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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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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송성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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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국광복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 가! 나 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우리는 한국광복군 악마의 원수 쳐 물리자 나 가! 나 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진주 우리나라 지옥이 되어 모두 도탄에서 헤매고 있다 동포는 기다린다 어서가자 고향에
한국광복군 제2지대 부위(중위) 송석형. 당신이 자주 부르시던 ‘압록강 행진곡’은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지난 7월 22일, 향년 86세로 돌아가셨다.
‘애국지사 송석형’은 내 둘째 큰아버지이시다. 당신이 돌아가시자 <한겨레>를 비롯해 조중동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일간지에 부고장이 실렸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거의 똑같은 기사문이 실려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 광복군으로 활동했던 항일 애국지사 송석형 선생이 22일 오전 7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6세. 충남 대전 출생인 선생은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해 중국과 동남아 등지에서 대일 반격작전을 전개하고 있던 미국첩보기관 OSS(전략사무국. 중앙정보국의 전신) 훈련반에서 3개월간 군수특수훈련 무기반 교육을 수료하고 간부대원으로 임명돼 활동했다. 1945년 국내정진군 제2지구 충청도반에서 국내침투공작을 계획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정부는 선생에게 건국포장(1977년), 건국훈장 애국장(1990년)을 각각 수여했다.’<한겨레> 신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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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군 제2지대 부대원 증명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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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송성영 |
하지만 모든 신문들은 ‘애국지사 송석형’의 항일투쟁 경력에서 중요한 부분을 빠뜨리고 있었다. 내가 평소 둘째 큰아버지로 부터 들어 알고 있는 항일투쟁은 한국광복군 입대 그 이전부터 시작됐다. 광복군에 입대하기 전에 중국 ‘신사군(新四軍)’에 입대해 일본군과 맞서 싸웠던 것이다.
광복군에 입대해서는 일본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벌였던 일은 없었지만 신사군에 입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일본군과 맞서 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당신 스스로도 평소 신사군에 몸 담았던 사실을 대외적으로 밝히길 꺼려했다. 신사군은 바로 팔로군과 함께 항일투쟁을 벌였던 중국 공산당이었고, 남한 땅에서는 어떤 경우든 간에 ‘공산당’에 몸 담았다는 것은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보기 때문이었다.
나는 둘째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해 전, 집안의 역사를 정리하기 위해 녹취를 해놓았는데 광복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그 생애는 그야말로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당신께서는 1938년, 스무 살의 젊은 혈기로 홀연 단신 중국으로 향했다. 봉천에서 신의주로 신의주에서 산해관을 거쳐 북경으로 들어갔다. 중국 북경에는 이미 큰아버지께서 건너가 있었다. 고향에서 유도 실력이 만만치 않았던 큰아버지께서는 시비가 붙은 일본 사람을 단숨에 때려눕히고 도주하듯 중국으로 떠났다고 한다(중국으로 건너간 큰아버지는 사회주의 사상에 매료돼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와 인민위원장을 지낸다).
당시 북경은 이미 1937년부터 시작된 중일 전쟁으로 일본군에게 점령된 상태였다. 하지만 스무 살 조선청년에게는 중국은 어수선하고 넓은 나라였을 뿐이었다.
“막막하더구만, 처음에는 형님이 있던 양복점에서 일했는데, 적성에 맞지 않았어. 1년도 채 안돼 그만뒀지.”
큰아버지의 양복점에서 나온 둘째 큰아버지께서는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막일을 하다가 북경에서 여관을 운영하는 할아버지의 친구 분을 찾아갔다. 거기서 적당한 일거리를 찾을 때까지 임시로 잔일을 거들어 주기로 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둘째 큰아버지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중국군 해군장교를 만나게 된다.
“그 분이 조선 사람이었는데, 나 보구 그러더구만. 왜 이렇게 지내냐구. 돈을 벌기 위해 일한다고 했지. 그랬더니, 나라가 없는데 돈은 벌어 무엇하냐며 호통을 치더라구.”
하지만 자신을 동생처럼 살갑게 대해주던 그 조선인 중국장교는 어느날 여관에서 총을 맞은 시체로 발견됐다. 이씨라는 성만을 기억하는 그 조선인 중국군 장교가 무엇 때문에 죽음을 당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일본 고등계 형사에게 당했다는 뒷소문만 들었을 뿐이었다.
‘젊은 놈이 나라가 없는데 돈을 벌어 무엇 하겠느냐, 중국 군대라도 들어가 일본군과 싸우라’는 그 조선인 중국군 장교의 말이 며칠 동안 조선인 청년,‘송석형’을 괴롭혔다. 그 당시 조선민족전선연맹에서는 투쟁 강령 제 5항 ‘중국 항일전재에 참가 한다’는 규정에 따라 ‘조선의용대’가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의 도움을 받아 중국의 군사작전에 참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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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과 함께. 맨 아래 앉은 줄, 왼쪽 첫번째 송석형 대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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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송성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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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큰아버지는 여관을 나와 무작정 독립군이 있다는 천진 쪽으로 향했다. 조선청년들이 목숨 걸고 싸우는데 여관에서 돈 몇 푼 벌겠다고 일본 놈들 비위나 맞추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천진에 도착하기도 전에 일본군 수비대에 붙잡히고 말았다.
“자전거로 순찰을 돌던 놈이 너 스파이 아니냐며 마구잡이로 끌고 가면서 이 놈이 유도로 넘기려고 하더구만. 자기보다 체격이 큰 내가 넘어 가겠어. 잘 안되니까 그 놈이 철모로 내 머리를 후려치는데 지독히 아프더군. 그래서 바닥에 주저앉아 수없이 발길질을 당했지. 그리고 거기서 끝난 게 아녀. 수비대에서 헌병대로 넘겨져 또다시 죽도록 얻어맞았어. 계속 얻어맞으면서도 농사짓다가 힘들고 해서 돈벌러 왔다고만 되풀이 했지. 거기서 다시 천진에 있는 일본군 지서로 넘어갔어. 고등계 형사 놈들이 거짓말 하면 죽는다고 윽박지르며, 중국 팔로군들을 잡아놓고 고문하는 모습을 보여주더군. 말도마, 끔직했어. 사람을 뒤로 묶어 공중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후려 패는데….”
목불인견이었다. 깡마르고 날카롭게 생긴 고등계 형사에게 잘못하면 살아 돌아갈 수 없다는 살기를 느끼고 순박한 농사꾼처럼 굴면서 집에 돌아가 농사나 지을 테니 살려 달라고 빌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얻어맞아도 농사꾼만 되풀이 하니까, 그 지독한 놈들이 순진하게 봤는지 인정해 주더군, 그 길로 다시 북경으로 돌아왔지, 거기서 일본 놈들한테 이를 갈고 있는 몇몇 조선 청년들을 만났지.”
그들과 의기투합하여 당시 일본군과 중국군의 접경지인 신양 쪽으로 향했다. 일본 놈들의 고문은 조선 청년, ‘송석형’의 젊은 혈기에 불을 붙였던 것이다. 몇몇 동지들과 입대한 부대는 한창 일본군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중국군, 중국군들은 환영했지만 손에 쥐어지는 것은 총 한 자루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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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SS 가입 당시 제출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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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송성영 |
둘째 큰아버지가 소속된 중국군 부대는 신사군이었는데 이렇다 할 훈련을 받을 겨를도 없이 전선에 투입됐다. 총을 쏠 줄만 알면 그만이었다. 당시 일본군과 맞선 전투를 치르면서 목숨을 잃을 뻔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교전 중에 대포만 쏘면 달아나고, 일본 놈들 화력에 당해낼 재간이 없었지. 내 목숨을 구해 줬던 중국 사람이 있었는데 의리가 있던 사람이었어. 스물 갓 넘은 신양사람인데, 일본군과 한창 교전을 벌이다가 내가 고립된 적이 있었지. 그때 나한테 ‘꺼거!(형님) 꺼거! 죽으면 안돼’ 하며 그 사람이 뛰어들어 엄호 사격을 해주는 바람에 살아난 적이 있지.”
신사군이 한창 일본군에게 밀리고 있던 중에 광복군 연락책이 찾아왔다. 신사군에 조선인들이 참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던 것이다. 1940년 9월, 이미 광복군이 창설되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광복군 관련 기록에 의하면 그 해 임시 정부에서는 이청천 장군을 광복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서안에 사령부를 둔다. 그리고 제 1지대를 산서방면에 배치하고 제 2지대를 수원으로, 제3지대를 산동으로, 나월환 등의 한국청년 전지공작대를 광복군으로 개편하여 제5지대를 삼았다. 하지만 부대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당시 광복군은 중국 각지의 중국군에 편입되었던 둘째 큰아버지 같은 조선청년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사군에서 나온 둘째 큰아버지는 강태공이 시와 낚시를 즐겼다는 낙양을 거쳐 서안으로 들어갔다. 광복군 제2지대는 서안에서 40여리 떨어진 두곡에 있었다. 제 2지대에는 이미 이범석 장군을 진두로 200여 명의 동지들이 훈련을 받고 있었다.
거기서 둘째 큰아버지는 적 후방에 침투 인력과 물력을 쟁취하고 파괴공작 훈련을 받고 미군과 합작하여 본격적인 테러훈련을 받기에 이른다. 당시 미군이 광복군에게 관심을 쏟게 된 큰 사건이 있었다. 광복군이 설립될 당시, 일본군에 강제징집 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했다가 탈출한 청년 장준하를 비롯한 50여명의 조선청년들이 광복군에 들어왔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일본 교육을 받아온 그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했다는 사실은 당시 조선인들은 물론이고 중국인들과 서양 기자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이것이 연합군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미국의 OSS(미국전략사무국)를 주관하는 사전트는 광복군 제 2지대장 이범석과 합작하여 서안에서, 윔스 중위는 제3지대장 김학규와 부양에서 광복군에게 비밀 훈련을 실시하기에 이른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당시 OSS훈련장을 다녀와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훈련 받은 학생들의 실지의 공작을 시험하기로 하여 두곡에서 동남으로 40리, 옛날 한시에 유명한 종남산으로 자동차를 몰았다. 동구에서 차를 버리고 5리쯤 걸어가면 한 고찰이 있는데 이곳이 우리 청년들이 훈련을 받는 비밀훈련소였다. 여기서 미국군대식으로 오찬을 먹고 참외와 수박을 먹었다.’(둘째 큰아버지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김구 선생이 참외를 먹고 싶어 구경만 하던 중국 아이들에게 ‘나도 이럴 때가 있었다’며 먹고 있던 참외를 전부 안겨주었다고 합니다 -필자 주)
백범일지에서는 OSS대원들의 자질과 훈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첫째로 본 것은 심리학적으로 모험에 능한자, 슬기가 있어서 정탐에 능한자, 눈과 귀가 밝아서 우선 전신에 능한자를 고르는 것이었다. 이 시험을 한 심리학자는 한국청년이 용기나 지능으로나 다 우량하여서 장래의 희망이 많다고 결론하였다. 다음에는 청년 입곱을 뽑아서 한 사람에게 숙마(삼껍질로 만든)바 하나씩을 주고 수백 길이나 되는 절벽 밑에 내려가서 나뭇잎 하나씩을 따가지고 오라는 시험이었다.
일곱 청년은 잠깐 모여서 의논하더니, 그들의 숙마바를 만들어 한 끝을 바위에 매고 그 줄을 붙들고 일곱이 다 내려가서 나뭇잎 하나씩을 따 입에 물고 다시 그 줄에 달려 일곱이 차례 차례로 다 올라왔다. 시험관은 이것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중국학생 4백 명을 모아놓고 시켰건만 그들이 해결치 못한 문제를 한국 청년 일곱이 훌륭하게 하였소. 참으로 한국 사람은 전도유망한 국민이오”
일곱 청년이 이 칭찬을 받을 때 나는 대단히 기뻤다. 다음에는 폭파술, 사격술, 비밀히 강을 건너는 재주 같은 것을 시험하여 다 좋은 성적을 얻은 것을 보고 나는 만족하여 그날로 두곡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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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이 광복군 송석형 대원, 180센티에 가까운 큰 키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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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송성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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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큰아버지의 체구는 키 큰 코쟁이들 이상이었다. OSS훈련장을 찾은 김구 선생은 둘째 큰아버지의 180센티미터에 가까운 훤칠한 체구를 보고 크게 만족했다고 한다. 김구 선생이 다녀간 며칠 후 둘째 큰아버지와 동지들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일본천황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한동안 모든 동지들이 감격에 휩싸였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비밀리에 고국으로 들어가 일본 놈들 시설을 파괴하고 점령한 후에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도 했는데, 왜놈들이 항복했으니, 당시 나는 일곱 명이 1개조로 충청도로 침투하기로 돼 있었지. 그때 우리는 준비만 했지, 참전하지도 못했으니 조국의 장래가 문제였어, 국제적으로 발언권이 있겠어, 뭐가 있겠어?”
백범일지에서는 그 후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서안에서 준비되고 있던 나를 위한 모든 환영회를 사퇴하고 즉시 두곡으로 돌아왔다. 와보니 우리 광복군은 제 임무를 다 하지 못하고 전쟁이 끝난 것을 실망하여 침울한 분위기에 잠겨 있는데 미군 교관들과 군인들은 질서를 잊을 만큼 기뻐 뛰고 있었다. 미국이 우리 광복군 수천명을 수용할 병사를 건축하려고 일변 종남산에서 벽돌을 실어 나르던 것도 이날부터 일제히 중지하고 말았다.’
해방 다음해인 1946년 5월 말 조국 땅을 밟을 수 있었지만, 광복군은 전쟁이 끝났다는 명목 하에 미군으로부터 무장해제 당했다. 광복군들은 울분을 삼켜야 했다. 조국을 수호해야 할 군인이 아닌 민간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인천으로 들어오는데 콜레라가 발생해 부산으로 옮겼어, 그런데 부산에서도 콜라레가 발생했다더군, 디디틴가 뭔가를 하얗게 바르고 다시 인천항으로 돌아왔지.”
속 깊은 할머니께서는 둘째 아들이 거의 8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석형이가 살아 돌아왔구나, 석형이가 살아 돌아왔어.”
할머니는 내내 그 말만 되풀이 하셨다고 한다. 둘째 큰아버지가 광복군에 가담한 후 일본 고등계 형사들이 집안을 수없이 들락거렸을 때도 당당하셨다고 한다. 고등계 형사들은 시도 때도 없이 한밤중에도 예고 없이 방문을 열어젖히고 쳐들어왔다.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할머니는 차라리 고등계 형사들이 자주 찾아오길 기대했었다고 한다. 그들이 찾아오면 적어도 당신의 둘째 아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민족전쟁 이후에도 할머니는 똑같은 시련을 겪게 된다. 이번에는 인민위원장을 지냈던 큰아버지 때문이었다. 그때도 역시 일제에 빌붙어 먹던 고등계 형사 출신들이 방문을 벌컥 벌컥 열어젖히곤 했다고 한다).
해방 후 주변에서 한국군(당시 국방경비대)에 입대할 것을 권했지만 둘째 큰아버지는 거절했다.
“동지들 얘기를 들어보니 국방 경비대라는 것이 반은 왜놈 말을 쓰는 순전히 일본놈식 군대라 하더군. 그런 데를 어떻게 들어가겠어. 광복군 동지들 중에서 몇몇은 국방경비대에 들어갔다가 얼마 못 있고 뛰쳐나오기 일쑤였지.”
구더기처럼 일제에 빌붙어 배를 채우던 자들과 미군이 판치는 세상이 아니었다면 둘째 큰아버지께서는 군에서 일생을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6·25 민족전쟁때 인민군의 폭격에 첫 아이를 잃은 분노로 잠시 우익에 몸 담은 것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정치판을 기웃거린 적이 없었다.
어려서 부터 나는 종종 둘째 아버지께서 술에 취해 부르는 군가를 듣곤 했다. 당당한 군가였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딘가 모르게 서러움이 배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그것은 광복군들의 노래였었다.
총 어깨 매고 피 가슴에 뛴다 우리는 큰 뜻 품은 한국의 혁명청년들 민족의 자유를 쟁취하려고 원수 왜놈 때려 부쉬려 희생적 결심을 굳게 먹은 한국광복군 제2지대 앞으로 끝까지 전진 앞으로 끝까지 전진 조국 독립을 위하여 우리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이 노래를 부르며 왜놈들 때려잡겠다던 광복군 동지들은 6·25민족전쟁 때 남북으로 갈려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다. 둘째 큰아버지 역시 마찬가지 였다. 광복군의 노래는 여전히 치욕의 세월 속에서 갈라진 동지, 갈라진 산하에 불러도 힘 없는 노래로 떠돌고 있다.
둘째 큰아버지는 그 노래를 함께 부르고 싶어 했다. 진정으로 해방된 조국에서 옛 동지들과 함께 불러보고 싶다던 그 노래, 하지만 북한에 있는 동지들과 함께 그 광복군의 노래를 다시 불러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당신에게는 당신이 못 다한 노래만큼이나 못 다한 얘기가 남아 있다. 중국 신사군에 입대하여 일본군과 맞서 전투를 벌였던 일이다. 내가 둘째 큰아버지에게로부터 전해들은 얘기는 아주 짧다. 중국 신사군에서 활동했던 얘기를 좀 더 자세히 묻기라도 하면 말문을 닫으셨다.
둘째 큰아버지는 3남 3녀를 두셨다. 하지만 그들조차 자신의 아버지가 공산당이었던 신사군에서 일본군과 사선을 넘어가며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다. 광복군이기 전에 일본군에 맞서 목숨을 걸고 전투를 벌였던 공산당 소속의 신사군 송석형, 항일 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움을 벌였던 그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투쟁의 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자식들에게 조차 알리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신사군이 항일 투쟁군이기 이전에 공산당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산당에 몸담고 전투를 벌였다는 경력 때문에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염려 했던 것이었다. 자신의 신상도 신상이지만 부모 형제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항일투쟁을 가장 치열하게 전개 했음에도 불구하고 애국자는 고사하고 사회주의자, 공산당이라는 경력 하나만으로도 죽임을 당하고, 본인 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가 불이익을 당해야 했던 남한 땅의 역사, 둘째 큰아버지께서는 그 뒤틀린 역사 속에서 숨죽이고 있다가 당신이 광복군에 입대하기 전에 신사군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다는 사실을 밝힌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 였다.
미군을 등에 업은 일제 앞잡이들이 무지막지한 권력을 휘둘려 대고 일본군 장교 출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남한 땅에서 자신의 공산당 경력 때문에 부모 형제들이 고초를 당할까봐,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설령 공산당이 아니었더라도 공산당으로 둔갑시켜 무조건 때려잡았던 그 시절이 아니었던가.
당신이 돌아가신 지금, 그 비뚤어진 역사는 여전히 바로 잡히지 않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광복군 제2지대 부위(중위) 송석형’은 미군들로부터 무장해제 당하고부터 줄곤 자유롭지 못했다. 당당하게 밝혀야 할 공산당으로서의 항일투쟁사를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떠나셨다.
둘째 큰아버지께서는 그나마 광복군으로서 항일투사로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남한 땅에서 항일투사로 인정받지 못하는 ‘공산당 항일투사’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평생 김구 선생을 존경했던 ‘한국광복군 제2지대 부위(중위) 송석형’은 살아생전 그렇게 말했다.
“남북이 갈라서 있는 한 조국은 해방된 것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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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모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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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송성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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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군’이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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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군 (新四軍, New Fourth Amy)
1938년에 중국의 국공합작(國共合作) 이후 편성된 중국공산당 지휘 아래 있던 군부대. 형식적으로는 중국 국민정부군 편제에 속해 있었으나, 조직은 중국공산당의 주력군이었다.
1938년 국민정부의 지시에 따라 후난(湖南)·장시(江西)·푸젠(福建)·광둥(廣東)·저장(浙江)·후베이(湖北)·허난(河南)·안후이(安徽) 등 8개 성의 홍군(紅軍) 유격대를 규합하여 ‘신편제4군(新編第四軍)’이라는 부대명(약칭 신사군)으로 난창(南昌)에서 편성했다.
모두 1만여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군장(軍長)에는 예팅(葉挻), 부군장에 샹잉(項英)을 임명했다. 그후 신사군은 각 활동지역에 따라 4개 지대(支隊)로 편성되어 주로 양쯔강(揚子江) 남부에서 유격전을 벌이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40년에 병력이 10만에 이르면서 공산당 세력이 급속히 팽창하자, 국민정부는 신사군에게 황허강(黃河江) 이북 지역으로 이동하여 항일투쟁에 임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신사군 장난(江南) 부대 1만여 명은 명령에 불복하고 1941년 초 환난(晥南)에서 상하이(上海)·항저우(杭州)의 국민정부군 지역으로 진입할 태세를 갖추었다.
이에 국민정부군은 7만 병력을 동원하여 항명(抗命) 반란을 일으킨 이들 신사군을 공격하여, 예팅을 포로로 잡고 샹잉을 사살한 후 신사군의 해체를 명령했다.
그러나 중공의 마오쩌둥(毛澤東)은 이 명령을 무시하고 천이(陳毅)를 신사군 군장으로, 류샤오치(劉少奇)를 정치위원으로 임명하여 신사군을 개편하고 잔류부대를 계속 지휘·활동하게 했다. 1946년 신사군을 바탕으로 화둥(華東] 야전군이 편성되었고, 화둥야전군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제3야전군으로 재편되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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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30 09:54 ⓒ 2005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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