 논란과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이 분야의 작업은 친일인명사전 편찬 주간연구소인 민족문제연구소가 전담하기로 했다.
다른 하나는 친일인명사전의 사업 분야와 구체적인 작업 단계를 나누고, 역할 분담 및 일정을 확정하며, 추진 과정에서 단계적으로 성취한 내용을 출간하는 사업이었다. 먼저 친일세력은 일제 식민통치와 연동되어 그들의 ‘소임’을 다하였다는 점에서 일제의 식민통치의 실상과 그 메커니즘을 연구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테면 1910년대의 친일세력과 1930년대 후반 이래의 친일세력은 ‘친일’이라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동일하지만, 이들의 역할은 일제의 요구와 시대 상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오족협화(五族協和)’를 내세운 만주국에서 활동한 조선인 친일파와 ‘내선일체’를 강요한 조선에서 활동한 친일파 역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개개인의 친일행위에 앞서 검토되어야 할 이러한 역사적·거시적 조망은 민족문제연구소 명의로 추진된 각종 연구 프로젝트(이를테면 학술진흥재단 연구프로젝트)를 통해 최대한 성과를 일구어내고자 했다.
한편 친일세력은 각종 통치 기구나 관변 또는 민간단체를 통해 조직적으로 움직였기에 개인의 행적 조사에 앞서 각종 식민통치기구와 협력단체의 성격과 활동, 연혁 및 그 구성원들을 정밀하게 조사 정리하는 작업을 먼저 추진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기구 · 단체는 전국적 조직망을 갖춘 경우 외에도 지역에만 존재하는 것도 있으며, 일제의 대외 침략과 영토 확장에 발맞추어 일본 만주 중국 연해주 등 해외에도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실정을 고려해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개별 인물에 대한 자료 수집 정리와 병행해 5년을 기한으로 연차적으로 『일제식민통치기구 및 협력단체 편람』(국내 중앙편:2003년)『일제식민통치기구 및 협력단체 편람』(해외편:2004년)『일제식민통치기구 및 협력단체 편람』(국내 지방편:2005년)을 간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2005년도 8월 해방 60주년을 맞이해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될 명단을 발표하고 원고 집필에 들어가 2006년도에 역사적인 출간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현재 작업 진행과 제반 여건을 고려해볼 때 친일인명사전은 당초 계획보다 1년이 늦은 2007년도에 그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애초 친일문제에 대한 학계의 연구 성과나 충실한 자료 축적이 빈약한 상황 속에서 시작된 만큼 기본 자료의 정리와 수집에 많은 역량을 투하해야 했다. 턱없이 부족한 예산과 인력으로는 목적 사업을 기한 내에 달성하기가 힘들었다. 또 일반 논문이나 연구서와 달리 수많은 기구와 직책 그리고 수만 명의 이름에 대한 오류 검토는 조사나 집필 못지않은 시간과 정력을 요구하였다. 이 사전의 특성상 단 하나의 오류가 나오더라도 이 사업을 반대하는 세력들에 의해 온갖 마타도어와 흠집 내기가 난무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어려움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2004년도 사업예산을 국회에서 전액 삭감함으로써 민족의 숙원 사업이 중단될 결정적 위기까지 맞았다. 해마다 힘들게 몇 달을 전력 투구해 예산을 확보하는 것조차 온갖 어려움을 겪었는데, 예산의 전액 삭감이라는 조처는 그야말로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반민특위처럼 또 한번 좌절을 겪게 되나 싶었을 때, 다행히 온 민족이 나서서 열화와 같이 성금을 모아주심으로 인해 이 사업은 기적처럼 다시 부활했다. 이에 힘입어 연구에 가속도가 붙었으며, 연구원을 늘이고 자료 수집과 정리에 박차를 가해 그간 축적된 성과를 하나하나씩 민족 앞에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첫 번째가 민족문제연구소 명의로 낸,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대중적 홍보책자이자 교양자료라 할 『식민지 조선과 전쟁미술-전시체제와 민중의 삶』이라는 자료집이다. 이어 이번에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의 첫 성과인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 중앙편)을 떨리는 마음으로 선보이게 되었다.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 중앙편)은 일러두기에서 밝힌 바와 같이 2002년도 편찬위원회의 사업 성과물인 『일제식민통치기구 및 협력단체 편람』(국내 중앙편) 가운데 조선총독부와 그 소속 관서를 제외한 각종 관변·민간 협력단체만을 대상으로 그 내용을 대폭 수정 보완해 사전형식으로 출간한 것이다. 조선총독부와 그 소속 기구가 빠진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 그 내용이 워낙 방대해 도저히 하나의 묶음으로 발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2005년에 별도로 편제하여 『일제 식민통치기구사전』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한편 이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 중앙편)에는 마땅히 들어가야 할 단체 또는 기구가 서술상의 어려움이나 자료의 재검토 필요성 등이 제기되어 불가피하게 누락되기도 했다. 이는 수정 증보판을 통해 추가할 것임을 분명 약속해둔다.
이제 편찬위원회는 2005년도에 『일제협력단체사전』(해외편)을, 『일제 식민통치기구사전』과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 지방편)을 순차적으로 발간할 것이다. 그리고 을사늑약 100주년, 해방 60주년, 한일협정체결 40주년이 되는 2005년 8월 15일을 전후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될 명단을 공식발표하고 본격적인 인물 집필에 착수하고자 한다.
이번에 간행된 사전은 그 출발에 지나지 않는다.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에 비추자면 우리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절반의 고지에 이르렀다는 위안과 자부도 가질만하다. 그러나 만해 한용운선생이 일찍이 설파한 바, “남들은 십리가 반이라지만 나는 구십 리가 절반”이라는 따끔한 충고를 오히려 명심할 때이다. 백리 길에 구십 리를 가고서도 그 마지막에서 포기하고 마는 세태를 -실제 친일파 가운데에도 만절(晩節)을 지키지 못해 오욕의 역사 속에 빠진 이들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만해선생은 뼈저리게 체험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일례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조차 그 요란한 언론보도와 시민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막판에 여야합의라는 미명 속에 끝내 본래의 정신을 지키지 못하고 개악되는 현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이 사전의 출간을 마땅히 기뻐해야 하겠지만, 앞으로 가야할 길을 -우리는 구십 리가 아니라 십리도 채 오지 않았다- 다시금 바라보고 이 역사적 숙원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다짐의 기회로 삼을 필요가 있다.
이 사전을 간행하기 위해 너무도 많은 분들의 헌신과 도움이 있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친일세력 청산을 “나의 제2의 독립운동”이라고 외치며 80고령에도 실천운동을 전개하고 계신 독립운동가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님 이하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과 회원님들, 그리고 초대 위원장으로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의 기틀을 잡고 사실상 이 사전 발간의 기초를 놓으셨던 이만열 국사편찬위원장님과 사전 편찬위원들, 무엇보다도 어려운 조건 아래서도 값진 원고를 써주신 집필진들과 후원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국민 여러분들, 이 모든 분들이 사전편찬사업을 함께 추진해가는 진정한 역사의 주인공들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깊은 감사를 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