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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관 폭파 의거 주역 조문기 선생 회고록 출판기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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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마지막 의열투쟁으로 일제와 친일파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노독립운동가의 회고록이 나왔다. 해방을 불과 몇 일 앞둔 1945년 7월 24일 극악한 친일단체인 대의당이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별관)에서 개최한 ‘아시아민족분격대회’ 단상에 시한폭탄을 설치 폭파시켜 일제와 대의당의 대대적인 민족지사 제거 기도를 사전에 좌절시켰던 조문기 선생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진솔하게 정리하였다. 회고록에는 선생의 어린시절부터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친일청산운동에 몸담게 되기까지의 80여 성상의 세월이 녹아있다.


 부민관 폭파 의거가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은 가히 충격적이라 할만하였다. 가혹한 전시체제하에서 숨죽여 지내던 민중들에게 저항정신을 일깨웠으며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가 굳건히 살아 있음을 만천하에 과시하였다. 철저한 보도관제가 있었음에도 거사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장안의 화제가 되었으며 일제는 거액의 현상금까지 걸고 주모자들을 색출하려 혈안이 되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회고록에는 친일파 괴수 송병준 일가와의 악연, 해방 직후 조선은행 금괴 반출을 저지한 일, 단정반대 인민청년군 사건, 이승만 암살 정부 전복 음모 조작사건, 성시백 사건, 민족민주청년동맹사건 등 선생이 관련된 한국현대사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의 이면이 자세히 기록되고 있다.







 또 친일 청산에 대한 선생의 확고한 신념과 독립운동계에 대한 뼈아픈 자성의 목소리도 담겨 있다.


 10대에 독립운동에 투신한 후 투옥 고문 유랑으로 이어지는 평범치 않은 선생의 고단한 청년시절이나, 독립운동가를 만나 평생을 인고의 세월로 지낸 아내에 대한 애틋한 감정 표현은 읽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일생을 좌우 어느 편에도 서지 못하고 오로지 민족만을 생각하고 행동해온 고난에 찬 선생의 역정이 바로 우리 민족의 현대사가 아닐까 여겨진다.


“우리가 목숨 걸고 찾으려 했던 건 분단된 조국이나, 친일파 천국이 아니라고요. 친일파가 청산된 조국을 찾으려 한 건데, 이건 보니까 독립 운동해서 나라 찾아 친일파한테 진상한 꼴이 된 거예요. 거기다 나라도 분단되고, 그렇기에 남북통일과 친일파 청산이 이뤄져야 진정한 해방이고 독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길 위에서 진정한 독립을 위해 난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는 겁니다. 내가 광복절 행사 같은 데 안 가잖아요. 뭘 기념하겠거냐는 거죠. 그건 순국선열에 대한 모독이고, 독립운동가가 자기 양심 버리는 거라고 보기 때문이예요.”


 – 조문기 선생 말씀 중


 


부민관 폭파사건의 전모


 부민관 폭파사건은, 전시하에서 조선청년 3천여 명이 참여해 일본 군경을 놀라게 한 <일본강관(日本鋼管) 파업사건>을 주도하여 수배를 받고 도피중이던 청년 조문기와 유만수가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앞장선 이가 박춘금이란 사실을 알고 박춘금을 비롯한 친일거두들을 응징하기 위해 1945년 1월, 국내로 잠입해 일으킨 사건이다.


 동지들을 규합해 ‘대한애국청년단’이란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기회를 노리던 중, 박춘금을 당수로 박흥식, 이성근 등 친일파 거물들이 총결집하여 만든 대의당이 1945년 6월 명월관에서 발기대회를 연다. 하지만 이 때는 준비가 부족했고, 검문이 삼엄하여 접근할 수가 없었다. 1945년 7월 24일, 부민관(구 국회의사당)에서 친일 거두들과 총독 수뇌부, 아시아 각국의 친일파들이 총출연하는 대의당 주최의 <아세아민족분격대회>가 열린다.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은 군중 속에 숨어들어 연단 입구와 무대 밑에 시한폭탄을 설치하고 빠져나온다. 3분 후, 폭탄이 연달아 폭발하고 대회는 아수라장이 된다.


 일경과 박춘금은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범인 색출에 나섰지만 범인은 검거되지 않았다. 일제 패망 후에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그날 모든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단정수립 저지 사설군단 ‘인민청년군’  


 해방 후 친일파가 판을 치고, 애국인사들이 암살당하는 혼란 속에서 계룡산에 칩거하고 있던 조문기는 미군정과 이승만이 남쪽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제헌의회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온다. 단독정부 수립은 민족을 영원히 두 동강 내고 말것이라는 확신을 세운 조문기는 독립운동한 사람으로서 이를 방관하면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짓는 것이란 생각에 이를 저지하려 한다. 당시 미군정과 이승만은 친일경찰들을 내세워 남북협상파들을 체포 고문하는 등 노골적으로 통일정부 수립을 방해하며 단독정부 수립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조문기는 유만수 등 동지들을 규합해 사설군단조직 <인민청년군>을 만든다. 단정수립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노골적으로 방해하지 못하도록 이승만과 미군정에게 경고를 주기 위한 평화적인(?) 무력시위를 준비한다.


 거사 계획은 삼각산 6개소에 사제 시한폭탄을 설치해 동시에 봉화를 올리고 서울 시내의 고층빌딩 수십 곳에  ‘통일정부 이룩하자’, ‘단일정부 수립반대’, ‘미군은 물러가라’ 등의 문구가 적힌 현수막들 펼친 후, 공중에 총 몇 발을 쏘아 무기를 가지고 있음을 알리는 것으로 마치 단정수립을 반대하는 막강한 무력이 존재함을 과시해 이승만과 미군정이 노골적으로 남북협상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사 계획은 실행 직전 조직에 숨어든 프락치에 의해 발각되어 체포된다.


 경찰서 취조실에서 들어선 자는 놀랍게도 일제 때 악명 높은 친일경찰 김종원이었다. 후일 거창양민학살을 저지르기도 한 자이다. 조문기가 김종원으로부터 당한 고문은 상상을 초월한다. 들어서자마자 곡괭이 자루로 머리를 내리쳐 삽시간에 피가 솟구쳐 오르고 기절한다. 정수리에 재 한줌을 뿌려 붕대로 칭칭 감아놓고는 대못이 박힌 각목으로 내리친다. 각목이 몸에 닿을 때마다 대못이 몸속으로 쑥쑥 들어오는 소름끼치는 느낌은 어찌 형언할 수 없는 공포다. 각목이 닿는 곳마다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곧 바닥이 온통 피범벅이 된다.


 무엇보다 해방이 된 조국에서 악랄한 일제 친일경찰에게 고문당하는 현실이 분통터지고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친일경찰들은 <인민청년군> 사건을 과대포장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다. 북괴와 남로당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짜놓은 시나리오를 들이밀며 인정하라고 악랄하게 고문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고문에도 불구하고 조문기는 그들이 짜놓은 시나리오를 거부했다.


 공산주의자는 한사람도 없다는 것이 인정되고,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른다.







 희대의 독립운동 사기극


 조선일보 73년 7월 18, 19일자에 <부민관폭탄사건, 주모자 누구인가>라는 기사가 연재된다. 내용인즉, 부민관 거사는 백범 김구 선생의 비밀지령으로 이루어졌으며 일본 내무성에 고등관으로 침투해있던 비밀요원 김형극의 지도 아래 임정첩보 36호조 김정균, 남의태, 엄숙록 등이 거사의 주역이고, 유만수, 조문기, 강윤국은 그들에게 포섭되어 시키는 대로 한 행동대일 뿐이란 기사가 연재된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세균열차 폭파사건, 아오모리(青森)군항 폭파사건, 특급군사기밀 탈취사건 등 007 첩보영화에 버금가는, 있지도 않은 독립운동 영웅담이 쏟아진다.


 조문기의 조선일보 방문으로 모든 것이 김형극이란 사기꾼의 거짓말임 금방 밝혀진다. 김형극은 실제 일제 때 내무성 고등관이었다고 자백한다. 친일반역자 주제에 독립운동사를 희롱한 것이다. 이 일로 사과와 정정 해명기사가 나가고 이규태 부장은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그런데 이렇게 일단락된 사건이 75년 8월 16일자 동아일보에 8.15 특집으로 <유명한 임정첩보36호조의 유일한 생존자>로서의 김형극 사진과 함께 다시 한번 대서특필된다. 이후 월간 여성잡지, 아동만화까지 파고들었고 86년 3.1절 특집으로 동양 TV에서는 <선구자 대륙의 밀사>가 연속드라마로 방영이 되었고 <임정첩보 36호조>라는 베스트셀러 책자까지 나왔다.


 때마침 한국일보의 손태규기자가 김형극의 정체추적에 나서 8.15특집으로 한 면을 차지한 지면에는 김형극의 신화적인 사기극의 전모가 후련하게 폭로됐다. 그는 일제 시대 공주군 유구면의 부면장을 지낸 자이며 해방 후에는 미군을 따라다니며 실속을 챙기다가 끝내 선박수주에 얽힌 대형 사기 사건으로 4년이나 징역형을 치른 자였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88년 3월 1일. KBS 1TV가 방영한 3.1절 특집프로 <선구자 백산 안희제>에 김형극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야인시대와 김두한의 뻔뻔한 거짓말


 2003년, SBS에서 김두한의 일대기를 다룬 <야인시대>가 대단한 인기를 끌며 방영될 때


 야인시대 담당 PD가 드라마와 관련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싶다며 조문기를 찾아온다. 조문기도 그를 꼭 만나고 싶던 참이었다. 김두한을 항일애국지사로 부각시키는 것이 가당치도 않았고, 역사를 온통 거짓투성이로 왜곡하는 것이 언짢기도 했지만 부민관폭파사건에 관련해 크게 걱정되는 일이 있었다.


 이환경씨가 쓴 소설 ‘야인시대’에서 부민관 거사에 사용한 폭약은 김두한이 건네준 것이고 그것이 발각되어 김두한이 모진 고문을 당하고 고생하다 감옥에서 8.15를 맞는다는 내용이다. 그 소설가 이환경씨가 곧 드라마 작가이고,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기에 그렇잖아도 걱정하던 차였다.


 조문기는 담당 PD에게 부민관 거사를 그런 내용으로 왜곡하지 말라고 호통을 쳤건만, 드라마는 소설 원작 그대로 방영되었다. 연구소에서 그 담당 PD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를 했더니 그 PD는 “그냥 드라마는 드라마로 봐주세요.”라고 하더란다.


 괴이한 일은 김두한의 일대기를 다룬 모든 소설들이 한결같이 부민관 거사를 김두한과 연관된 것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알고 보니 김두한의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이 발단이었다.


 김두한의 자서전 [피로물든 건국전야]와 1969년 동아방송 <김두한의 노변야화>방영분에 김두한 스스로 뻔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인가 하면 김두한은 부민관 폭파사건이 언제 일어난 것인지도 모르고 있다. 부민관 사건 때문에 8개월여 옥고를 치뤘다고 주장한다. 또 체포된 범인과 대질신문까지 했다고 증언했다. 거짓말의 특징은 진술이 일관될 수 없다는 것. 자서전의 내용과 방송분의 내용은 전혀 다르다.


이런 거짓말이 방송으로 전파되고, 여러 편의 소설로 만들어지고 마침내는 온 국민이 시청하는 드라마까지 만들어진 것이다. 김두한은 어찌 이런 거짓말을 할 생각을 품었을까? 아마도 그는 그런 거짓말이 통하는 세상이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문


 


 해마다 되풀이 되는 일이지만 광복절은 광복회원들이 기다리는 잔칫날이다. 대접받는 날, 민족해방을 경축하는 날, 얼마나 가슴 벅차고 설레는 날인가?


 하지만 알고 보면 거짓 환상이고 위선으로 가득 찬 날이다. 그래서 나는 안 간다.  그날이 되면 나는 산으로 바다로 경축의 냄새가 안 나는 곳으로, 펄럭이는 태극기가 안 보이는 곳으로, 경축 현수막이 안 보이는 곳을 찾아 피신을 간다.


 내가 생각해도 유별난 게 분명하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나름의 이유가 있다.  


 1945년에 일제는 물러갔지만 우리는 여전히 일제 치하에서 살고 있다. 8.15 이후 숙청된 것은 친일파들이 아니라 독립운동자들과 민족운동 세력이었다.


 친일파들은 새로운 권력자 미국을 등에 업고 재빠르게 반공세력으로 변신해 독립운동세력을 무력화시켜놓고 이 나라의 주류로 등장했다. 친일파들이 정관계, 문화, 예술, 언론, 교육,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주류로 행세했고, 인맥과 후예들을 길러 철옹성같이 굳건한 성벽을 쌓았다.


  엄밀히 말하면 8.15는 민족이 해방된 날이 아니라 친일파가 해방된 날이다. 일제를 주인으로 떠받들던 친일파 주구들이 제 주인을 벗어나 이 땅의 주인으로 우뚝 선 날이다.


 매일 일본 황실을 향해 머리를 굽실거리며 궁성요배를 하고, 황국신민의 서사를 소리 높여 외치며 민족 구성원을 전쟁터로 내몰던 일제 관리들이 해방 후에 이 나라 정관계의 요직을 차지했다.


 식민지 민족말살교육의 첨병이었던 훈도들이 모조리 교장이 되어 우리나라 일선교육의 책임자가 되었다. 민족을 배신하는데 앞장섰던 성직자들은 여전히 존경받는 성직 지도자로 군림했다.


 민족을 고문하고 학대했던 고등계 형사들과 순사들이 모조리 국립경찰의 간부가 되어 항일운동 세력을 탄압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많은 애국지사들이 친일 경찰들의 손에 다시금 구금되어야만 했다.


 항일운동자들을 토벌하던 황군장교들은 해방 후 ‘빨갱이’를 쳐부수는 국군장성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쿠데타로 군사정권의 주축이 되었다.


 이 땅 주류세력의 뿌리가 친일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히 이 나라는 친일파들의 낙원이라 부를 만하다.


 친일파들의 철옹성이 얼마나 견고한지 그 실례를 보자.


 지금 전국에는 친일파들의 동상, 공적비, 기념비, 송덕비 등이 숲을 이루고 있다. 그들이 키워놓은 후계세력들은 친일파들을 본받고 따르라고 각종 기념사업이 한창이다.


 이렇게 60년을 공들여 쌓아놓은 굳건한 친일의 토양 위에서 새로운 집권세력이 뒤늦게나마 잘못된 역사를 바로 세워보려고 칼을 빼들었지만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며 가로막는 친일세력의 벽에 부딪쳐서 절절 매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렇게 친일파가 단 한 사람도 처벌되지 않고 도리어 민족의 지도자로 둔갑하는 기상천외한 나라 – 참으로 하늘이 무섭고 역사가 두렵고 선열들의 호통소리가 들리지 아니한가?


 그래서 나 혼자라도 광복절 경축식은 국민기만이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3년 전에 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이란 책에서 ‘조문기는 알려진 명성에 비해 이념적으로나 조직적으로나 좌나 우에 연루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내게 명성이란 것은 당초에 없었으니 그 말만 뺀다면 정곡을 찌른 정확한 평가라고 생각된다.


 처음부터 내게는 이념도 사상도 조직도 없었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상태로 오직 민족만을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독불장군에다 좌충우돌까지 겹치는 바람에 내 지난 세월도 꽤나 거칠고 험난했다. 오늘 내가 살아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끔찍한 역경도 많이 체험했다.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 대열에 뛰어들다보니 철부지의 치기, 영웅심에다 큰 목표에 대한 사명감이 맞물리면서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든 탓일 게다. 나이 80이 된 오늘까지도 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내 생각 내 방식대로 사는 독불장군 그대로다. 그 길을 지켜온다는 게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지난날에 후회는 없다.


 서툰 내 글 솜씨가 이런 내 진솔한 민족애를 얼마나 담아낼지는 모르지만 내 생애의 대부분이 역사와 끈이 닿아 있다보니 행여 역사 한 구석이라도 더럽히면 어쩌나 걱정을 하면서 이 책을 내가 민족에게 바치는 마지막 정성이라 생각하고 역사 한 구석에 조용히 세워놓고 민족의 품속에 안겨 눈 감고 싶다.


목 차


화보


서문_17


1. 어린 시절_23


외가 생활_28 태극기 사건_31 송병준 왕국_38 조선어 금지령과 창씨개명_41 경성사범학교 입학 시험_42


2. 일본으로 가다_47


일본행_47 훈련공 생활_50 운명의 동지 유만수_53 관동학살의 주범 박춘금_56 일본강관(日本鋼管) 파업 사건_58 오시로 구미(組) 사건_62 담력 훈련_69 뜨내기 생활_74 귀국_81


3. 다시 조국 땅에서_85


강윤국 동지_89 대한애국청년당 결성_92


4. 부민관 폭파 사건_95


박춘금과 대의당_95 시한폭탄 제작_102 부민관 거사_105 야목리 동지들_109


5. 해방 공간에서_114


박춘금을 찾아가다_118 여운형 선생을 만나다_122 금괴 사건_124 애처로운 별 애청_128 정치미아의 좌충우돌_131 어머니 불효자를 용서하소서_138 수양 어머니_141 계룡산 조도령_144 사설 군단조직(私設軍團組織) – 영웅본색_154 서대문 교도소 특별동_167 출옥과 방황, 거듭되는 연행_174 성시백 사건_180


6. 민족상잔의 비극에서_185


피 말리는 갈등과 번민_185 북조선노동당 농림성 간부가 되다_188 지도 안 한 지도위원_193 막다른 길에서_200 위기탈출_204


7. 유랑 배우 생활_215


주연 배우 남일성_215 여배우 김인옥(金仁玉)_226 떠돌이 극단 생활_234 백전교와 극단 수도_239


8. 다시 현실로 돌아오다_243


대통령 암살, 정부전복음모사건_243 노총각의 전격 결혼_254 이종률 교수와 민민청 사건_260 다시 서울행_266 거지 세 식구와 철녀 아내_271 불쌍한 딸 정화야_278 유만수 동지를 이대로 보낼 수 없다_282


9. 친일청산은 오늘의 독립운동_287


포상 받아야 하나_287 광복회 독립정신 홍보위원회_292 공적 심사_302 전과자에게 농락당한 부민관폭탄사건_307 야인시대와 김두한의 뻔뻔한 거짓말_314 친일파는 다 죽었는데 무슨 청산이야?_324 박기서 동지의 안두희 응징_323 민족문제연구소-친일청산이 오늘의 독립운동이다_329 생존 독립운동자 제현에게_337


 


<회고록 출판기념회 언론보도: 오마이뉴스, 05.03.25>








































조문기 선생 “죽는 날까지 민족 끌어안겠다”


[현장] 25일 독립운동가 조문기 회고록 <슬픈 조국의 노래> 출판기념회



 


  이민우(siminpower) 기자




















▲ 부인 장영심 여사와 함께 꽃다발과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조문기 선생.



ⓒ2005 이민우



일제 강점기 마지막 의열 투쟁인 부민관 폭파 사건의 주인공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의 회고록 <슬픈 조국의 노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25일 오후 6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이날 출판기념회는 황갑수, 윤규섭, 윤석진 선생 등 여러 독립운동가와 정철용 반민특위 조사관을 비롯해 리영희 전 한양대학교 교수, 이기형 민족시인,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등 각계 인사 16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 한상범 교수는 “조문기 선생은 이 시대의 의인이 가는 외길을 걸어오면서 우리가 못한 일들을 해오신 분”이라고 말했다.



ⓒ2005 이민우


이날 기념회에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던 한상범 전 민족문제연구소장은 축사를 통해 “조문기 이사장님은 누구보다 소박하고 솔직하며 겨레에 대한 사랑이 자연스레 풍겨져 나오는 분”이라며 “이 분의 발자취를 일부나마 알 수 있는 책이 나온 걸 기쁘게 생각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올해는 을사늑약 100년이 되는 해인데, 친일파와 그 아류들은 이젠 파렴치하게 오히려 친일이 무슨 잘못이냐는 망발까지 하는 판국에 이르렀습니다. 이건 친일청산을 잘못했고, 역사교육도 제대로 못한 안타까운 현실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모아 친일파를 청산하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임헌영 민족민제연구소장은 “조문기 선생께서 만년에 더욱 굳건하시길 바란다”고 말문을 연 뒤, “선생께선 아직 해방이 안됐기에 정부기념 행사엔 전혀 참석하지 않으시지만 올해엔 친일파 청산이 다돼 정부 공식행사에 참가하시는 날이 오시도록 힘을 모으자”고 강조했다.

리영희 교수 “일본의 독도 야욕 뒤엔 미국 있다는 걸 깨달아야”


















▲ 리영희 교수는 “일본이 다시 패권을 잡으려는 구상에는 국내의 숙청되지 않은 친일 집단들이 협동하고 있는 추세”라고 과거청산의 중요성을 경고 했다.



ⓒ2005 이민우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는 “사실 이 자리에서 축사를 해달라는 말을 극구 사양했었다”며 “그 이유는 조문기 선생의 거사가 있던 당시에 아무런 역사적 의식도 없이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거사 다음날 제가 부민관 앞을 지난 적이 있습니다. 대의당 박춘금이 뭘 한다는 큰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는데, 순사들이 길을 막고 시청 옆으로 돌아가게 하는 겁니다. 큰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전 아무런 민족적 의식도 없었기에 그 때를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리 교수는 이어 “지금 우리가 조 선생님의 정신을 잘 이어받고 살아가지 않으면 앞으로 한반도 정세가 러일전쟁 때로 돌아가지 않을까 우려된다”며 “일본이 독도와 중국의 조어도 등의 영토문제를 들고 나오는 야욕의 뒤엔 미국이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남한국민이 하나님처럼 존중하고 사랑하는 미국이 일본의 배후입니다. 마치 1905년 영국이 일본을 앞세워 러시아와 중국을 공략하게 하고, 더 나아가 동남아를 장악하게 했던 흉계의 2판이 시작된 것입니다. 조 선생의 정신을 가슴에 새기고 앞으로 전개될 가공할 사태에 대한 인식을 똑바로 해야 할 것입니다.”

함세웅 신부 “늘 불의에 맞서 정의를 말씀하시는 스승”

이어 민족문제연구소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던 이돈명 변호사의 축사와 함세웅(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신부의 축사가 계속됐다.


















▲ 조문기 선생은 “초등학생 같은 솜씨의 글을 다듬어 책을 만들어 준 권남경 작가에서 정말 고맙다”며 꽃다발을 전했다.



ⓒ2005 이민우


이돈명 변호사는 “처음 김봉우 선생이 찾아와 이사장을 맡아달라고 하길래 난 창씨개명을 했던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사양하다 맡게 되었다”며 “그 뒤 조문기 선생께서 연구소를 찾아오셨고, 이사장을 역임하시며 일을 더 빛나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함세웅 신부는 “조문기 선생님은 뵐 때마다 저보다 젊음을 간직하고 계신데, 늘 불의에 맞서 정의를 말씀하시는 스승”이라 말한 뒤, “최근 독도 문제가 불거진 건 오히려 우리 민족이 깨어나게 하고, 과거청산법 제정과 국가보안법 폐지로 발전되어 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축사에 이어 장사익씨가 ‘찔레꽃’을 비롯한 우리 노래를 열창하자 행사장의 분위기는 한결 달아올랐고, ‘아리랑’은 각계인사들이 손뼉 치며 함께 부르기도 했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 땅에도 또다시 봄이 온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오….”


조문기 이사장 “죽는 날까지 민족 끌어안고 살다 죽겠다”


















▲ 답사를 마친 뒤 조문기 이사장은 부인 장영심 여사와 함께 출판기념회를 기념하는 커다란 백설기를 칼로 잘랐다. 백설기 위엔 출판기념회에 대한 축하의 글이 아니라 “친일파 청산”이란 글귀가 콩으로 새겨져 있었다.



ⓒ2005 이민우


끝으로 답례를 한 조문기 이사장은 “제가 뭘 했다고 여러 어른들의 대접을 받고, 이런 호강을 해도 되나 모르겠다”며 “정말 조국을 위해 계셔야 할 분들이 이 자리에 다 모이셨는데, 제가 죄인이 된 심정”이라며 말했다.

“우선 제가 사과할 게 있습니다. 제가 글을 쓴 뒤 원고를 연구소 사무실에 주면서 ‘슬픈 조국의 노래’라고 제목을 했습니다. 사무실에 똑똑한 사람들 많으니까 더 좋은 이름 좀 만들어 보라고 했는데 그걸 건드리지도 않았어요. 뭐 그게 제 이미지랑 맞는답니다. 그래서 제목이 그대로 나왔는데, 마치 저 혼자 조국 위해 평생 고통받고 산 것처럼 감히 민족의 이름으로 책을 내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조문기 이사장은 또한 “연구소 직원들은 일에 미친 사람들 같이 밤낮없이 정신없이 사는 사람들인데 거기다 놓고 책을 낸다 하니 매달려 역사적 검증도 하곤 했다”며 “애써준 연구소 직원과 출판기념회를 만들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린다”며 힘주어 다짐했다.

“앞으로 여러분의 따뜻한 마음을 잊지 않고 죽는 날까지 민족을 끌어안고 살다 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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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기 이사장 “민족 끌어안고 살다 죽겠다”








이 기사는 인터넷 신문 [참말로](www.chammalo.com)에도 보냈습니다.













2005/03/26 오후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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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우 기자는 “의지가 강한 자 앞에서는 운명도 길을 비킨다!”는 말을 좋아하며, 권력과 자본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에 힘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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