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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교회 수치의 과거사①②] “식민지 교회, 민족배신의 역사”

2008











 


 


최덕성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최근 친인인사 3090명의 명단을 발표하면서 이 사회의 친일 청산 작업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될 인사들의 명단 발표는 일부 보수 단체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 성숙한 국민들과 단체들의 자기 반성도 이끌어내고 있다.

이에 본보에서는 친일인명 사전 명단 발표 후 벌어지고 있는 자기 반성의 일환으로 총 2회에 걸쳐 한국 개신교계의 자기 반성을 보도하기로 했다. 2회에 걸쳐 게재될 이 글은 기독교 전문 인터넷 매체인 뉴스 앤 조이가 고려신학대학원 최덕성 교수의 글을 게재한 것이다. 뉴스 앤 조이와 본보는 기사 공동 게재 계약을 맺고 있다 [데일리서프라이즈 편집자 주]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될 예정자 3090명의 명단이 발표되자 기독교 일각에서는 이를 겸허하게 반성해야 한다는 반응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교회언론회라는 단체는 친일명단 발표가 ‘단죄’의 성격을 띠어서는 안되며, “치열한 역사의 현장에서 발생한 불행한 과거에 대해 현재의 잣대로 재단할 수 없다”는 상투적인 반응을 보였다.

천도교 대표자가 명단 발표와 더불어 “천도교의 과거 친일 행적을 참회하며 민족운동의 전통을 이으려 한다”고 발표한 것과 대조적이다.

한국교회가 과거사에 대해 전체적으로 참회가 부족했고 지금이라도 신앙조상들의 잘못을 참회할 필요가 있다는 데는 공감대가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참회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르다.

교회가 친일행각을 한 기독교인의 명단을 공개한다고 참회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민족과 사회의 양심의 교사다운 처신을 위해서 먼저 무엇을 참회해야 할 것인가를 검토해야 하고 그 점에 대해 한국교회 전체가 공감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친일행위의 전부로 생각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신사참배만을 주로 거론해 왔다. 한국교회가 참회할 과제는 우상숭배의 죄만이 아니다.

배교, 이교개종, 신도침례, 백귀난행-친일행각, 민족배신, 비인도적 행각 등 청산해야 할 죄가 많이 있다. 한국교회가 양심의 교사다운 정체성을 회복하고 민족과 사회를 위한 양심이 교사다운 정체성을 회복하자면 아래의 열 가지를 공적으로 참회해야 한다.

1. 신사참배, 우상숭배, 황거요배, 신도예배

한국교회는 1938년 말부터 1945년 여름까지 우상숭배, 곧 신사참배를 했다. 교회 대표자들과 총회원과 노회원들이 열을 지어 신사(神社)에 가서 신도교의 예배 대상인 일본 신(神)을 참배했다. ‘가미나다’라고 하는 이동식 신사를 교회당 안 동편에 두고 신도들은 그것을 향해 예배했다.

제1부 예배로 신도예배를 드렸고, 제2부 예배로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했다. 일본의 신을 향하여 기도, 소원간구를 드렸으며, 그 예배는 찬양-손뼉, 예물 바치기, 황국신민서사낭독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라고 해석했다. 일제는 신도교를 국교로 삼은 종교국가였다. 정부가 이 국가종교와 그 사제를 관장했다. 일제는 신도주의(Shintoism)를 바탕으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했다. 신사참배는 국민의례였지만 그것은 일본민족주의에 토대를 둔 국가종교, 신도교의 우상숭배 의례였다.

일제말기의 한국교회와 주한 선교사들과 일본의 종교인들은 신사참배의 제의성(Cultic Nature)과 우상숭배의 성격을 간파했다. 일본인 학자들도 그것이 종교행위이며 우상숭배라는 것을 규정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한국교회는 그것이 명백한 우상숭배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사참배가 제1계명과 제2계명에 저촉되는 이교 제례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황거요배, 동방요배도 신사참배에 버금가는 이교예배 행위였다. 주일날 신자들은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정오 사이렌 소리가 나면 일제히 일어서서 동쪽을 향해 절을 했다. 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 사이에는 그것이 ‘살아 있는 임금’을 향한 신하와 백성의 예(禮)인가 아니면 우상숭배인가 하는 견해의 불일치가 있었다.

당시의 일왕은 ‘천황’이라고 하여 신격화 되고 있었다. 천황의 ‘천’(天)은 종교성을 가진 단어이다. 그러므로 ‘천황’에게 절하는 것은 예배하는 행위로 풀이할 수 있다. 로마제국 시대의 황제숭배와 같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신사참배가 국민의례이지 종교[제의]가 아니라는 일제의 해석을 받아들였다. 교회가 ‘국가의 신학적 해석’을 수용한 것이다. 일제의 기만적 신학적 해석을 수용한 것은 한국교회가 국가권력에 무작정 굴종하는 전례가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한국교회가 이승만 정권의 반공이데올로기와 군사정권 하의 철권통치 이데올로기를 수용하거나 그것에 대한 저항력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사참배와 관련하여 한국교회는 (1)우상숭배, 동방요배, (2)신도예배, (3)그리고 이것들이 종교제의가 아니라 국민의례라고 교인들을 기만한 일, (4) 일제의 신학적 해석을 수용한 일, (5) 일제의 교회 간섭을 허용한 것 등을 참회해야 한다.

2. 신도침례

한국교회의 대부분 목사들은 ‘목사연성회’라는 이름의 단체에 가입했다. 이 단체의 회원들은 서울의 한강, 부산의 송도 등 전국의 강과 바다와 호수에서 신도교의 결례의식인 ‘미소기’(神道淸淨)를 행했고 이른바 ‘계’(契)를 받았다.

이것은 신도의 신주(神主)가 더러운 옛 것, 비일본적인 것, 비신도적인 것, 기독교적인 것을 씻는다는 의미를 지닌 의식이었다. 신도 사제가 ‘천조대신보다 더 높은 신은 없다’고 고백한 사람에게 베풀었다. 불교와 신도교에서 계를 받는다는 것은 개종을 의미한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목사들이 신으로 숭앙되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이름으로 신도침례를 받았다.

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은 기독교인이 신사참배 하는 목사, 신도침례를 받은 목사에게 세례를 받지 못하도록 했다. 광복 후 재건교회 일부 신자들은 이들이 베푼 세례의 효용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신교회 지도자들은 이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3. 신사참배인식운동, 신사참배권유운동, 밀고

한국교회가 우상숭배와 친일행각을 한 것은 마지못해, 불가피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교회는 친일파 인사들의 주도로 ‘신사참배인식운동’, ‘신사참배권유운동’을 전개했다. 신자들과 목회자들에게 시국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도록 선전하고 신사참배를 권유했다.

경남노회의 경우 임원들은 거창에서 신사참배거부운동을 펼치는 주남선 목사에게 찾아가 신사참배를 권유했다. 1939년 김길창 목사와 김ㅇ일 목사가 찾아가 신사참배를 행할 것을 권했다. 부산과 거창은 그 시대의 교통형편을 고려하면 아주 먼 곳이었다.

주남선이 거절하자 그들은 강변에 나가 함께 이야기를 좀 하자고 제안했다. 주남선은 “그 일이라면 더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일로는 대화를 할 수 있지만, 신사참배에 대하여는 두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고 답했다.

장로교 총회는 1942년 2월에 이른바 대동아전쟁의 목적을 알리고 기독교인들이 전쟁에 협조하도록 설득하려고 연사를 5개 반으로 편성하여 파견하고 지방 시국 강연회를 개최했다. 신사참배거부자들을 찾아다니며 참배를 권고하고 ‘애국자’가 되라고 강권했다.

친일파 목사들은 경찰을 대동하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동료 교역자들과 신도들을 찾아다녔다. 발견 즉시 “이 자가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자이다”고 고발하여 형무소로 끌려가게 했다. 총회 산하 노회들은 신사참배거부자들을 제명, 파면시켰다.

최훈 목사는 한국교회가 솔선수범하여 저지른 ‘신인공노할 무서운 범죄’ 일부를 소개한다. 어느 목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고향산천을 등지고 북만(北滿)으로 이거(移居)한 신자들에게 일본의 경찰을 앞세우고 찾아와서 “이 사람이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자”라고 고발했다고 한다.

최훈은 그때 붙잡혀 옥고를 치른 바 있는 은기호 집사 증언을 예로 든다. 교회 지도자들이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성도들을 왜경에 고발하여 붙잡아 가도록 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신인공로(神人共怒)할 무시무시한 죄악들이 얼마든지 있다”고 한다. 이 같은 일은 불가피한 상황에서 마지못해 한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광주의 어느 큰 교회 담임목사는 자기 교회의 장로 한 명을 일경에 고발했다. 그 장로는 끌려가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담임목사가 고발한 이유는 그가 교회가 시행하는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피하기 위해 예배가 시작한 30분 뒤에 참석했다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40년 동안 목회를 한 어느 교회의 담임목사는 그 교회를 관할하는 왜경이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틈을 이용하여 주일예배를 신사참배 없이 끝마쳤다. 동방요배도 하지 않고 황국신민서사도 외우지 않은 채 예배를 ‘은혜롭게’ 끝냈다.

이것을 지켜본 다른 목사가 예배 직후 관할 경찰서에 이를 고발했다. 담임목사는 그날 경찰 유치장에 갇혔고, 며칠 동안 구금되었다. 노회는 그 목사를 파직시키고 강제로 축출했다. ‘순정 일본적 기독교’로 개종한 목사들은 물 찬 제비처럼 일제통치를 좋아했다. 경쟁적으로 신사참배와 친일행각을 솔선수범했다.

4. 배교, 이단화

한국교회는 일제말기에 배교(背敎)했다. ‘굴절’, ‘훼절’, ‘변절’의 차원을 넘어 고대 이단 마르시온주의에 버금가는 이단성을 보였다. 교회는 “천조대신이 높으냐? 여호와 하나님이 높으냐?” 하는 질문에 천조대신이 더 높다고 하는 문건에 서명을 해서 관청에 제출했다. 교리와 신학을 변개(變改)했다. 신론, 인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을 개편했다.

성경을 편집하여 구약성경과 요한계시록을 제거했다. 찬송가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통치와 하나님나라에 관한 찬송, ‘만왕의 왕 내 주께서’ 등을 삭제하게 하고 부르지 못하도록 했다.

장로교 총회장은 ‘전향성명서’라는 배교신앙고백서를 발표했다. 군소교단들은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자진 폐쇄했다. 일제의 강압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께서 피 흘려 산 교회를 저항 없이 폐쇄하거나 ‘일본기독교’라는 이단집단에 통폐합시킨 것은 참으로 불충행위였다.

친일파 목사들은 광복 후에 “우리는 교회를 지켰다”, “경찰통치 아래서도 한국교회는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과연 그들이 지킨 ‘교회’는 무엇인가? 그 당시의 한국교회는 ‘천조대신의 교회’였다. 교회의 본질에 해당하는 사도성, 보편성, 단일성, 거룩성을 상실했다.

유서 깊은 기독교의 교리, 신앙고백을 버렸다. 배교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마르시온주의에 버금가는 이단 집단을 교회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통일교회, 바하이교회, 천부교회(박태선)처럼 이름만 교회였지 참 교회는 아니었다.

한국장로교회가 신사참배를 행하기로 결정했을 때 주한 장로교선교회들(미국북장로교회, 미국남장로교회, 호주장로교회)은 한국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협력-자매 관계를 철회했다. 그 당시의 한국교회를 참 교회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이 배교하는 교회에 저항하여 진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고 노회를 조직하고자 한 것은 종교개혁자들의 교회관과 일치했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을 노바투스주의나 도나투스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5. 백귀난행, 부일협력

한국교회는 적극적으로 부일행위를 했다. 성전(聖戰)이라는 이름의 악의 전쟁에 협조했다. 신의주에서 모인 장로교 총회는 교회조직을 전쟁보조 기구로 개편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회록에 따르면 장로교회는 1937년부터 3년 동안 국방헌금 158만원, 휼병금 17만2000원을 모아 바쳤고, 무운장구기도회 8953회, 시국강연회 1355회, 전승축하회 604회, 위문회 181회를 치렀다.

1942년에는 ‘조선장로호’라는 이름이 붙은 해군함상전투기 1기와 기관총 7정 구입비 15만317원 50전을 바치고, 미군과 싸워 이겨달라는 신도의식을 거행했다. 1942년에 열린 제42회 총회의 보고를 보면 장로교단은 교회당 종 1540개와 유기(鍮器) 2165점과 12만여원을 모으고 마련하여 일제에 바쳤다.

경북노회 노회장 송창근 목사는 산하 교회들에게 명령하여 교회의 종과 철제 물건과 유기를 관청에 갖다 바치고 그 보고서를 노회에 올리도록 했다. 교회와 그 지도자들의 이러한 친일 ‘애국’ 활동은 전국적으로 펼쳐졌다.

친일 부역은 ‘조선예수교장로교도 애국기(愛國機) 헌납 기성회’ 회장 정인과 목사를 포함한 일부 친일파 목회자들만의 소행만은 아니다.

감리교회는 1944년에 교단 상임위원회의 결의로 ‘감리교단호’라는 이름을 붙인 애국기 세 대를 살 수 있는 돈 21만원을 헌납했다. 모금은 ‘성도의 헌금 전액과 교단 소속 교회 병합에 의한 폐지 교회의 부동산을 처분하여 충당하는’ 방법에 따랐다. ‘교회병합 실시 명세표’를 만들어 전국 교회에 보냈다.

광주지역 기독교는 세 교회당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폐쇄, 매각하여 일제에 바쳤다. 금정교회는 교구장의 사무실과 주택으로 사용되었다. 광주지역에서 예배를 드린 곳은 양림교회당과 중앙교회당 뿐이었다. 향사리교회, 구장정교회, 일곡동교회, 유안동교회를 폐쇄하고 부동산과 재산을 팔아 일제의 군수물자구입비로 상납했다.

밀려난 목사들은 농사를 짓거나 소일했다. 이러한 친일행각을 한 광주지방의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총 책임자는 정경옥 목사(전 감리교신학교 교수)였다. 장로교의 성갑식, 백영흠, 조아라 목사가 그 아래에서 친일행각을 하고 있었다.

일제말기의 한국교회 신자들은 대부분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했다. 교회는 연맹회비를 한 사람당 20원씩 받았다. 당시의 <동아일보> 평기자의 월급이 20원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그것은 거액이었다. 교회는 이렇게 받은 회비, 헌금 등을 가지고 일제의 병기 구입에 사용하라고 헌납했다. 병기 헌납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했다.

교회는 또 연맹회비를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인을 제명시킨 일이 있다. 그들의 이름을 교인명부에서 삭제했다. 예컨대 광주 송정제일교회 당회록은 “당회로서는 전 교인에게 교회의 의무 실행과 국민의 직무에 열성을 다하여 국방헌금과 연맹원의 의무에 충성을 다하게 하되 불이행 시에는 교인의 명부에서 제명하기로 가결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솔선수범 친일행각이 어느 정도로 열광적이고 열성적이었는가를 입증한다.

광주시내의 어느 교회당의 종을 떼려고 왜경이 일꾼들을 데리고 왔다. 종이 종각에 단단히 붙어 있는 탓으로 분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왜경은 포기하고 돌아갔다. 이 때 그 교회 담임목사는 시내에서 산소 용접기를 빌려가지고 와서 종을 강제로 분해하여 관청에 갖다 바쳤다. 솔선수범 일제에 충성을 바쳤다.

한국교회는 앞 다투어 전승축하기도회를 가졌고, 위문품을 보냈다. 기독교 인사들은 집회에 연사로 나섰다. 김활란, 백낙준 등은 이곳저곳에 강연하러 다니면서 조선의 젊은 남녀들에게 일제의 전선에 나가 그 애국적 정열을 나라를 위해 바치라고 외쳤다.

<동양지광>(발행인 박희도) 등의 친일 잡지에 글을 써서 젊은이들을 전장(戰場)으로 내몰고, 친일 부역을 하도록 부추겼다. 조선기독교청년회(YMCA)가 발행하는 <청년>은 기독교 단체와 지성인들이 민족배신 친일행각에 어느 정도로 광분했는가를 말해 준다.

일명 채필근신학교라고 불리는 평양신학교(1940 설립)는 한 달간 황민화를 위한 재교육을 실시하는 등 일제의 교화기관 구실에 충실했다. <장로회보>는 이 학교의 졸업반 학생들이 1941년 10월 22일부터 11월 2일까지 ‘성지참배’와 ‘내지견학’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을 방문하고 신사참배를 했다고 보도한다.

1941년 12월 24일자 신문은 ‘내지견학기’를 싣고 있다. 학생들을 인솔한 김관식 목사는 나중에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초대 통리로 선출되고 광복 후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를 주도했다.

그 무렵 노회들이 총회에 올린 보고서는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 중에 잘 지냈사오며…” 하는 따위의 말로 일관한다. 평북노회는 “관내 각 교회의 교인 수는 증가하지 못하였으나 신앙생활은 질적으로 향상하였사오며… 관내 각 교회 지도자를 시국에 적절한 지도자로 양성코자 하오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경성노회의 보고는 특히 인상적이다.

위문편지, 위문품, 상이장병 위문금, 유기헌납, 국방헌금 등으로 비상시국에 처한 국가에 성의를 표했다고 하면서 “조선신학교와 연합하여 국민총력 강습회를 개최하고 교역자 및 신자들에게 제국의 세계적 지위와 내선일체 일본 건설 등을 인식시켰으며”라고 보고한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교정치 권력에 충성을 바친 이러한 종교행위를 한 것은 출세와 영달이 그 목적이었다. 목회자들은 “교인들에 앞서 ‘모범’을 보였고… 경쟁적으로 그들이 일제에 대한 충성심을 신사참배를 통해 보여주었다” 한국교회는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이런 일들을 ‘솔선려행’(率先勵行)했다.

일제가 신사참배에 대한 굴복만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인 부일협력을 요구하고 교회의 ‘창부화’를 강요할 때 한국교회는 일제의 작부(酌婦)다운 기고만장한 행태를 연출했다. 반민족 배교집단으로, 이교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일제와 신도교의 창기로 변해 있었다.

6. 면직, 제명, 사임압력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목회자들을 파직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거창읍교회 목회자 주남선은 신사참배거부운동을 전개하다가 1939년부터 광복 때까지 옥살이를 했다. 경남노회는 ‘주 목사에 대하여 거창읍교회 위임목사 해제를 통보’했다. 총회가 신사참배를 행하기로 결정한 뒤였다. 노회의 압력을 받은 교회는 그 가족에게 사택을 비우라고 강요했다.

장로교회는 주기철 목사를 면직시키고, 이기선 목사를 제명하고, 한상동 목사에게 압력을 가하여 사면하게 했다. 상당수 목회자들이 우상숭배를 거부하다가 교회에서 추방되었다. 목회지를 사임한 사람들은 자의로 사표를 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강압적으로 축출되었다.

7. 비인도적 행각, 사회참여의 실패, 민족배신

평양노회(노회장 최지화)는 우상숭배를 거부하다가 투옥되어 있는 주기철에게 산정현교회 목사직 사표를 종용했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임시노회를 소집하여 그를 면직시켰다. 노회는 그의 가족을 사택에서 끌어냈다. 사택 문에 못을 박아 봉쇄했다. 평양신학교 교수 고려위 목사가 그 집에 거주하다가 동네사람들이 거듭 비난하자 그곳을 떠났다.

최훈 목사는 주기철 목사의 가족을 끌어내던 바로 그 목사가 광복 후에 “한국장로교회에서 유력한 목사로 추대 받는가 하면, 현 ㅇㅇㅇ 목사는 얼마 전에 공로목사로 추대되었다. 이와 같이 신앙양심이 마비되면 못할 일이 없는 모양이다”고 지적한다.

한국교회가 저지른 이 같은 비인도적인 행각은 비일비재했다. 목사에게는 그가 책임져야 할 식솔이 있다. 교회는 목사의 가족이 오갈 데 없고, 먹을 것이 없어서 걸인이 되어도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핍박했다.

나라를 빼앗긴 백성과 재산을 침탈당한 동족을 돌보고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기는커녕 항일자들, 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을 괴롭혔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은 일면 그 시대의 사회참여운동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교회는 민족공동체의 일원이다. 이웃사랑, 사회참여, 문화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 한국교회가 일본민족주의 제례(祭禮)인 신사참배에 적극성을 보이고 친일행각에 솔선수범한 것은 민족에 대한 배신행위이다.

8. 에큐메니컬운동, 교단통합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컬운동은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출범한 1924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일본도의 권위 아래서 프로테스탄트교회들을 단일화하는 데 성공했다. 일제말기에 친일파 인사들이 주도한 이 운동은 한국교회의 이교화와 배교와 우상숭배에 이바지했다. 신도이데올로기를 ‘고백’하도록 했고, 각 교파를 해체하고 단일화하여 신도주의에 충실한 일본기독교단에 종속시켰다.

이러한 에큐메니커운동은 광복 후에 ‘하나의 한국교회’의 대명사인 ‘조선기독교단’이라는 교단을 조직하는데 이바지했다. 친일전력자들은 친일잔재 교단을 만들어 교회권력을 계속 장악하고자 했다.

그러나 감리교 측의 탈퇴로 실패하자 이 “교단은 해산되고 그 대신 일정 때의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의 재건 형식으로 탈바꿈하여 1946년 9월 3일에 ‘조선기독교연합회’가 창립되었다. 여기에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그리고 국내의 각 선교부와 교회 기관들이 가입했다” 이때의 주동 인물은 대부분 친일전력을 가진 인사들이었다.

이 단체는 오늘날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로 개편되었고, 이단과 오설(誤說)에 대해 거의 완벽하게 침묵하고 있다.

9. 황국(皇國)의 교회사(敎悔師) 양성소

한국장로교회는 번쩍이는 일본도와 펄럭이는 일장기 아래서 독자적인 신학교들을 설립했다. 평양에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신학교’를 설립했고, 서울에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조선신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들은 정통신앙을 가진 기독교 신자들을 일본민족주의 정신으로 개종시킬 ‘교회사’(敎悔師)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는 그 태생적 성격에서부터 황국(皇國)을 위한 학교였다. 신도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종교국가인 일제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조선신학교가 민족이나 민족적 자주성이나 민족 독립의 의지와는 전혀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일제의 황민화 기관으로 세워졌다는 것은 총회록에 실린 ‘조선신학원 설립 보고서’에 명시되어 있다.

“복음적 신앙에 기(基)한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여 충량유위(忠良有爲)한 황국(皇國)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함을 목적으로 한다” 일장기와 번쩍이는 일본도의 권위로 개교한 학교들은 한결같이 일본 민족주의의 시녀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학교의 설립과 존립이 불가능했다.

조선신학교는 설립목적에 걸 맞는 여러 가지 황민화 활동을 했다. 경성노회와 더불어 “국민총력 강습회를 개최하고, 교역자와 신도들에게 제국의 세계적 지위와 내선일체신일본(內鮮一體新日本) 건설을 인식”시켰다. 황국신민학교답게 일제에 충성을 다했다.

1944년 졸업생 김종삼(1912-, 목사, 예장통합 대흥교회 담임)의 증언에 따르면 이 학교는 황국의 충량유위한 신학생이라는 평가를 받지 못하는 자에게는 졸업장을 주지 않았다. ‘충량유위한 황국의 교역자’로 부족하다는 까닭으로 졸업을 보류했다. 그 일로 말미암아 학생들 사이에 소요가 있었다.

그 무렵 감리교신학교는 구약성경을 읽었다는 이유로 김진철 등 신학생을 퇴학 처분했다. 이 점은 조선신학교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친일행각이 일제의 강압 때문에 ‘마지못해’ 한 것이거나, 조선신학교가 ‘충량유위한 황국의 교역자 양성’이라는 설립목적을 단지 형식적으로 내세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김종삼은 일제시대에 많은 목사들이 일제의 주구가 되어 전국을 누비면서 미영격멸(米英擊滅) 황군승리(皇軍勝利)를 위해 기도회와 강연회를 개최하는 것을 보았으며, 광복하던 날 정오에도 ‘천황폐하 만세’를 청중과 함께 삼창(三唱)하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한다.

10. 솔선수범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자신이 신사참배를 하고 부일협력을 한 것이 일제의 강압 아래서 억지로, 마지못해, 죽지 못해 한 것이며, 한계상황 때문에 불가피했다고 변명해 왔다. “그때 좋아서 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과거사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행하기로 결정한 것도 그 교단 총회를 주도하는 친일파 목사들의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유호준, 정인과, 김응순 목사를 비롯한 교단 지도자들이 일본에 ‘성지순례’와 신사참배를 하러 간 것은 ‘자의로’ 간 것이며, 솔선수범한 것이었다. 유호준은 그것이 ‘부득이한 자의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억지로 했으나 그 다음부터는 자의로 했다고 한다.

한국교회의 친일행각이 삼엄한 공기 아래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자의로’ 행한 것임을 입증한다. 처음에는 강압 때문에 마지못해 하다가 점차 솔선수범했고 나중에는 경쟁적으로 열성을 다했다.

한국교회의 우상숭배, 배교, 친일행각, 민족배신, 백귀난행, 비인도적 광란은 일제조차 ‘깜짝 놀랄’ 정도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이었다. ‘삼엄한 공기’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살아남기 위해’ 저항하지 못하고 굴복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한국교회 안의 극성스런 소수의 친일파 인사들만이 친일행각을 한 것은 아니다. 우상숭배와 친일 범죄행위의 주체는 한국교회였다. 한국교회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였다. 우상숭배와 친일행각을 공동체적으로, 공개적으로, 자의적으로 솔선수범했다. 이러한 죄악들을 단지 각자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해결할 성질의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다.

한국교회-신앙고백공동체가 험곡(險谷)을 통과하면서 겪은 아픔은 오늘의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임에 분명하다. 한국교회의 실패는 일제의 강압이라는 구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죽지 못해, 한계상황에서 저지른 것이 아니다. 친일파 인사들의 주도로 한국교회는 우상숭배, 배교, 백귀난행, 비인도적 행각, 민족배신 행각에 솔선수범했다. 자의적으로 열성을 다했다. (계속)<데일리서프, 05.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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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교회 수치의 과거사②] 해방 후 한국교회의 역사왜곡

광복 후 교회, 친일파 득세하고 역사 날조하고

 


 


뉴스앤조이 최덕성 기자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최근 친인인사 3090명의 명단을 발표하면서 이 사회의 친일 청산 작업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될 인사들의 명단 발표는 일부 보수 단체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 성숙한 국민들과 단체들의 자기 반성도 이끌어내고 있다.

이에 본보에서는 친일인명 사전 명단 발표 후 벌어지고 있는 자기 반성의 일환으로 총 2회에 걸쳐 한국 개신교계의 자기 반성을 보도하기로 했다. 2회에 걸쳐 게재될 이 글은 기독교 전문 인터넷 매체인 뉴스 앤 조이가 고려신학대학원 최덕성 교수의 글을 게재한 것이다. 뉴스 앤 조이와 본보는 기사 공동 게재 계약을 맺고 있다 [데일리서프라이즈 편집자 주]


광복과 더불어 신앙과 종교의 자유가 찾아왔으나 일제라는 이족의 물리적인 힘이 빠져나간 그 자리에 일제의 잔재를 그대로 방치하는 자유로 변모했다.

우상숭배를 행하고 비인도적 행위와 민족배신을 행한 전력을 참회하지 않아도 그것을 탓하지도, 간섭하지도 않는 자유로 탈바꿈했다. 참회를 해야 한다는 사람들을 추방하는 자유로, 일제 치하에서 생존의 지혜를 터득한 자들이 신속히 기회주의적으로 변신하는 자유로 바뀌었다.

반공 이데올로기에 편승하여 불의한 정치권력에 유착하는 자유로, 과거사 청산 부재를 일체 문제 삼지 않는 자유로 전락했다. 교회의 역사를 친일파 시각으로 기술, 편찬하고 친일파 인사들의 과거사를 강변하는 왜곡된 역사 기술의 자유로 탈바꿈했다.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는 간혹 용서를 받아야 할 자가 용서하는 자리에 앉아서 자기를 용서하는 모순을 연출하는 경우가 있다. 용서를 베풀어야 할 자가 도리어 용서받는 자리에 서는 수가 있다. 광복 후의 한국교회가 그러했다.

우상숭배를 비롯한 여러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도리어 재판석에 앉았다. 친일파 교회 지도자들은 스스로 반성하고 자숙해야 할 자들이었다. 그런데도 참회고백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향해 독선, 분리주의, 신성파라고 비난하고 폄하했다.

조국 해방과 하나님의 은총의 신비를 자신들에 대한 면죄부로 삼았다. 스스로 재판관이 되어 일방적으로 자신을 용서했다. 과거사 청산 방법을 논했다. 남들도 자신처럼 자기를 용서했다. 자신이 자기를 용서한 것처럼 타인도 자기를 용서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용서한 것같이 남도 나의 죄를 문제 삼지 말라”고 했다.

1. 과거사 청산 거부, 참회고백 거부

한국교회사가 김양선 목사는 장로교 총회가 세 차례나 신사참배의 죄를 참회하기로 결정했다고 서술한다. 그러나 사실과 다르다. 손명걸은 총회가 신사참배 취소를 세 번씩이나 결정하고 참회를 했는데도 고신계 인사들이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거듭 시비를 거는 것은 독존적 자기 영광에 도취된 때문이라고 비난한다.

“제33회(1947) 총회가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취소 결의를 했고, 진정한 참회가 없다고 하여 제34회(1948) 총회가 다시 취소 결정을 했고, 참회의 날까지 정하여 선언했으나, 그래도 만족하지 않은 탓으로 제38회 총회(1954)에서 세 번째로 취소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반복적인 취소에도 ‘순결주의자들’은 만족하지 않고 결국 비극적인 분열을 초래했다”고 한다.

그의 주장에는 옳은 게 단 한 가지도 없다. 첫 두 번의 ‘취소 결정’이 있었다는 것과 ‘참회의 날’을 선포했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장로교 제33회, 제34회 총회는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기로 결정한 바 없다. 참회의 날을 갖기로 결의하지도 않았고, 그것을 선포하지도, 시행한 바도 없다. 신사참배 ‘취소성명서’라는 해괴한 것은 채택, 발표한 것은 제39회 총회(1954, 안동)였다.

박형룡 박사는 평북노회 교역자 수양회에서 출옥성도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두 달 간의 자숙 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홍택기 목사는 “해외로 도피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 나섰던 사람의 고생은 마찬가지였다”는 말로 거부했다. 해방 뒤 출옥성도 중심으로 일어난 회개운동은 친일파 인사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반민족행위조사특별위원회에 연행된 목사는 장로교의 정인과, 전필순, 김길창, 김동만, 전인선, 감리교의 양주삼, 정춘수 등이었다. 그들마저도 모두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친일파 목사 가운데 교회의 질서에 따라 공적으로 참회고백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국교회는 광복 후 친일파 인사들이 교회를 장악하도록 허용한 것과 참회고백을 하지 않는 것을 용인한 것과 재판을 받아야 할 자들이 재판석에 앉아 자신들을 용서한 것을 묵과한 것을 공적으로 참회해야 한다.

2. 고려신학교 추천 불허

출옥성도들이 세운 고려신학교(1946)는 개혁신학을 표방하고 출범했다. 이 그룹에 대한 친일파 인사들의 적대감은 극에 달했다. 그것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났는데, 총회가 목사후보생을 고려신학교에 추천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노회가 신학생을 그 학교에 추천하는 것을 장로교 총회가 가로막았다.

광복 후에도 참회고백은 하지 않은 채 한국교회의 주도권을 쥔 친일파 인사들은 조선신학교를 교단의 목회자 양성기관으로 신속히 인준했다. 이 학교는 역사적인 장로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허물기 위해 설립된 학교이다.

한국장로교회는 장로회신학교, 평양신학교, 조선신학교, 동북신학교, 고베중앙신학교, 일본기독신학교 등 여러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을 목사로 안수했다. 신학생 졸업창구 일원화나 단일 신학교 제도를 따르지 않았다.

이 점을 고려하면 고려신학교가 교단 직영신학교는 아니지만 과거사와 관련하여 설립된 학교이며,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을 회복, 선전, 강화하기 위해 설립된 기존의 신학교이므로 그 학교에 신학생을 추천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도 가능했다. 추천을 금한 것은 출옥성도들에 대한 그들의 반감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3. 한부선 선교사 해벌

장로교 총회는 우상숭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제명시킨 한부선 선교사를 해벌(解罰)한다는 결정을 했다. 1950년에 경남노회 문제를 해결하도록 선출한 위원회를 통해 해벌 통문(通文)을 보냈다. 신사참배를 시행하기로 한 총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여 평양노회가 결의했고, 총회가 그 보고를 받음으로써 확정했던 제명처분을 해벌한다고 알렸다.

한부선은 신사참배거부운동을 펼치다가 투옥되어 포로 교환의 일원으로 아프리카를 거쳐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1947년에 한국에 귀환하여 고려신학교의 실천신학 교수로 봉사했다. 그가 제33회 총회(1947, 제2차 남부총회)에 참석하자 서기가 그를 알아보고 호명했다. 이 때 그는 조용히 일어서서 “나는 이 총회의 회원이 아닙니다”고 답했다. “나는 치리를 받고 있는 자입니다” 말한 것으로도 알려진다.

한부선이 총회에 참석한 것이나 총회원석에 승석한 것은 새로 조직된 총회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그 총회에 소속되는 것을 불긍(不肯)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김양선이 지적한대로 “아무리 왜정시대의 일이었다고 할지라도 봉천노회가 정식으로 한부선 선교사의 제명처분을 단행했고, 총회는 노회의 보고에 의하여 그의 이름을 회원명부에서 삭제했던 것이니 만큼 그의 이름을 총대 명부에 재록(再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절차를 밟았어야 했다” 교회가 잘못을 뉘우치거나 참회고백을 하지 않고 오히려 해벌을 통보한 것은 언어도단이다. 친일파 역사인식과 교권주의적 발상이 낳은 해프닝이었다.

4. 메이첸파 매도

한국장로교회는 ‘아메리카장로교’라는 이름을 가진 메이첸파와 선교협력관계를 맺었다. 1937년에 이를 결의하고 노회 수의(隨意)를 거쳐 1938년에 보고를 받음으로써 공적으로 체결되었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을 펼치던 한부선은 메이첸파 선교사였다. 광복 후에 재건된 한국장로교회는 1943년에 해체된 교단을 계승한다고 표명했다. 그렇다면 이 교단과 메이첸파와의 선교협력 관계는 유효하다. 이러한 이유로 메이첸파 선교사 한부선은 광복 후에 재건된 장로교 총회 임원회에 참석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친일파 인사들은 고려신학교가 한부선을 실천신학 교수로 초빙한 것과 관련하여 고려신학교와 함께 메이첸파를 분리주의와 동일시하고 폄하했다. 친일파 인사들은 장로교회가 고백하던 정통신앙과 출옥성도들의 신앙노선에 대한 극단의 시기와 적대감을 드러냈다.

이러한 적대감은 급기야 출옥성도들 중심의 고신파(고려신학파)를 제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브래들리 롱필드(Bradley Longfield)를 포함한 여러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오늘날 미국장로교회가 생명력을 상실하고 정체성을 잃은 원인이 당시의 미국교회가 메이첸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5. 경남노회 제거, 제1차 장로교 분열

장로교 총회(1951)는 기존의 경남노회를 제쳐두고 경남지역 친일파 인사들이 만든 ‘경남노회’라는 이름을 가진 불법단체를 받아들였다. 장로교 원리상 기존 노회의 동의 없이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거나 분할, 합병하는 것은 불법이다. 그런데도 총회는 합법적인 기존의 노회가 동의하지 않는 노회 통폐합을 인정했고, ‘경남노회’라는 불법단체를 받아들였다.

약 150개 교회들로 구성된 기존의 합법적인 경남노회를 제거했다. 장로교회의 치리회 질서를 위반한 정치폭력이었다. 출옥성도들에 대한 친일파의 극심한 배타적 발상과 적대감을 드러냈다.

반민특위 중심의 대한민국의 과거사 청산 노력은 ‘기독교 정권’ 이승만 정부의 방해로 실패했다. 한국장로교가 정치폭력으로 신앙의 정통, 민족 정통성을 가진 고신파를 제거한 사건은 그것보다 더 심했다.

총회는 경남노회를 제거한 뒤에 지역마다 교회의 분열을 조장했다. 파당을 만들어 기존의 경남노회의 발전을 방해했다. 교회당 명도 소송을 세상법정에 제기하고, 성도들을 이간질 했다. 총회파 문창교회는 고신파 문창교회를 상대로 교회당 쟁탈을 위한 소송을 제기했고, 송상석 목사는 이에 응소(應訴)했다. 교회의 재산은 교인 ‘총유’(總有)라는 판결을 받았다.

친일파 인사들과 한국교회사가들은 한국장로교회 제1차 분열의 책임을 고신파에 돌린다. 그 사건을 강자의 논리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 분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친일파가 주도하는 총회파에 있다. 손뼉은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하는 통념은 이 사건에 해당되지 않는다.

고신파 출옥성도들은 교회의 과거사를 공적으로 참회하고 함께 하나의 장로교회로 재출발하고자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느 누구를 심판하고 정죄하거나 자신의 공로를 내세워 승리의 영광을 과시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국교회사가들은 출옥성도들이 참회고백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독선적’인 발상을 가지고 형제를 ‘정죄’한 것으로 단정했다. 자기 의를 높이고, 자기의 공로를 뽐내기 위해 형제를 정죄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김양선은 “출옥성도의 독선주의와 교권주의자의 세속적 야망”이 장로교 제1차 분열을 가져온 것으로 기술한다.

김광수는 ‘출옥성도들의 독선적 신앙 고조’란 제목 아래에서 제36회 속회총회는 “출옥성도들을 여지없이 정죄하였다. 그러나 고신계열의 출옥성도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독선신앙을 과시하면서 경남법통노회를 조직하였다”고 서술한다. 이것은 모두 역사왜곡이다.

‘독선적’이라는 용어는 신도군국주의 일제와 친일파 인사들이 순수한 한국교회 신앙인들에 대해 즐겨 사용하던 용어이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항쟁자들에 대한 일제 취조문, 예심종결서 등은 이들이 ‘독선적 신앙’을 가졌고, 성경을 ‘독선적’으로 해석하면서 국체변혁(國體變革)을 도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평양지방법원 검사가 작성한 신사참배거부운동자 ‘21명 예심종결서’는 이 같은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한상동, 이기선, 주남선을 비롯한 수진수난자들의 신앙이 ‘독선적’이라는 것이다. 한국교회사가들과 친일파 인사들은 광복 후에도 일제의 시각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아왔다. 그들의 역사평가 기준은 정당하고 타당한 외침을 그릇된 것으로 보는 일제의 시각과 정확히 일치한다.

‘정죄’, ‘독선’, ‘심판권 행사’, ‘율법주의’, ‘바리새주의’는 가치중립적인 용어가 아니다. 가치판단에는 기준이 있기 마련이다. 한국교회는 과거사 청산 문제, 고신파의 행보에 대한 역사평가를 하면서 진리성, 성경, 신앙고백, 교회의 규범을 기준 삼아 하지 않는다. 친일파의 당파적 시각으로, 힘의 논리로 파악한다.

그 결과로 출옥성도들의 과거사 청산, 참회고백의 필요성, 진정한 개혁교회의 재건에 대한 언급을 ‘독선신앙’을 가지고 형제를 ‘정죄’한 것으로 단정한다. 이러한 오류는 재판을 받아야 할 자가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 자신을 판단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과거사 청산의 실패는 역사왜곡을 가져왔다.

6. 취소성명서 사건

장로교 총회(1954)가 고신파를 제거한 뒤에 과거사 청산 문제를 다루었지만 총회의 상층부를 차지한 친일파 인사들이 “누가 누구를 시벌하랴?”고 외치면서 방해하는 바람에 참회고백은 실패하고 말았다.

신사참배를 행하기로 결정한 과거의 결의를 취소한다는 내용이 담긴 성명서 하나를 채택하는 것으로 종결지었다. 신사참배만 언급했지 ‘일제도 깜짝 놀랄 정도’로 친일에 열성적이었던 일과 천인공노할 범죄와 행악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총회가 신사참배 결정을 취소한다고 하는 성명서를 채택한 것은 과거사를 단지 행정상의 실수(mistake)로만 여긴 결과이다. 성경, 신앙고백, 치리규범, 양심에 따르지 않았다. 단지 정치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한국교회가 일제치하에서 저지른 범죄와 행악은 행정상의 실수가 아니라 신앙고백의 차원에서 참회고백으로 해결해야 할 사안이다. 과거의 결의를 단지 취소하기로 한 것은 죄상가죄(罪上加罪)이다. 다수보다 진리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망각한 판단이다.

‘취소성명서’는 신사참배를 한 것이 강압 때문이었다는 것을 강조하여 성명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법리적으로 말하자면 강압에 의한 범죄는 그 책임이 가해자에게만 있다. 이러한 시각은 친일파교회사관을 가진 한국교회사가들이 한계상황론, 삼엄한 공기론, 불가피론 등을 내세우면서 교회가 강압 정치의 피해자였고, 박해를 이기지 못해 친일행각을 한 것이며, 따라서 참회의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취소성명서’는 일본기독교단이 1967년 부활절에 발표한 ‘제2차 세계대전 동안의 일본기독교단의 책임에 대한 고백’과 흡사하다. 이 고백문은 과거의 잘못을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섭리로 돌림으로써 고백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의 섭리란 대단히 중요한 신앙적 명제이다.

우리들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죄를 범한 자가 자기의 행위를 하나님의 섭리로 돌리는 것은 사악한 발상이다. 일본기독교단이 자신의 행악을 하나님의 섭리로 돌려 자신의 황도기독교 정체성에 큰 변화가 없다는 것을 표명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7. 주기철 목사복권 사건

예장통합 서울동노회가 주도한 ‘주기철 목사 복권’ 행사는 과거사 청산의 실패가 낳은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며, 한국교회의 삐뚤어진 역사인식과 친일파 전통에 대한 극명한 증거이다. 그것은 주기철을 중세기적 미신의 대상으로, 교권주의의 꼭두각시로 이용한 행사였다. 그를 떠받들고 있던 교회사적 의의의 버팀목을 빼 버린 사건이다.

이 사건은 (1)죽은 자를 교회의 치리(성자, 복자, 순교자 추대 등)의 대상으로 삼는 로마가톨릭교회관을 반영했다. (2)목사직을 작위로 보는 시각을 반영했다. (3)복권은 과거의 면직이 유효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우상숭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면직한 것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보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4)평양노회가 면직시킨 것을 서울동노회가 복권시키는 것은 치리회의 질서에 어긋난다. (5)이 사건은 순교자를 상품화하여 자파의 정통성 확보와 위상향상을 위한 수단으로 삼은 해프닝이다.

그 무렵 프랑스가톨릭교회는 나치치하에서 유태인 학살에 침묵했던 죄를 참회했고, 일본의 여러 교단들과 기독교 학교들은 한국교회에 가한 과거의 잘못에 대해 양심선언을 했다(졸저, <일본기독교의 양심선언>(2000)을 보라). 주기철 목사복권 사건은 철면피한 한국교회의 그릇된 역사인식과 친일파 전통의 현주소를 보여준 사건이다.

8.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역사날조

한국장로교 교단들은 총회 회수를 1912년에 모인 제1회 총회에서 시작하여 계산한다. 그러나 1912년에 설립된 한국 장로교단은 1943년에 해산되었다. 그러므로 광복 후 재건된 교단의 총회는 ‘후기 제1회’ 등으로 표기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생각된다. 고신교단이 첫 총회를 제1회로 시작한 것과 같이 말이다.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총신대학교와 개신대학원대학교는 2002년에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다채롭게 가졌다. 음악회, 학술강연회, 동문회, 개교100년사 출간기념회 등을 가졌다. 1년 내내 행사가 진행됐다.

그러나 이 학교들이 100년의 역사를 가졌는가는 따져봐야 한다. 장신대학과 총신대학은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 학생들 절반가량을 데리고 가서 남산의 조선신궁 건물에서 시작한 장로회신학교(1948)로부터 시작되었다.

장로회신학교(평양)는 1938년에 신사참배 문제로 스스로 문을 닫았다. 그 학교와 1940년에 세워진 평양신학교는 무관한 학교이다.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총신대학교와 개신대학원대학교가 100년의 역사를 가진 학교라는 것을 입증하려면 타당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1)이사회 (2)교수회 (3)교사(校舍) (4)학생회 (5)운영 주체 중 어느 하나라도 연결되면 일제의 강압과 민족적인 수난기를 넘기는 동안 우여곡절을 겪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이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위 학교들이 설립 연대를 장로회신학교(1902)의 설립에서 시작하는 것은 장로교 총회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는 데 근거를 둔다. 총회가 1948년에 설립된 신학교의 역사를 장로회신학교(평양)를 계승하기로 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장로회신학교(평양)는 한국장로교 총회가 운영한 학교가 아니다. 선교연합공의회가 운영했다. 장로교 총회가 최초로 직영한 신학교는 1940년에 세워진 평양신학교(일명 채필근신학교)이다. 그 학교를 운영하던 총회는 1943년에 해체되었다. 서울의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총신대학교는 광복 후에 재조직된 남한의 장로교 총회가 운영하는 학교이다.

총회가 학교의 설립연도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권주의적 발상이다. 설립연도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총회가 학교의 설립연도를 결정할 수 있다고 보는 그 시각은 한국교회 안에 깊숙이 자리 잡은 친일파 전통의 한 단면이다.

장로회신학대학교는 자신의 역사를 평양신학교(채필근신학교)와 연계시킨다. 이 학교는 1950년에 폐교되었고, 이를 운영하던 장로교단은 1943년에 해체되었다. 이 교단과 1946년에 남한에서 새롭게 조직된 장로교단 사이에 공동체적 관련성은 있으나 법적인 연속성은 없다. 과거에 장로교회였던 교회들이 지역 노회를 재조직하고, 그 노회들이 다시 남부총회라고 하는 가설(假說) 총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공동체적인 관련성만으로는 학교라고 하는 법적기구의 연속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이족침략, 동족상잔의 전쟁이라는 삶의 상황을 고려해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와 서울의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연결시켜 100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역사 날조가 의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장신대학 70년사>와 <장로회신학대학교 100년사>를 대조하면 알 수 있다.

총신대학교는 여기에서 한 술 더 뜬다.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다채롭게, 성대히 가졌으며, <총신대학교 100년사>(2002)라는 방대한 책을 편찬 출간했다. 그런데 이 책은 평양신학교(채필근신학교)와 총신대학교가 무관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총신대학교가 장로회신학교(평양)에서 출발했지만, 그 역사에 친일, 우상숭배를 하던 ‘채필근신학교’의 역사를 포함시킬 이유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학교가 2002년에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가진 것은 모순이다. 책 제목은 <총신대학교 100년사>인데, 그 내용에서는 자신이 100년의 역사를 가진 학교가 아니라고 서술한다. 과거사 청산 부재가 낳은 웃지 못할 해프닝이다.

9. 주기철 복적 결의

장로회신학대학교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를 졸업생으로 여긴다. 교정에 주기철 순교기념비를 세워놓고 그가 이 학교의 졸업생이라고 부각시킨다. 주기철 목사가 졸업한 학교는 평양에 소재했고, 1938년에 폐교되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회는 주기철 목사의 복적을 만장일치로 결정한 바 있다. 이것은 10가지 이상의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순교자를 자교의 위상향상과 정통성 확보의 수단으로 삼으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정에 있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 기념비의 비문은 이종성 박사가 썼다. 그는 주기철 목사의 순교와 저항을 가능하게 한 개혁주의 정통신학을 ‘신바리새주의’, ‘근본주의’라고 매도해 왔다. 앞에서는 순교자를 상품화하여 자기 학교의 위상 향상의 수단으로 삼고 뒤에서는 그의 순교를 가능하게 한 신념체계를 근본주의, 바리새주의라고 지탄하고 폄하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10. 한신대학교의 역사날조

한신대학교(전 조선신학교)의 김재준, 정하은 교수는 일제시대의 순교자와 출옥성도들을 깎아내리며 그들이 피안적 신앙에 의해 희생된 자들이라고 지탄했다. 신학을 알아서 일제에 대항하여 투쟁한 것이 아니라 단지 정통신학이라는 덧없는 신념체계로 말미암아 희생되었으며, 불나비가 불을 향해 겁도 없이 달려들 듯이 쓸모없는 희생을 당했다고 말했다.

그는 나치 치하의 독일고백교회의 저항은 순교적 영웅이라고 평가하면서도 한국교회의 저항과 신앙투쟁은 극도로 폄하했다. 신앙승리자들에 대한 반감,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한신대학교는 다섯 가지로 역사를 날조한다. 첫째, 조선신학교의 설립 목적이 “복음적 신앙에 기초한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여 현 조선교회가 요구하는 건전한 교역자를 양성함을 목적함”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완전히 날조된 것이다. “충량유위한 황국의 교역자 양성”이 그 목적이었다.

둘째, “본교의 설립취지와 교육이상은 한국민족과 한국교회가 새 역사를 맞을 준비 작업으로서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신학교의 설립취지와 교육 이상은 충량유위한 황국의 교회사(敎悔師)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셋째, 한신대학교는 이사장 명단에서 진정률 장로(1948-1953)를 초대 이사장으로 내세운다. 문헌에 따르면 초대 이사장은 함태영 목사였고, 그 다음은 일본인 마쯔모토 다따오(松本卓夫)였다. 1943년경의 이사장은 일본인 무라야마 키요히꼬(村山淸彦)였다. 초대 이사장 다음으로, 2대에 걸쳐서 일본인들이 이사장을 역임했다.

넷째, 전직 교수 명단에서 일본인 교수들의 이름은 삭제해 버린다. 일본인 교수 미야우찌 아끼라(宮內彰), 전임강사 하나무라 요시오(花村芳夫), 무라기시 세이유(村岸淸洙), 야먀구찌 다로(山口太郞), 그리고 이사장이며 신약학 교수였던 마쯔모토 다따오(松本卓夫), 무라야마 키요히꼬(村山淸彦)의 이름을 싣지 않고 있다. 미야유찌 아키라 교수를 비롯한 일본인 전임 교수들의 이름을 빼버렸다. 미국인, 캐나다인 교수들의 이름은 포함시키면서 일본인들의 이름을 빼버린 까닭은 무엇인가?

다섯째, 이사진 구성에 대한 서술도 사실과 다르다. 1943년경에는 일본인 3명, 곧 무라야마 키요히꼬(이사장), 하나무라(花村美樹), 가나이에이 사부로(金井英三郞)와 한국인 4명(김영철, 조희염, 김종대, 함태영)이 이사였는데, 이사 명단에서 일본인들을 삭제했다.

한신대학교가 과거사를 솔직히 시인하고 참회하며 통절히 반성함으로써 역사를 바로 세우고 새로운 장을 열어가려고 하지 않고 도리어 은폐하고 날조한 것은 주기철을 비롯한 일제 말기의 신사참배거부자들이 정통주의 신학의 희생이었다고 비난한 김재준, 정하은의 궤변과 궤를 같이한다.

출옥성도들을 향하여 메이첸파니, 독선주의니, 독존적인 자기 영광을 과시한다느니 하면서 우물에 독 뿌리기 식 독설을 토한 것과 일치한다. 한신대학교가 자신의 역사에서 일본인들을 모조리 삭제하고, 이 학교가 민족 정체성을 지니고 출범한 것으로 서술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정조를 일제에게 갖다 바친 “창녀의 구차한 변명”이다. (계속)<데일리서프라이즈, 05.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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