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진주를 중심으로 일본제국주의에 부역한 친일행위자를 파악함에 있어 그 대상자를 확인하는데 필요한 인물들의 명단과 그들의 행적을 수록한 것이다. 책에 수록된 이들은 모두 친일파나 친일부역자라고 규정할 수는 없지만 일제 침략기에 복무했던 다양한 역할들을 제시함으로써 협력행위 전반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인명록에는 진주에서 한때 관공리를 지냈거나 면협의회·읍회·부회·도회·상공회의소·경방단 등 친일관변단체에서 사회활동을 했다면 진주에서 태어나지 않았어도 조건 없이 수록되어 있다. 또 본적지가 진주로 확인된 자들도 비중 있는 인물이라면 게재돼 있으며 비록 진주에 있는 동안에는 친일행위를 하지 않았지만 진주를 떠난 후 주목할 만한 친일행위를 했을 경우에도 실렸다. 심지어 진주에서 구장이나 국세조사원 등 말단관공리나 협력자들도 수록됐다. 그 당시 진주에서 일제식민통치와 관련된 인물이라면 모두 실린 셈이다. 또 책을 통해 일제 시대 관공리를 지낸 이들이 해방 이후 어떻게 실세로 자리잡았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일제 때 진주역장을 역임한 김석관은 해방 후 교통부 장관을 지냈으며 또한 진주부청 내무과에서 속을 지낸 이계순은 해방 후 농림부 장관을 지냈다. 해방 후 내무부장관까지 역임한 김현옥이 일제 때 진주에서 청년훈련소 군사교관 보조수를 지낸 자로 확인되었다. 이밖에 일제 때 진주법원에서 판임관 견습으로 관료를 시작한 정창운은 해방 후 검찰총장을 역임했다. 초대 대구시장을 역임한 허억은 일제 때 경상합동은행 진주지점장을 지내면서 진주경찰서 연무장에서 결성된 조선특별지원병 진주후원회의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특히 허억은 대구시장을 지낼 때 박정희와 육영수의 결혼식 때 주례를 선 인물이다. 대기업 LG그룹 창업주 구인회는 일제 때 진주상공회의소 의원을 지냈으며, 식산은행 진주지점에서 찾은 돈으로 토지매입에 투자해 대지주가 되었고, 해방 후 이 돈으로 기업경영을 하는데 자본의 밑천을 삼았다. 해방 후 초대 진주시장을 역임한 정종철은 일제 때 진주부청에서 국민총력계 주임을 지냈고, 이후 2대 부산시장 9대 경남도지사 그리고 서울시장 직무대리로 승승장구했다. 그가 일제 때 근무했던 국민총력계는 징용 등 황국신민화정책을 담당한 부서이다. 정종철은 일제 때 조선총독부 자문기관 역할을 한 중추원 참의의 아들로서 그 출세 길은 아버지의 친일행적과 맞물려 있다. 중추원 참의는 반민특위에서 당연범으로 체포할 정도로 그 친일 상이 악랄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초대 진양군수를 지낸 김찬식은 일제 때 진양군청 내무과장을 지낸 바 있다. 해방 후 진주경찰서 경무주임으로 초대 진주경찰서장 역할을 담당했던 천기준은 일제 때 순사부장을 지냈으며, 초대 진주소방서장 김봉규는 일제 때 진주경방단 부단장을 역임했다. 교육계에서는 경상대학교의 전신인 진주 농과대 초대학장 황운성이 일제 때 진양군수를 지냈다고 확인돼 있다. 또한 정치계는 진주부청 내무과 소속의 갱생원에서 지도원을 지냈던 이강우가 해방 후 진주에서 제헌국회의원이 되었고, 진양군 농회 서기를 지냈던 황윤호가 진양군에서 역시 제헌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이밖에도 일제 때 면장을 지냈던 김용진과 기수를 지냈던 황남팔 등이 해방 후 진주에서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언론계는 진주에서 창간된 지방지의 효시라고 일컫는 경남일보를 들 수 있다. 경남일보의 인물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1909년 창간 당시 장지연과 김홍조 등 중요관계자가 한일합병 후 모두 일제관공리나 협력자가 되고 말았다. 또한 해방 후 1946년 복간이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초대 사장 허만채는 일제 때 경남도회 의원이었으며 2대 사장 문해술은 일제 때 진주경찰서 순사부장을 지낸 자였다. 이 밖에 종교계 역시 친일상이 드러나 있다. 진주 청곡사와 의곡사에서 무운장구 기원법회를 하고, 문산성당과 옥봉성당에서는 국방헌금을 납부하고, 진주교회에서는 신사참배를 선언했다. 아울러 우리나라 대중음악계를 사로잡았던 진주출신의 대중가수 남인수를 비롯해 작곡가 이재호와 손목인의 친일가요가 밝혀져 있다. 필자는 ‘진주 지역에서 이처럼 많은 부역자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한 때 진주가 도청소재지였기 때문’이라는 점도 들고 있지만 ‘비단 이러한 현상은 진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필자는 ‘이 책에 수록된 인명이 모두 친일파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친일행위자를 포함하고 있다’며 ‘친일파는 민족문제연구소와 학계가 추진중인 연구와 합리적인 기준에 의해 판단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주목할 만 것은 1949년 2월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해 중추원 참의였던 최지환, 고등계 형사였던 오성환이 체포되는 등 초창기 ‘경남 반민특위’가 취급한 구두고발 및 서면고발이 2백 건을 돌파했으나 같은 해 8월 반민특위가 활동을 중지함에 따라 진주에서 체포된 반민족행위자가 모두 석방됐다는 점이다. 필자는 자료를 수집하면서 동명이인의 행적을 추적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한다. ‘동명이인을 한 사람의 이력으로 정리했다가 뒤늦게 서로 다른 사람임을 확인하고 바로잡을 때는 집필에 대한 두려움마저 느꼈다.’ 이는 문서의 오식과 오탈자 창씨개명이 한 몫 더 보탰다. 또 친일 행적이 많을수록 그 대상자의 이력도 풍부하고 수록된 분량도 많아 자료를 수집하기가 쉬웠는데 반해 직책이 낮으면 그 행적도 추적하기 힘들어 인물에 따라 분량의 차이가 크다.
필자는 오늘날의 활동은 과거 반민특위가 가동할 당시보다 더 가혹하고 철저하게 친일부역자의 명단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일련의 반민족행위 조사가 처벌용이 아닌 진상규명용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투망을 던져 피라미 한 마리까지도 모두 건져 올리듯 진주지역과 관련된 인명들을 총체적으로 수록하고자 노력했다’며 ‘여기에 섞인 수많은 인명들 가운에 옥석을 가리고 친일행적을 드러내는 작업은 앞으로도 지속될 시효가 없는 작업이 될 것이다’고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앞으로 이 책은 그동안 은폐되어왔던 지역의 친일연구에 기폭제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와 관련해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은 ‘부족한 자료와 지역사회 기득권 세력의 적대적이고 냉소적인 시선 등 열악한 여건을 극복하고 방대한 역저를 완성한 저자의 오랜 작업이 얼마나 고단하였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밝히고, ‘이 노작이 전범이 되어 전국 각 지역에서 친일문제 연구가 더욱 활성화되고 친일인명사전 편찬에도 유용한 기초자료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