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인복이 많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올해 3·1절에 <일제강점기 인명록I-진주지역
관공리·유력자>라는 저서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했는데, 필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많은 지인들이 나서서 출판기념회를 열어주었다. 모두에게
너무나 큰 은혜를 입었다. 더구나 지난 1일 진주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는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이 먼 길을 찾아와 직접 필자의 작업을
격려해주었으며, 평소 필자가 존경하는 김장하 선생 등 많은 분께서도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었다.
현재 필자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편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펴낸 이유도 <친일인명사전>이란 민족적 과업을 완수하는데 조그마한
보탬이 되고자 하는데 있었다.
반민족행위에 대한 진상규명
이 책에 수록된 명단이
3387명이나 된 것은 일제강점기에 진주에서 활동했던 관공리와 유력자를 총망라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는데
유용할 사초로 쓰이길 바란다. 그런데 한 가지 강조할 점은 이 인명록에 실린 모든 이들을 친일파로 규정할 수 없지만 반민족행위에 대한
진상규명이란 측면에서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편 이 책을 집필하면서 종종 필자는 프랑스의 민족반역자 처단작업과
비교해보고 참담함을 감추지 못했다. 프랑스는 2차세계대전 때 독일에 점령돼 4년 정도 나치의 지배를 받았다. 우리가 일제의 침략으로 지배받은
이른바 ‘36년’의 기간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프랑스의 민족반역자에 대한 처단작업은 우리나라에 비해 상상을 초월했다. 프랑스의
나치부역자 체포는 150만 명을 넘어 200만 명까지 육박했을 정도로 철저하게 반민족자를 청소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일본이나
독일처럼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군에게 점령되어 해방 후에도 외세의 통치를 3년이나 더 받았다. 더구나 그 이후 민족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야기된 동족상잔의 고통은 일제 36년 간의 아픈 기억을 완전히 능가할 정도가 됐다.
미군정은 일제의 관공리와
부역자들을 ‘빨갱이 사냥’이란 명목으로 재등용시킴으로써 사실상 이들 부역자를 처단할 기회를 없애버리는 한편 이들 친일세력이 부활할 토대마저
마련해 주고 말았다.
출판기념회에서 희망을 보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 정권의 방해공작과
친일경찰의 노골적인 저항으로 반민특위가 습격되고 와해되면서 특별재판부에서 종결된 건수는 겨우 38건에 불과하며 이중 징역형 등 인신구속적인
신체형이 선고된 것은 고작 12건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국전쟁 전에 모두 감형되어 모조리 석방됨으로써 결국 반민법에 의해 제대로 처단된
반민족행위자는 단 1명도 없게 됐다. 아무리 민족정기가 훼손되었다고 해도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러한 울분이 필자로 하여금
방대한 일제강점기 인명록을 완성시킬 수 있는 추동력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정으로 필자에게 원천적인 힘이 되어 준 것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예산이 국회에서 전액 삭감되었을 때 국민들이 보여준 감동적인 성금이었으며, 필자의 출판기념회를 마련해주고 빛내주신
모든 분들의 성원과 격려였다고 생각한다. 조국을 스스로 해방시키지 못한 대가는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올곧은 희망은 여전히
남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튼 분에 넘치게 많은 분들이 출판기념회를 빛내주셨지만 특히 세 분의 지인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출판기념회를 최초로 구상하고 행사 일에 사회까지 멋지게 보아준 진주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국장 하정구 씨를 비롯해 창원과 진주를
오가며 행사를 준비한 브레인 대표 이인안 씨와 바쁜 신문사 일에도 기꺼이 잡다한 실무를 맡은 진주신문 편집부장 서성룡 씨에게 정말 감사를
드린다.
이밖에도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출판의 기쁨을 함께 나눔으로써 필자에게 오랫동안 소중한 기억을 남겨준 일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들의 성원과 격려는 반드시 <친일인명사전>으로 보답될 것으로
믿는다.
/김경현(경남근현대사연구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