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진상 규명을 놓고 말이 많다. 진상조사가 진행될수록 탈도 많아질 것이다. 그러나 말이 많고 탈이 많더라도 진상은 규명되고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과거사 규명은 이 시대의 역사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김대중납치사건, 민청학련사건 등 7개 사건을 우선조사대상으로 선정하고 본격 조사에 들어간 것은 용기있는 일이고 잘한 일이다.
독재정권의 유산을 덮어두자는 의견도 있다. 아픈 상처를 건드려 좋을 것이 뭐가 있느냐는 논리다. 과거보다 오늘이 중요하고, 오늘보다 미래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도 곁들여진다.
<진상규명은 용서와 화해를 위한 것>
과연 그럴까. 이러한 논리를 펴는 쪽은 대부분 과거 독재정권의 수혜자들이라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는다. 인권 탄압, 용공조작, 특혜경제, 부정부패로 얼룩진 시대에 음으로 양으로 갖가지 혜택을 받았고 그 혜택을 바탕으로 오늘이 있게 된 사람들이다.
지나간 과거는 묻어두고 미래를 향해 나가자는 논리에는 많은 허점과 오류가 있다. 과거를 묻어두어야만 미래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잘못된 과거를 정리하고 넘어가는 것이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과거를 묻어두자는 것은 역사에서는 배울 교훈이 없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아니, 배울 교훈이 하나가 있긴 있다. 역사에서는 ‘힘이 정의’라는 교훈이다. 강자(권력자)가 역사를 지배한다는 교훈이다.
이런 교훈을 2세들에게 남기고 가르치자는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왜곡, 조작, 은폐, 고문, 탄압, 학살, 분열, 특혜, 부정 등으로 얼룩진 과거사의 진상을 밝히고 그 진실을 햇볕 아래 드러나게 하는 것이야말로 역사에서 교훈을 찾는 것이다. 다시는 국민을 독재정권의 대중조작에 놀아나게 해서는 안 된다. 다시는 오욕의 역사를 되풀이할 수 없다는 다짐이 필요하다. 왜 독일 정부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6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눈물을 흘리며 반성하고 사죄하는가.
과거사는 누구 말대로 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는 것이 아니다. 싫든 좋든 우리 민족의 소중한 역사다. 문제는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그 역사에서 교훈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 일은 후대에 미룰 수도 없고 남에게 맡길 수도 없다. 바로 오늘 우리들이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사 정리문제를 정략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거나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들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박근혜 대표에 대한 흠집내기라는 비판은 너무 정략적이다. 박대표가 한나라당 대표로 있다고 박정희정권 시절의 의혹사건을 제외한다면 그것이 더 정략적이다.
진상 규명은 결국 용서와 화해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화해는 가해자의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 가해자와 그 상속자가 뉘우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을 다른 사람이나 시대적 상황에 떠넘긴다면 화해는 이루어질 수 없다.
또한 일방적인 용서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자세가 아니다. 일방적인 화해는 또 다른 정치적 목적에 이용될 수 있다. 결국 국민은 들러리가 되고 만다. 진실 밝히기의 주체로 나서지 못하고 구경꾼으로 내몰리는 상황이 된다. 역사바로세우기가 정략적 목적에 이용됐다는 비판을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성숙한 미래를 위한 통과의례이기도>
참여정부는 이런 우려를 씻어줄 필요가 있다. 정말 역사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진상을 밝히고 진실을 알게 해야 한다. 그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참여정부의 과거사 문제 제기는 집권초 검찰과 국정원 등 권력기관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공언에 맥이 닿아 있다. ‘바보’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까지 권력기관의 사유화를 포기한 노대통령이 있기에 국정원이나 경찰의 ‘과거사 고해성사’가 가능해진 것이다. 권력의 시녀, 정권의 하수인이었던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가 저지른 의혹사건들이 역사의 도마 위에 오를 수 있게 된 배경이다.
권력에 의해 은폐된 진실이 어느 시기에 햇볕 아래 드러나는 것이 역사의 순리이다. 창고에 처박아놓거나 땅 속에 묻어둔 채 있는 것을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역사에 대한 배반이다. 진실이 밝혀질 경우 국민들은 속아온 세월에 분통이 터지고 전율을 느낄지 모른다. 독재자들의 대중조작과 진실 은폐에 치가 떨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해도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우리 국민은 성숙한 미래로 가는 통과의례를 치른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산연구소, 05.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