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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을유년(乙酉年) 새해는 한국 근ㆍ현대사에는 여러 기념비적 주년(周年)이 겹친다. 가깝게는 한ㆍ일국교정상화 40주년이 되며, 그것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8.15 광복이 꼭 환갑을 맞는다. 두 사건은 연결 고리가 모두 일본이다. 한국근현대사에서 결코 뗄 수 없는 일본과의 질긴 인연은 연원이 더 깊어 그 직접적인 분기는 이 사건에서 시작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바로 1905년에 체결된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다. 내년으로 이 을사조약이 체결된 지 꼭 1세기를 맞는다. 대한제국이 대일본제국에 공식 합병된 것은 1910년이지만 이보다 5년 전에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으로 사실상 조선은 일본이 `보호’하는 국가로 전락했다. 그러나 이 을사조약이 체결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 있다. 그것이 바로 1904년 2월 8일, 일본함대가 뤼순 군항(旅順軍港)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를 기습함으로써 시작된 러일전쟁이다. 늙은 제국을 상대로 한 이 전쟁에서 영국을 등에 업고 승리한 일본은 이듬해인 1905년 9월 5일, 미국 중재로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과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게 된다. 이 러일전쟁은 이미 올해 발발 100주년을 맞아 일본을 중심을 대대적인 재조명 열풍이 일었다. 그러나 그 여진은 결코 올해로 그칠 것 같지 않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종결 시점을 기준으로 러일전쟁 100주년인 동시에 이 승리를 발판 삼아 마침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게 된다. 일본은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한 다음, 1905년 11월 9일 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조선에 보내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앞세우고 외교권 박탈을 골자로 하는 협약체결을 조선에 대해 강요하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급기야 같은달 17일 일본은 헌병을 동원한 가운데 어전회의에서 8대신 중에서도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영기(閑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이 반대하는 가운데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이 찬성표를 던졌다. 이 때 조약은 1990년대 서울대 이태진 교수에 의해 그 효력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서명이 빠져 있음이 밝혀짐으로써, 법적 효력 자체가 없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을사조약은 그 여진이 1세기가 지난 지금에까지 한국사회의 여러 단면을 구속하는 현재진행형이란 점에서 다른 여타 사건보다 더욱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당장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거세게 몰아치고 있는 과거사 청산운동의 그 중심 판에 이 을사조약이 자리잡고 있다. 과거사 청산운동은 그 대상 범위를 해방 이후 여러 사건, 예컨대 한국전쟁이나 각종 의문사까지 그 범위를 포괄하고 있으나, 그 진원지는 누가 뭐라 해도 소위 친일파가 핵심이었다. 그 친일파의 원조격으로 거론되는 이가 이완용으로 대표되는 을사오적(乙巳五賦)이라 할 수 있다. 친일파를 청산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측에서는 이완용을 앞세워, 그 운동의 정당성을 담보하려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을사조약은 어떤 면에서는 한국근현대사의 치욕이기도 하면서, 그러한 치욕을 이제나마 설욕할 수 있는 법적ㆍ도덕적 정당성을 제공하는 더 없는 호재이기도 하다. 러일전쟁이 빌미를 제공하고 을사조약이 촉발한 과거청산 등의 움직임을 둘러싸고 2005년에는 더욱 큰 파장을 우리 사회에 그릴 것으로 전망된다. 때마침 한국정부는 한일국교정상화 회담과 관련한 일부 문건을 공개하기로 했다. 또, 과거사 청산을 주도하고 있는 어떤 시민단체는 친일파 사전 편찬을 통해 친일파의 군상과 그들의 친일 행적을 공개하겠다고 예고해 놓고 있다. 학계에서도 을사조약 100주년을 맞이한 여러 학술회의 개최를 예고해 놓고 있는데 국내 15개 역사학 관련 학술단체가 참여하는 전국역사학대회 조직위원회는 내년 5월 27-28일 제48회 전국역사학대회 공동발표 주제를 을사조약으로 확정했다. 또 1월29일-2월4일 미국 하와이에서는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와 일본 국제기독대학, 하와이대학 한국학연구센터가 참여하는 한ㆍ미ㆍ일 공동학술회의가 `한국 병합의 역사적ㆍ국제법적 재검토’라는 주제로 열리기로 돼 있다. 그렇다면 이 을사조약과 관련해 향후에는 어떤 부문을 주목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을사조약에 대해, 그 체결 직후인 1905년 11월20일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실린 이 신문사 사장 장지연(張志淵)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당시 전 조선인민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알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을사오적을 규탄하고 일제의 폭압성에 전 신민이 분노했으며, 그리하여 일부 친일파를 제외한 거의 절대다수의 조선신민이 언제든 제국주의 일본의 타도를 위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는가? 과연 당시 조선의 절대 민중은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장지연의 생각이 혹시라도 일부 지식계층에 국한된 인식은 아니었을까? 을사조약, 혹은 그 연장선에 있는 1910년 한일합방은 그 이칭(異稱)이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 하지만, 과연 그것은 누구의 국치(國恥)였는가? 모든 권력은 황제에게 있고, 주권 또한 황제에게 있다는 법률을 제정한 고종의 국치였던가? 장지연의 국치였는가? 혹여 현재의 우리가 생각하는 국치(國恥)는 아닌가? 이런 문제들도 함께 고민을 해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일제의 식민지배가 외려 잘 된 일이라는 일본 우익의 망발을 되풀이할 필요는 물론 없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을사조약에 대한 우리의 상식과 통념과 학계의 연구성과는 이 대목을 누락시키고 있다. 그것이 식민치하였건, 혹은 1인 군주독재를 표방한 대한제국 시대였건, 혹은 그 이전 전통 조선시대 왕조국가였던 이 한반도에 적어도 1천만 명, 혹은 2천만 명이나 되는 실로 거대한 인민이 살았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우리 상식이나 학계 주장이 을사조약을 중심으로 하는 일제의 폭압성을 밝히는 데 치중하고, 또 그들이 강압 지배한 조선반도 전체를 감옥으로 규정함으로써, 그 많은 조선 신민 모두를 강제노동에 종사하는 수동적이면서 때로는 두 주먹 불끈 쥘 수 있는 순교자나 저항운동가로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럼으로써 식민지 시대를 하나의 단면으로써만 그리는 것이 아닌지 등에 대해 이제 냉엄하게 살펴봐야 할 것이다.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원문> 국한문 혼용, 일본어, 그리고 영어로 작성된 이 조약 원문은 다음과 같다. 이 ▲국한문 : 韓日協商條約(한일협상조약) 日本國政府及韓國政府는 兩帝國을 結合하는 利害共通의 主義를 鞏固케 함을 欲 第一條 日本國政府는 在東京 外務省을 由하야 今後에 韓國이 外國에 對하는 關 第二條 日本國政府는 韓國과 他國間에 現存하는 條約의 實行을 完全히 하는 任 第三條 日本國政府는 其代表者로 하야 韓國皇帝陛下의 闕下에 一名의 統監을 ? 第四條 日本國과 韓國間에 現存하는 條約及約束은 本協約條款에 抵觸하는 者를 第五條 日本國政府는 韓國皇室의 安寧과 尊嚴을 維持함을 保證함 右證據로 하야 光武九年十一月十七日 明治三十八年十一月十七日
日本國政府及韓國政府ハ兩帝國ヲ結合スル利害共通ノ主義ヲ鞏固ナラシメムコトヲ 第一條 日本國政府ハ在東京外務省ニ由リ今後韓國ノ外國ニ對スル關係及事務ヲ監 第二條 日本國政府ハ韓國ト他國トノ間ニ現存スル條約ノ實行ヲ全フスルノ任ニ當 第三條 日本國政府ハ其代表者トシテ韓國皇帝陛下ノ闕下ニ一名ノ統監(レジデント 第四條 日本國ト韓國トノ間ニ現存スル條約及約束ハ本協約ノ條款ニ抵觸セサル限 第五條 日本國政府ハ韓國皇室ノ安寧ト尊嚴ヲ維持スルコトヲ保증< 言+正 >ス右증< 明治三十八年十一月十七日 光武九年十一月十七日
The Government of Japan and Corea, desiring to strengthen the principle of ARTICLE Ⅰ. ARTICLE Ⅱ. ARTICLE Ⅲ. ARTICLE Ⅳ. ARTICLE Ⅴ. In faith whereof, the Undersigned duly authorized by their Govern- ments h HAYASHI GONSUKE, (Seal) PAK CHE-SOON, (Se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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