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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 인물과 사상’ 지승호 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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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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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9일 친일인명사전수록 예정 인물 1차 명단이 발표되었다. 이 명단에는 조선일보동아일보의 전 사주를 비롯해서 주요 명문 대학의 설립자, 널리 알려진 예술가, 전직 대통령까지 포함되어서 큰 파문이 일었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윤경로 위원장은 ‘선정 기준을 정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면서 ‘정치적인 의도가 있지 않느냐’는 일각의 의구심에 대해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관련해서 1원 한 푼 받은 일이 없다’며 그 주장을 일축했다. 윤 위원장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대해 “어떤 개인을 단죄하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 사실에 대한 정리와 역사적 평가를 통해 사회의 가치 기준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후대에 역사의 교훈으로 남기기 위해서는 일시적인 충격이 있더라도 과거에 명백히 존재했던 역사적 사실들은 반드시 기록되고 평가되어야 하며, 기억되어야 마땅하다”고 말하면서 ‘친일인명사전 간행은 일종의 고백과 반성을 통한 화해가 목적’임을 강조했다. 진정한 자부심은 문제점을 덮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극복할 때 생기는 것일 게다. 일제 시대에 만들어진 악습들이 전통이 되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듯이, 진심으로 고백하고 사과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다시 한 세대를 넘어간다면 한국은 정말 살고 싶지 않은 나라가 될지도 모른다. 인터뷰는 9월 1일 오후 윤경로 위원장이 재직하고 있는 한성대 총장실에서 약 1시간 반 정도에 걸쳐 이루어졌다. 특정 인물이 아니라 범주가 선정기준 지승호(이하 지) – 지난 8월 29일 3,090명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 인물 1차 명단이 발표되었는데요. 그 명단에는 전직 대통령, 조선일보동아일보의 전 사주, 명문 사학의 설립자, 유명 예술가 등이 포함되어서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선정된 쪽에서는 ‘선정 기준이 뭐냐? 공과를 같이 평가해야 된다’고 반발하고 있지 않습니까? 윤경로(이하 윤) – 이 작업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선정 기준을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 선정 기준 문제를 놓고, 거의 2년여간 많은 토론과 협의를 거쳐서 최종적으로 합의했습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을 예단해 놓고 기준을 정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친일 인물이라고 할 때 어디까지를 친일 인물 내지는 부일협력자라고 할 것이냐’ 하는 것에 대한 개념 정의와 범주 그리고 선정 기준에 관해 많은 토론을 했습니다. 어떤 특정한 인물을 정해놓고 ‘미리 이 사람을 넣어야겠다’고 하는 선입관이나 편견을 갖고 선정 기준을 정한 게 아닙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이하 편찬위)가 무슨 권한을 가지고 그런 선정 기준을 정해서 이 사람들을 친일파로 규정했느냐’는 시비가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어떻게 해도 그런 시비는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서 ‘이 정도라면 국민적인 합의점에 이를 수 있다’고 해서 선정을 한 겁니다. 분야별 자세한 선정 기준이나 선정이 된 사람의 행적은 저희가 다 자료로 발표를 했구요. 지 – 1만 5,000여 명까지 될 것으로 봤던 명단이 3,000여 명까지 줄어들었는데요. 이러다가 나중에는 다 빼고 몇백 명만 남는 형식적인 명단이 될 우려 같은 건 없습니까? 윤 – 처음엔 ‘1만 명에서 1만 5,000명 정도 되지 않겠느냐’라고 예상했습니다. 예를 들면, 관료의 경우 일제 시대에 면장을 했던 사람들의 명단까지 다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면장 단위까지 친일부일협력자로 보는 것은 너무 아래로 내려가는 것 아니냐, 고등문관고등관이 군수 이상이 되니까 그 이상인 자들로 보는 것이 좋겠다, 하는 식의 얘기가 나와서 대상자가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는 많이 줄었죠. 그러니까 ‘이것을 아주 엄중하게 해야 되고, 좀 확대해서 해야 된다’는 입장에 선 사람들이 볼 때는 상당히 줄었다고 볼 수 있고, 또 과거에 ‘600~700명 정도로 제한해야 된다’는 입장에 선 사람들이 볼 때는 이번의 발표가 상당히 많은 걸로 보이는 그런 문제가 있죠. 그러나 이런 비판을 받았다고 해서 또 선정 기준을 바꿔 3,090명을 390명으로 줄인다든지 하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씀드리면, 이번에 우리가 최종적으로 선정 기준안을 만든 것은 더 이상 흔들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간 구체적인 인사들에 대해서 혹시 우리의 실수로 들어가지 않아야 할 분이 들어갔다든지, 혹시 우리의 실수로 빠진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첨가를 하거나 뺄 수는 있을지언정 이번에 만들어진 선정 기준은 절대 바꿀 수 없습니다. 그것은 위원장으로서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지 – 선정 기준을 명확히 해야 되는 부분들 때문에 구체적인 행위보다는 지위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니냐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위는 낮아도 더 악질적인 행위를 한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윤 – 사실은 그런 점이 이번 발표가 갖고 있는 한계점이라면 한계점인데요. 그것은 이 작업이 갖고 있는 어쩔 수 없는 한계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60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들의 구체적인 행위를 일일이 조사할 수 있는 사료적 근거가 부족합니다. 역사적 사료 없이 몇몇 사람의 증언이나, ‘누가 그랬더라’ 하는 것을 근거로 해서 명단에 넣을 수는 없거든요. 구체적으로 (일제 측에서 나온 자료라든지, 당시의 신문이나 잡지라든지 하는) 기술된 사료가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들의 구체적인 친일 행위 자체를 밝히는 것은 극히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우리가 친일부일협력자라고 했을 적에 일정한 지위 이상에 오른 사람들, 예를 들어서 일제 시대에 국민학교 교사 생활을 하다가 그걸 관두고 일본 황군의 장교로 자진해서 들어갔다고 하면 그 자체가 친일 행위가 아니냐는 겁니다. 또 일제 시대에서 경찰의 임무라는 것이 결국은 반일 민족운동항일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때려잡고 조사하고 심문하는 것이었는데, 일본에 대한 충성도 이런 것들이 감안되지 않고, 어떻게 그 사람이 군수가 될 수 있고, 도지사가 될 수 있고, 경찰 간부 같은 그런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겠느냐는 겁니다. 그 자체를 친일 행위로 봐서, 부일협력자로 보는 것이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는 판단에서 이번에 그렇게 기준을 정한 거죠. 지도자급의 친일행위를 중심으로 작성 지 – 인적 청산도 아니고, 진상규명과 역사적인 기록 정도의 의미를 담아보자는 거 아닙니까? 임지현 교수 같은 경우에는 “과거를 드러내고 사회적으로 기억하는 것, 특히 고백의 형태로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친일진상규명특별법처럼 이를 인적 청산의 문제로만 접근해선 안 된다”고 했는데요. 그렇게 일부 좌파들 중에서도 인적 청산의 문제로 보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윤 – 동아일보 좌담회에서 했던 얘기 같은데요. 우선 이것은 대상과 목표가 친일인명사전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거기에는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사전이라고 하는 것은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 친일인명이라는 말이 들어갔기 때문에 거기 등장하는 인물의 행적 중에 친일행적, 친일행위 등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그 다음에 이것이 인명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적인 면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구조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일제 식민지 시대가 갖고 있는 구조적인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합리화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것은 말하자면 이 사전이 갖고 있는 특성 때문에 그렇게 인적 청산과 같은 성격과 내용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지 – 냉정하게 따져보면 일제 시대에 저항을 하거나,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극소수 아니었습니까? ‘몇 사람을 친일파로 단죄하고, (독재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 면죄부를 주고, 특정한 계층한테만 책임을 지우는 방식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요. 윤 – 그 부분은 이렇습니다. 어느 시대나 일반 민중이나 서민들이, 말하자면 생계형 친일이라고 할까요. 살기 위해서 최소한의 친일을 한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지도자급에 있었다면 문제가 다르죠. 지도자라는 게 그래서 어려운 것 아닙니까? 지도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도덕성이 필요하고, 그 다음에 민족에 대한 책임의식 이런 것들이 중요시되는데, 그런 것을 제대로 하지 않고, 훼절을 하고, 변절을 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1차적으로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구요. 부연해 말씀드리면 이 작업이 궁극적으로 목적하는 바는 ‘역사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 당대에 자기 자신은 출세하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호의호식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역사적으로, 민족적으로 정당하지 못했을 때는 결국 역사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한번쯤은 역사적 교훈으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둘째, 저는 역사학자로서 누군가가 역사가 뭐냐고 묻는다면 저는 역사란 한마디로 고백하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칠 때 포커스가 어디에 맞춰져 있었냐 하면 자랑스러운 것, 그리고 저항의 역사, 그리고 우리 민족의 문제를 외세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어떻게 했고, 미국이 어떻게 했고, 소련이 어떻게 했고, 이런 식으로만 했는데, 사실은 우리 민족이 식민지화되고, 허물의 역사, 부끄러운 역사를 가진 이면에는 우리 민족 안에서의 문제도 있었던 게 아니냐는 겁니다. 이런 것을 한번쯤은 반성하고, 회개하고, 고백하자, 그런 큰 틀에서 이 문제를 바라봐줬으면 좋겠다는 당부를 드리고 싶어요. 지 – 민족문제연구소 쪽의 주장은 ‘우리가 과거를 극복하기 위해서 과거를 인정하고, 고백하고, 다시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된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에 반대하는 논리 중 하나가 ‘경제도 어려운데, 과거사에만 매달려있다’는 건데요. 윤 – 그러니까 해방 직후에도 똑같은 논리였습니다. 그때 이광수가 쓴 ‘친일파의 변’이라는 게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런 식으로 하면 일제 시대를 산 사람은 다 친일파다. 공범이다’ 하는 것이 있고, ‘이런 식으로 하면 신생 대한민국을 누가 이끌어 가겠는가?’ 하는 인재론이 있습니다. 또 ‘당시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상황론이 있고, 또 하나는 빨갱이론이 있습니다. ‘이런 얘기하는 사람들은 다 빨갱이다’, 이래 가지고 그 이후에 이런 문제를 조금만 얘기하면 마치 좌파고,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만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사실 해방 이후에 조금씩 논의는 되어왔지만, 이 문제가 국민적인 관심사로 되지 못했던 것이 그런 오해와 개인에 대한 불이익 때문에 얘기를 못해왔던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도 많이 바뀌었고, 특히나 개인적으로 역사학도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그동안 역사 연구라는 것을 그저 자랑스럽고, 저항의 역사, 수난의 역사 이런 시각으로만 연구했는데, 이제는 과거의 부끄러웠던 역사, 허물의 역사 이런 것도 역사화할 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되었다고 봅니다. 제 개인적으로 이 문제에 깊이 관여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3∼4년 전에 일본 교과서 왜곡 문제에 대한 항의를 위해서 일본에 갔을 때 생겼습니다. 인간띠 운동도 하고, 문부성 가서 항의도 하고, 뭐 이런 걸 하면서 내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우리가 일본한테만 이렇게 욕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일본만 탓할 수 있을까? 우리 스스로의 잘못은 없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본한테 정당하게 주장할 건 주장해야 하지만, 우리 스스로에게도 잘못한 것이 있었다면 이제는 밝혀야겠다, 고백해야겠다’는 맘이 들어서 이 일에 적극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외인론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내인론에서 역사가 정체되고, 굴곡되고, 말하자면 형극의 역사를 걸은 그 원인이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도 있었다는 점을 반성적으로, 고백적으로 한번은 밝히기 위해서 이런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는 역사학자로서의 소신을 갖고 이 일에 참여했고, 지금도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친일인명사전을 둘러싼 시비 지 – 명단이 발표되기 전에 가장 큰 관심이 모아졌던 부분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포함시킬 것이냐는 부분이었는데요. 행적을 보면 크게 논란이 될 부분이 아닌 것 같은데, 워낙 정치적인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고민이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윤 – 그 문제는 논란이 좀 있었죠.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군인의 경우에는 위관급 이상으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고 보는 것이 일제 시대에는 군국주의 시대 아닙니까? 군인과 경찰이 가장 힘을 쓰던 시대입니다. 그럴 때 일본의 장교로서 스스로 자원해서 갔다고 하는 것, 그 자체로 볼 때 위관급 이상은 친일 인물로 봐도 큰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소위부터 중위까지 했는데, 사실은 친일 인명사전에서는 박정희라는 인물이 갖는 친일성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 분이 말하자면 자원해서 일본 장교가 됐다고 하는 점 때문에 친일을 한 그 많은 사람 중의 하나로 선정된 겁니다. 그 양반 개인이 무슨 엄청난 반민족적이고, 악질적인 친일 행위를 했다는 사실은 현재로서는 자료상에 안 나옵니다. 단지 그 분이 일제 시대에 황군의 장교로 들어갔다는 점이죠. 그런데 그 분을 빼야 되지 않느냐고 하는 의견은 두 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그 양반을 넣으면, 여당 인사도 같이 넣어야 되지 않느냐’ 하는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고, 정치적 고려를 해야 되지 않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었구요. 또 하나는 ‘정당한 집권이었냐, 아니냐’의 논란이 있습니다만, 지금 현재도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하면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 나올 정도로 우리나라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푸는 근대화의 기수 역할을 했다는 공을 생각할 적에 그 양반은 빼야 되지 않느냐, 이런 얘기가 대두되기도 했어요. 그러나 친일인명사전의 목적이나 범위는 을사5조약(1905년)에서 1945년 해방될 때까지 그 기간에 있었던 식민지 시대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그 뒤의 공을 가지고, 과를 빼버린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단 이런 경우는 뺐습니다. 친일을 하다가 후에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뺐어요. 그러나 해방 이후의 행적을 가지고, 앞서 있던 친일 행적을 상쇄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뿐만 아니라 김성수도 그렇고, 김활란도 그렇고, 다 그런 역사적인 인물들이 우리나라 교육사업을 위해서, 근대화를 위해서, 대한민국을 새로 건설하는데 그 분들이 많은 긍정적인 역할을 했죠. 그러나 일제 시대 때 그런 허물이 있었던 건 사실이란 말이에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사전은 그런 목적을 가지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감스럽지만, 그걸 안 넣는다는 자체가 너무 정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그걸 감안한다는 것이 순수하지 않고,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라는 오해를 살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뺄 수가 없었습니다. 빼는 행위 자체가 오히려 정치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넣을 수밖에 없었던 거죠. 지 –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명단을 발표한 사람들은) 원래 그런 사람들 아닌가. 거기에 대해 특별히 할 말은 없다. 그 사람들도 언젠가는 자신들이 저지른 왜곡에 대해서도 평가받을 날이 있지 않겠느냐. 국민과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고 얘기했는데요.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윤 – 어쨌든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나름대로 공과가 있는 분이 명단에 들어갔다는 것은 사실 유감스러운 일이죠. 그러나 앞서 얘기한 대로, 말하자면 식민지 시대의 반민족 행위 내지는 부일협력한 부분을 다루는 것이 목적 아닙니까? 목적 자체가 그런 거니까 그런 행위가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누구는 넣고, 누구는 뺄 수 없었기 때문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결코 정치적으로 고려된 것이 아니고, 역사적인 정리를 위해서, 훗날 역사의 교훈을 위해서 이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세월이 흘러서 비판이 나올 수 있지만, 그건 우리가 감수할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지 – 헌병 오장을 지낸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원의 부친이 명단에서 빠진 것을 두고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시각도 있는데요. 윤 – 그 문제는 이렇습니다. 일부 언론에 신기남 의원의 부친이 오장 출신으로 조사관 활동을 했다는 것, 김희선 의원의 부친이 독립운동가가 아니고 일본의 밀정이었고 순사였다는 것이 보도된 바가 있는데요. 그것은 우선 두 가지 점에서 인명사전에 게재하지 못했습니다. 첫째는 군인의 경우는 위관급 이상으로 했다는 점, 그런데 오장은 요새 말로 하면 하사관급에 해당되거든요. 직위 자체가 대상 선정 기준에 미달하고 있다는 점, 그러나 위관급 이하라도 악질적인 친일 행위, 현저한 친일 행위가 있을 경우에는 넣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랬더라’ 하는 일부 증언은 있지만, 우리는 증언만을 가지고 거기다가 넣을 수는 없습니다. 구체적인 자료가 나와줘야 되는데, 그 자료를 우리가 아직 입수하지 못했습니다. 역시 김희선 의원 부친의 경우도 초기에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후에 중국으로 건너가서 일본 순사가 됐다고 하는 그런 일부 보도가 있었는데, 그것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우리가 접수하지 못했고, 순사의 경우에는 경부 이상이어야 되거든요. 그 기준에도 미달하구요. 미달되면 악질적인 현저한 친일 행위에 대한 행적이 드러나야 되는데, 그것에 대해서도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뺐다고 해서 다음 번에 안 들어가냐 하면 그건 아니거든요. 내년에 2차 발표를 할 예정이기 때문에 그때까지 자료가 충분히 입수가 되면 그때 가서 넣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겁니다. 지 – 「시일야 방성대곡」을 쓴 장지연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윤 – 그거는 참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하는데, 우리가 장지연 하면 을사늑약 때 「황성신문」에 명논설을 쓴 분으로, 민족주의 논객으로서 높이 추앙했는데요. 그런데 이 분이 실제로 합방 이후에는 일제를 찬양하는 시와 사설을 여러 편 쓰고, 「경남일보」인가에서 사주와 주필을 하면서 친일적인 글을 많이 쓴 것이 최근에 발표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사실을 몰랐다면 모르지만, 안 이상은 어떻게 숨기겠습니까? 그래서 유감스럽지만 넣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 – 반대하는 분들 중에서 어떤 분은 ‘그렇다면 일장기를 달고 마라톤에서 우승해 일본의 명예를 드높여준 손기정옹도 친일파가 아니냐?’고 반문하고 있는데요.(웃음) 윤 – KBS 라디오 ‘열린토론’에서인가, 자유연대에서 나온 사람이 그 문제를 들고 나오더라구요. ‘그러면 손기정도 친일파 아니냐?’고 하는데, 사실 저는 그 생각은 못해봤어요.(웃음) 일장기를 달았으니까 친일 행위가 아니냐는 건데, 그 이후에 좀 생각을 해보니까, 손기정 선수가 세계를 제패한 인물이었으니까 다니면서 징용을 권장하는 행동을 했다든지, 그런 글을 썼다든지, 좌담회에 나가서 얘기를 했다든지 이런 것들이 나왔다면 들어가야겠죠. 그러나 이 양반은 순수한 마라토너로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마라토너에 불과했는데, 그런 사람까지를 친일로 본다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정치적인 문제에 말려들 일을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지 – 정치적인 시비를 줄이기 위해서 굉장히 많이 노력하고 고심하신 흔적이 보이는데요. 발간 예정이 2007년 12월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가 대선과 맞물려서 정치적인 공격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만약 정권이 바뀌면 탄압도 있을 것 같구요. 윤 – 이 작업을 한 사람들이 정치적인 문제에는 둔감한 학자들이 중심인데요. 지난번에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인터뷰를 하다가 ‘언제 발간할거냐?’고 물어서 ‘2007년 12월’이라고 대답했는데, 그해에 대선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사실 그걸 생각 못했어요. 그래서 대선이 만약에 그때쯤 있다면 발간 시기는 보류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선에 영향을 미치는 발표를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예민한 정치적인 문제에 말려드는 일을 스스로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발표는 2007년 12월로 한다고 해놨는데, 만약에 대선 직전이라든지 그러면 그게 지난 다음에 해야지, 전에 할 생각은 지금으로서는 없습니다. 그건 의논해봐야 될 것 같구요. 또 흔히들 이런 질문을 하더라구요. ‘노무현 코드에 맞는 짓을 하는 것 아니냐, 당신들 옛날로 말하면 어용 단체가 아니냐’고 하는데 그것에 대해서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2년 12월에 당선되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멀리 올라가면 1966년에 임종국 선생으로부터 이미 시작이 됐고, 그 중간에는 1993년 무렵에 민족문제연구소가 생겨서 이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관련된 책자들이 적지 않게 나와 있구요. 그러다가 이것이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라고 하는 정식 단체로 출범한 것이 2002년 12월로 기억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노 정권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씨앗이 뿌려졌고, 현재 참여정부로부터 뭘 받고 이런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구요. 정부로부터 돈을 받았지 않았냐는 오해가 있는데, 그런 일은 전혀 없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작년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국회에 5억을 올렸다가 전액이 삭감되고, 그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오마이뉴스’에서 한 독자가 제안을 해서 그것이 알려졌는데 10여 일 만에 7억 5,000만 원이나 모였습니다. 3만 명 이상이 참여해서 모인 그 돈이 종자돈이 됐구요. 또 민족문제연구소에 이런 것을 지원하는 회비를 내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최근에 7∼8억을 받은 것처럼 신문에 났는데, 편찬위가 이 사업을 위해서 돈을 받은 일은 하나도 없고, 민족문제연구소가 프로젝트를 학술진흥위원회에다가 신청을 해서 받은 겁니다. 그러니까 결코 이 프로젝트로 우리가 정부로부터 단돈 1원이라도 받은 바가 없습니다. 결국 돈이 제일 깨끗해야 되거든요.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돈을 받은 바가 없다는 건 분명히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지 – 만약 정치적인 문제를 피해가야 된다고 생각하시면 연기가 불가피할 것 같은데요. 예정대로라면 2007년 말에 대통령 선거를 하면 그 1년 전부터 대선 국면일 텐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들어가면 아무래도 한나라당에서 박근혜 후보가 되든, 이명박 후보가 되든 ‘정치적으로 박정희를 깎아 내리기 위한 것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피하려면 어쩔 수 없이 연기해야 될 텐데요. 윤 – 이번 1차 발표에서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것은 아마 요지부동일겁니다. 선정 기준을 지금 같이 잡아놓은 이상에는 빠져나갈 명분이 없죠. 그것은 더 이상 논의가 될 게 없을 것이고, 그리고 사실 일부에서는 이것을 유보했다가 ‘신기남, 김희선 의원 문제도 있고 하니까 양쪽을 다 유보했다가 나중에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 하는 그런 의견도 일부 있었어요.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그거야말로 너무 정치적인 게 아니냐. 우리가 하는 일이 정치적인 일이 아닌데, 그리고 그때 가서 이슈화하면 더욱 더 정치적으로 보일 수가 있다. 우리 준비가 된 거라면, 우리 기준에 따라서 넣어야 되는 게 마땅하다면 넣자. 그게 오히려 더 정직하게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많아서 들어가게 된 거죠. 다시 재론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역사의 정리일 뿐, 처벌을 바라는 건 아니다 지 – 앞으로 그 후손들의 소송이 줄을 이을 것 같은데요.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하실 생각입니까? 윤 –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렇게 소송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송이 줄을 잇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없는 사실을 기재한 것도 아니고, 우리 나름대로 과거의 자료와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을 가지고 했기 때문에 기록 그 자체에 대한 진위를 따지는 작업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소송에서도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봅니다. 명예훼손 이런 얘기를 많이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특정한 사람을 음해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 정리라고 하는 측면에서 공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지 – “이번 발표가 해방 직후 구성된 반민특위의 정신과 역사성을 잇는다고 볼 수 있지만 당시 반민특위가 정치적인 성격을 띤 데 반해 우리는 철저히 역사 정리와 청산의 관점에서 접근했다. 친일인명사전은 부끄러운 역사이지만 솔직히 밝히고 역사의 엄중성을 후손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한 고백성사다”라고 하셨는데요. 반민특위의 청산과 지금의 청산은 어떤 점에서 다르다고 보십니까? 윤 – 가장 큰 점은 그 당시는 법적으로, 말하자면 제헌 의회에서 반민특위법을 만들어서 법적 제재를 가하는 거였죠. 그래서 그 당시는 사형까지 된 사람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법적인 구속이나 처벌은 고려하지 않구요. 그럴 힘도 없습니다. 아울러 연좌제적인 방법으로 후손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도 절대 반대합니다. 역사 청산이라는 말도 너무 강한 것 같아서 역사를 정리한다고 표현하고 싶구요. 역사의 교훈을 삼아서 일종의 반면 교사, 말하자면 어느 시대고 당시에 정당하지 않고 올바르지 않은 행위를 하면 훗날 이와 같은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고 하는 국민적인 교훈을, 그래서 다시는 이런 부끄러운 역사를 재현하지 않기 위한 교훈으로 삼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처벌이나 이런 것은 전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 – 그리고 당시 반민특위가 이승만 전 대통령과 극우들의 방해나 테러로 해산되었는데요. 그 당시 친일파 청산이 이루어졌다면 대한민국이 어떻게 변했을 거라고 보십니까? 윤 – 글쎄요. 역사에서 가정은 대체로 안 합니다만, 적어도 그때 그것이 이루어졌다면 좀 더 우리 사회가 이런 과거 문제로부터는 일찍이 자유스러워지고, 그리고 사회 정의라든지, 정치 문화 이런 것들이 훨씬 맑아지고, 깨끗해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은 합니다. 말하자면 그때 그 사람들이 그대로 이어져서 자유당, 공화당 정권으로 이어져 오고 그래서 다른 분야가 이렇게 발전해온 데 비해서 정치권의 문화라는 것이 굉장히 후진적이고, 전근대적이고, 고답적인 문화가 아직도 우리 사회에 존재하게 된 것이 이런 역사적인 청산을 하지 못한 그런 산물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매국의 대가는 당연히 환수되어야 지 – “‘친일 명단 수록 예정자’라고 명명했듯이 향후 명단에서 빠질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윤 – 빠질 수 있는 쪽보다는 첨가될 수 있겠죠. 그리고 저는 빠질 사람이 극히 없다고 보지만, 그런 마음의 자세나 열린 자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자료를 찾았는데, 그게 그냥 막한 게 아니에요. 자료집을 보면 아시겠지만,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 조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근거를 일일이 다 적어놨습니다. 시비 걸면 이걸 딱 제시하면 됩니다. 지 – 2차 때는 늘어날 가능성이 많겠군요. 윤 – 그러니까 1차는 주로 중앙편입니다. 총독부에 속해 있던 관료나 이런 사람들이구요. 여기서는 지방편을 뺐거든요. 부분적으로는 자료가 확보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미흡해서 뺐습니다. 2차 때는 지방편에다 해외편 사람들을 발표하려고 합니다. 만주나 일본에서 친일 행위를 한 사람들을 넣고, 이번에 빠진 사람들도 추가하려고 합니다. 지 – 친일 관련자 재산 환수관련 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인데요. 윤 – 전 그것에 대해서는 만시지탄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그와 같은 법을 만들어서 환수할 것은 환수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여기도 전제조건이 한두 가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완용, 송병준 같은 경우 이 사람들은 나라를 매국시키면서 상당한 작위와 함께 돈을 받았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전국 여러 곳에 땅을 산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런 것들은 당연히 환수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후손들이 본인의 노력을 통해서 자신들이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던 개인 소유 그런 것까지를 마치 이완용의 증손자니까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재산을 빼앗아야 된다든지, 송병준의 후손이니까 그 사람의 뭘 빼앗아야 된다든지 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단지 이완용, 송병준 등이 매국한 돈으로 만든 재산을 후손이 모여서 다시 찾으려고 한다든지 그것으로 치부를 하려고 한다든지 그런 것은 환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지 –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어야 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윤 – 이 사전은 어떤 개인을 단죄하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 사실에 대한 정리와 역사적 평가를 통해 사회의 가치 기준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후대에 역사의 교훈으로 남기기 위해서는 일시적인 충격이 있더라도 과거에 명백히 존재했던 역사적 사실들은 반드시 기록되고 평가되어야 하며, 기억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것을 계속 미루고 회피한다면 역사를 둘러싼 갈등과 대립은 지속될 것이며, 우리의 후손들까지도 이 문제를 역사의 과제로 계속 떠안고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일본에게 과거사 반성을 촉구하면서도 내부의 친일 문제는 애써 외면하려는 것은 이중의 잣대이며, 자기모순입니다. 친일청산이라는 과제는 작게는 우리 민족의 문제이지만, 크게는 동아시아가 잘못된 과거사를 청산하고, 평화와 번영의 길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거 문제를 과거만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화합을 위하는데 있다고 하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현실 문제에 적극적인 역사학자 지 – 한글날을 문화독립 국경일로 하자고 주장한 적이 있으신데요. 윤 – 옛날에 그걸 한동안 했죠. 나는 그 소신에 지금도 변함이 없는데요. 우리나라 국경일은 독립과 관련된, 삼일절이라든지, 제헌절이라든지, 개천절이라든지 이런 것과 관련이 되어 있는데, 제가 당시에 운동을 하면서 ‘문화독립 기념일’로 하는 게 좋겠다고 했더니 못 알아듣더라구요. 그래서 어느 신문에 기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한글날이 왜 독립과 깊은 관련이 있느냐 하면요. 한글이 15세기 중엽에 만들어지지 않았습니까? 반포한 것이 1446년인데, 15세기에 동아시아는 모두가 한자권의 문화였습니다. 그때 유독 한글이라는 우리만의 글을 만듦으로 해서 우리는 중국의 한자 문화권으로부터 문화적으로 독립을 한 겁니다. 그리고 이것을 그 당시에 유학자들은 인식을 못하고, 암글이니 하면서 스스로 비하를 했지만, 사실은 오늘날 돌이켜보면 우리말과 우리글이 있었기 때문에 입지적으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틈바구니에 있는 반도국가로서 그 많은 침략과 어려움 속에서도 버텨올 수 있었던 겁니다. 오늘날과 같이 우리의 글과 언어와 역사와 문화를 지킬 수 있었던 근간이 뭐였냐 하면 한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삼일독립운동보다도, 제헌절보다도 훨씬 더 의미 있는 독립기념일이라는 겁니다. ‘이런 깊은 뜻을 정부에서 알아서 정말 더 높이, 어느 것보다 더 중요한 독립기념일로 만들어야 된다’는 것이 제 지론이구요. 두 번째로 문화적으로 봐도 세계의 많은 문자가 있고, 글자가 있지만, 그 민족의 글자가 만들어진 정확한 연도가 알려져 있는 것은 오직 한글뿐입니다. 영어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밝혀집니까? 일어나 중국어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글은 정확하게 만든 해와 반포한 해와 날짜까지도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한글이 과학적이고, 독창적이라는 건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 아닙니까? 휴대폰 생기면서 영어 다음으로 한글을 쉽게 쓰잖아요. 점하고 작대기만 있으면 다 되거든요. 이러한 우수한 문화 글자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이 날을 문화독립일로 만드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강경하게 얘기했는데,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여담이지만, 제가 75년도에 결혼했는데, 그때 전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남북이 훗날 통일이 되더라도, ‘다 없어져도 한글날만은 국경일로 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그날 결혼을 했거든요.(웃음) 그런데 양쪽이 다 한글날을 무시해버리고 있는데, 이게 참 안타까워요. 정말 한번 해보고 싶어서 한동안 뛰어다녔는데, 잘 안 되더라구요. 지 – 학자로서 시민단체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어떤 겁니까? 윤 – 역사학도가 어떻게 이런 시민운동이나 민족운동 등에서 실천적인 운동가가 되었는가 하고 질문을 한다면, 사실은 제가 1989년도에 경실련을 태동시키는데, 몇 명 안 되는 초기 멤버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대학에 있었고, 학생들이 이념 투쟁을 많이 했을 땐데, 제가 그걸 보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일반 서민들이나 일반 국민들은 부동산 오르고, 집값이 뛰고, 생활고로 어려운데, ‘PD가 어떻고, NL이 어떻고’만 하는 걸 보면서 ‘저건 아닌데……’ 하고 생각하고 있는 차에 (지금은 욕을 먹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탁월한 운동가였던 서경석 목사가 그런 문제를 제기해서 ‘바로 이거다. 우리는 대안을 제시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같이 하게 됐습니다. 그 당시에 우리나라가 구조적으로 문제가 많았지만, 결국 핵심포인트이자 가장 큰 문제는 천민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경제 부정의 문제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문제가 경제가 바르게 서지 못하는 데 있다고 하는데 같은 인식을 가지고,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시위를 하더라도 다 신고를 하고 합법적으로 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게 아니라 왜 반대를 하는지에 대한 핵심과 정곡을 찌르고, 대안을 제시하는 이런 운동을 전개하자고 해서 그 일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게 역사학자가 할 일은 아닌데, 내로라하는 경제학자들이 모인 그 곳에서 사실상 최고권한 책임자인 상임집행위원장을 두 번 했습니다. 첫 위원장 시절엔 학교가 시끄러워져, 총장 대행을 하다가 그 다음에 정식 총장 선거에서 1등을 했는데, 여러 가지 ‘내부에서 하면 안 된다’ 이런 얘기도 있고 해서 ‘좋다. 내가 나이도 어리고 하니까’라고 물러났습니다. 그후 미국에 갔다가 돌아와서 경실련이 내홍에 휩싸여 어려워지는 바람에 수습을 하라고 해서 상임집행위원장을 다시 하게 됐죠. 그러면서 지금도 독립협회 이사장도 하고 있고, 시민단체 일에 많은 관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회에 대한 눈이 좀 더 넓게 뜨이게 됐고, 역사를 하는 사람으로서 사회를 바라보는 남다른 시대관이라고 할까요? 안목이 생기게 되고, 그런 속에서 친일 문제도 반드시 한번은 해결해야 된다고 하는 의식을 갖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었는데, 이곳은 민족 문제를 대체로 운동으로 푸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여기에 학문성이 부족해 보이더라구요. 그래서 그런 점을 접합시켰죠. ‘이것은 운동성만 갖고 되는 것이 아니고, 분명히 학문적인 토대가 같이 따라주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가 없다’고 해서 편찬위를 구성하게 됐고, 1대에 이만열 선생을 위원장으로 모시고, 수석부위원장을 하다가 이만열 선생이 국사편찬위원장을 맡게 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지 – 기독교의 친일 문제도 많이 제기하셨는데요. 지금 보면 기독교가 삼일절에 성조기를 흔들고 시위를 하는 등의 행태를 보이고 있는데요. 윤 – 저도 기독교인이지만 한국의 기독교가 우리 근현대사 발전에 굉장히 긍정적인 역할을 한 바가 많습니다. 개항기의 시대 정신이라고 할까요, 시대 이념이 혼란스러울 때 새로운 정신으로 수용되어서 한글 문제, 여성문제, 근대 교육 문제 이런 것들을 수용하고, 발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민족운동 차원에서도 삼일운동까지는 아주 높이, 모든 운동을 다 선도했다고 할까요. 그러나 그 이후에 20년대부터 다소 개량화되고, 현실 순응화되고, 체념화되고 하면서 기독교가 말하자면 교조적인, 교리적인 종교로 전락을 했다고 할까요. 이러다 해방을 앞둔 일제 말기가 되면 훼절하고 변절하는 모습이 만연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기독교만이 그런 건 아니고, 모든 종교단체에 해당되는 건데요. 그러다가 해방이 되고, 마침 이승만 정권이 들어섰는데, 종교적으로 보면 기독교 정권이거든요. 그러니까 이승만 정권을 옹호하고 성원하다보니까 결국은 이승만의 독재정권도 그대로 눈감았다고 할까요. 지지하는 입장이 됐는데요. 그러다 625라는 비극을 맞게 되었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가장 현재적인 문제점을 저는 이거라고 봅니다. 종교는 (특히 기독교는) 이념을 초월해야 된다고 보거든요. 사랑과 용서의 의미를 가장 중요시하는 종교인데, 이상하게 이데올로기 문제만 나오면 이성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요. 이런 것이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약점이고, 한계점이라고 봅니다. 815 때나 삼일절에 성조기를 들고 나오는 게 그 사람들 자신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 점을 하루 속히 극복했으면 좋겠고, 그리고 과거 문제에 대해서 말하자면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인들이 회개도 잘하고, 반성도 잘하는데, 집단적인 회개나 고백이나, 반성에 대해서는 대단히 인색하다는 점도 반성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대이념으로서 앞으로 계속적인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말하자면 민족의 문제, 통일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좀 더 열린 자세로 이 문제를 바라보고 참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말로만 사랑을 얘기하고 해서는 안 되고,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조금 더 기독교의 역할을 찾아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교회를 얘기하기 전에 기독교 정신이 무엇이냐는 것을 얘기하고, 처치맨을 만드는 데가 아니고, 크리스챤을 만드는 데가 교회라는 것을 인식하는 그런 한국 기독교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 –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주신다면? 윤 – 당신의 좌우명이 뭐냐고 하면 한두 가지 얘기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역사학도인데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당장 나에게 이로우냐, 나한테 불리하냐, 이런 것을 생각하고 발언하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 지금은 욕을 먹더라도 나의 말과 행동이 훗날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받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말과 행동을 하려고 합니다. 이게 너무나 거창한 얘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을 맡은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맡았습니다. 저는 역사학자가 결코 앉아서 연구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실 문제를 과감하게 역사적으로 평가도 하고, 계몽도 하고, 실천도 하는 운동을 같이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의 현재성, 그래서 그것이 오늘날 어떻다는 거냐, 여기까지 가르치고, 행동할 수 있는 역사인이라고 할까, 이런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당장에 저에 대한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고, 훗날에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행동을 하고, 발언을 하려고 하고 있구요. 두 번째는 제가 신앙이 신실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크리스챤입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역시 ‘나에게 이로우냐, 아니냐’ 이전에 ‘이 문제를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결정을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할까?’ 이런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고, 발언을 하려고 하죠. 저도 실수하고, 때로는 발언을 잘못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이런 두 가지 신조를 가지고 살려고 노력을 합니다. 최소한도 그런 입장에서 살려고 하는 그런 자세로 임하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월간 ‘인물과사상’, 2005년 10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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