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은 벤야민을, 영국은 버지니아 울프를, 프랑스는 생텍쥐페리를, 오스트리아는 슈테판 츠바이크를 잃었다면 중국은 위다푸(郁達夫)를 잃었다.”
이는 지난 8월 29일, 위다푸의 고향 항저우(杭州) 푸양(富陽)에서 열린 ‘위다푸 순국 60주년 기념회’에서 나온 평가다.
1938년 싱가포르에 가서 항일구국운동을 하던 위다푸는 일본군에 잡혀 포로가 되었다가 일본어가 능통하여 ‘자오리엔 (趙廉)’이라는 이름으로 일본군 통역이 된다. 그러나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전쟁이 종결되면서 그의 효용가치가 없어지자 일본군은1945년 8월 29일 남양군도에서 그를 납치하여 9월 17일 살해한다. 위다푸의 생애는 국내 팬들에게도 잘 알려진 저우룬파(周潤發) 주연의 <위다푸전기>에도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유학시절 나는 ‘첫사랑’이라는 곡주(穀酒)를 좋아했다. 첫사랑과 술은 마시면 마실수록 취하는, 어쩌면 서로 똑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술과 사랑에 취한다면 이렇게 서로 싸우고 죽이는 전쟁은 없었을 것이다.”
영화 <위다푸전기> 도입부에 흘러 나오는 위다푸의 독백이다.
위다푸는 여러 면에서 식민지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지식인의 고뇌와 우울을 잘 대변해 주는 작가이다. 반봉건적 전통을 가진 낙후된 중국에서 태어난 그에게 이미 근대화를 이룩한 일본은 그가 선진문물을 접할 수 있는 창구이면서 학습해야 할 대상인 동시에 또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상대였다.
1913년 형을 따라 일본에 유학을 간 위다푸는 동경제국대학 경제학부에서 공부하면서 일본의 선진문물을 접할수록 중국의 후진성에 대한 콤플렉스를 안고 일종의 피해망상증을 경험한다.
유학생활의 자유롭고 향락적인 분위기에도 노출됐지만 내성적이고 소심한 그는 그 주변을 맴돌며 중국인으로서의 패배적 정체성만을 안고 지낸다. 퇴폐적인 성묘사로 대륙에서 금서가 되기도 했던 위다푸의 대표작 <침윤(沈淪)>에는 이같은 그의 심리상태가 잘 묘사되어 있다.
여성편력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여인들과 사랑을 나누고 또 세 번의 결혼을 한 위다푸. 특히 당시 항저우 최고의 미녀로 통하던 왕잉샤(王映霞)와의 열애와 두번째 결혼은 중국현대문단 최대의 스캔들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그런 위다푸도 지식인으로서 짊어져야 할 시대적 책무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않았다.
‘좌익작가연맹’ 발기인이면서도 항저우에서 자연을 벗하며 시대적 책임을 외면하던 그는 일본의 만행을 지켜보며 점차 항일구국의 길에 들어서게 되고, 포로로 잡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통역으로 일하면서도 일본군 몰래 항일단체들을 지원하다 항일전쟁의 마지막 순간에 목숨을 잃고 만다.
위다푸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한 ‘창조사’를 만들고 퇴폐적인 내용으로 젊은이들을 현혹한다는 비판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현재는 항일열사로 고통스런 세계에 반항하며 자신의 상처를 자기만의 예술영역으로 품격높게 형상화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제의 식민지배가 날이 갈수록 강화되고 해방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육사나 윤동주처럼 끝까지 몸을 바쳐 저항한 지식인보다는 항일을 접고 친일의 길로 들어서는 작가가 많았다. 자본주의 수탈을 강화하는 일본에 맞서 사회주의의 노선을 추구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지금까지 우리는 친일보다 좌익이 더 나쁘다며 매도해 왔다. 또한 그 과정에서 교과서에는 친일작가들이 도배하다시피 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일본의 ‘아가리’ 속에 들어가 비록 방황하고 무겁게 가라앉아 좌절하지만 결국 일본을 향해 저항의 붓을 들었던 위다푸를 보면, 일본의 선진문명을 받아들여 조선을 근대화하자고,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선동하던 친일작가들의 비겁한 붓질이 새삼 분노를 자아내게 한다. <오마이뉴스, 05.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