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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포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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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리아 픽쳐스 |
최근 영화 <청연> 개봉을 앞두고 주인공 박경원의 ‘최초’ 문제와 친일행적에 대한 시비가 불거지고 있다. 이 문제는 독립유공자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비행사’로 대한민국 공군기념관에 자료가 기록·전시되어 있는 권기옥씨의 유족들에 의해서 제기되었다(스포츠조선 2005년 10월 14일자).
‘최초’와 ‘친일’ 문제 중 이번 기사에선 먼저 친일행적을 중심으로 박경원의 삶과 죽음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최초의 여자비행사가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선 권기옥에 관한 후속 기사를 통해 다룰 예정이다.
고이즈미 총리 할아버지와의 염문설
박경원의 친일행적은 김정동(목원대·문화재 전문위원) 교수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 김 교수는 ‘일본 속의 한국 근대사 현장'(하늘재·2001년)에서 박경원과 당시 체신장관이던 고이즈미 마타지로(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할아버지)와의 염문설, 그녀의 죽음을 불러온 마지막 비행이 만주국 승인을 기념하는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연락비행(日滿親善 皇軍慰問 日滿連絡飛行)’이었다는 사실 등 친일행적을 소개하고 있다.
박경원이 고이즈미 체신장관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28년 관동비행구락부 주최로 열린 제4회 비행경기대회에서 그녀가 고도상승 부문 3등으로 입상하게 되면서부터인 듯하다. 이 무렵 박경원은 최린, 고이즈미 체신장관과 함께 내선일체의 상징인 고려신사를 참배하고 방명록에 나란히 이름을 남겼다. 당시 신문에는 박경원과 고이즈미 체신장관의 염문설이 심심찮게 가십란을 장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고이즈미 마타지로는 당시 민간비행 업무를 총괄하는 체신장관으로 막강한 권력과 부를 소유한 인물이었다. 일본에서 출간된 박경원 평전에 의하면 ‘고이즈미는 그의 생가가 요코스카에서 난폭한 남자들을 부려 건축업을 경영하고 있어, 그 자신도 온몸에 먹물을 뿌린 듯 모양새를 갖추지 못한 장관인데다가 누구 못지않게 여자를 좋아했다. 그의 부인은 화류계 출신이었지만, 결혼 후에도 그의 주변에는 여자들이 따라 다녔다’고 한다(<건널 수 없었던 해협>·카노 미키요·시사통신사. 1994년). 한 마디로 야쿠자 출신의 늙은 호색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경원은 자신의 비행기 ‘청연(푸른제비)’을 소유하게 되는 과정에서 고이즈미의 큰 은혜를 입었다. 고이즈미는 일본 제국비행협회 회장이자 중앙조선협회 회장이기도 한 시카야와 항공국 인사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박경원이 군용기를 불하받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또 불하받은 군용기의 수리 보증금까지 지원해주었다. 1931년 11월 20일 항공국에 박경원 소유 비행기로 등록된 ‘청연’은 고이즈미 체신장관의 선물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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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이즈미의 초청으로 제국호텔에 모인 여자 비행사들. 깃털 모자를 쓴 박경원이 고이즈미 앞에 앉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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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속의 한국 근대사 현장> |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연락비행(日滿親善 皇軍慰問 日滿連絡飛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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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만친선 황군위문 비행을 위해 이륙하기 직전 일장기를 흔드는 박경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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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속의 한국 근대사 현장> |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켜서 만주일대를 장악한 일본은 1932년 봄 괴뢰국 만주국을 세웠다. 1932년 9월 15일 <나고야신문>은 ‘일만의정서 조인’ 및 ‘만주국 승인’을 기념하여 민간 비행사에 의한 연락비행 계획을 발표했다.
박경원은 <나고야신문>에 일만연락비행에 참가하겠다고 신청했다. 그러나 애초 신청 자격은 1등 비행사인 남자로 제한되어 있었고, 게다가 일본부인항공협회에서는 여류비행사에 의한 일만연락비행을 계획하면서 우에다 스즈코를 후보자로 밀고 있었다. 이 비행에 조선인 여성 박경원이 선정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소용돌이치는 정치적 상황은 박경원을 이 역사적인 비행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었다. 1932년 정초, 이봉창 의사가 천황의 마차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가 일어났다. 4월 29일에는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천황의 생일 겸 상해사변의 승전을 축하하는 일본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 고위관료와 장성급 15명이 사상하게 된다. 그해 두 의사는 모두 처형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조선반도를 병참기지화하고, 조선민중을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일본-조선-만주의 일체화를 강조하게 된다.
“우리 대일본제국의 대륙정책 진전에 즈음하여 조선반도의 병참기지로서의 중요성은 점점 더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조선여성이 일본과 만주의 가교가 되어주는 일은 일본과 조선, 만주를 일체화 시키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라는 데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관동군 사령부의 시마다 중좌의 연설. <박경원 평전>에서 인용).
1933년 5월 4일은 박경원에게 운명의 날이었다. 공군 창설 25주년을 맞아 천황이 타치가와 제5비행연대에 왔고 비행학교 교장인 아이바타 모츠가 제국비행협회에 호출되어 갔다. 제국비행협회가 박경원의 만주비행을 후원하겠다는 결정을 했던 것이다.
박경원은 일본제국주의 비행사 최고의 영예인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연락비행(日滿親善 皇軍慰問 日滿連絡飛行)’의 비행사로 선정되었던 것이다. 박경원은 일본 예복을 입고 제국비행협회와 외무성, 체신성 등의 은인들에게 사례 인사를 하러 다녔고,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5월 19일 경원은 일본항공 정기편을 타고 경성으로 날아가서 총독부와 각 신문사를 방문하여 협력을 요청했다. 그리고 만주 신경으로 날아가서 관동부 사령부를 방문하고 시마다 류이치 중좌와 만주군, 만주협화회 등의 관계자들을 모아놓고 협력을 요청했다.
이즈음 제국비행협회 총무이사는 애국기 헌납과 방공(防空) 사상을 보급하기 위해 박경원의 고향인 대구에 가서 박경원의 ‘일만친선 황군위문 연락비행’의 의의를 강연회 석상에서 선전했다. 군국 일본의 대륙을 향한 진군에 2000만 조선민중을 끌어들이기 위한 무대에서 박경원은 치어걸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던 셈이다.
청연의 추락과 박경원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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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코네 산중에 추락한 박경원의 비행기 ‘청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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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속의 한국 근대사 현장> |
1933년 8월 7일 하네다공항 근처는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했다. 그러나 비행은 연기될 수 없었다. 바로 이틀 후 일본 역사상 최초로 관동방공대연습이 실시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축 일만친선 황군위문 비행’이라고 쓴 빨간 리본이 달린 꽃다발을 받은 박경원은 청연호에 탑승했다. 뒷좌석에는 아라키 육군대장이 히시카리 관동군 참모총장에게 보내는 메시지, 체신장관이 만주국 교통부 총장에게 보내는 메시지, 우시츠카 도쿄시장이 신경, 봉촌, 하얼빈 시장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그녀는 관중들을 향하여 일장기를 흔들며 조종석에 앉았다. 1933년 8월 7일 오전 10시 35분, 멋진 이륙이었다. 그러나 청연호는 이륙한 지 50분 만에 짙은 구름 속에서 하코네 산 중턱에 부딪혀 추락했다. 8월 9일 박경원은 유골이 되어 도쿄로 돌아왔다. 11일 제국비행협회 강당을 장례식장으로 하여 일본비행학교에 의한 성대한 고별식이 행해졌다.
관민 항공관계자 150여명이 늘어선 제단에는 출발 직전 촬영한 사진이 걸려 있었다. 비행기 조종석에 서서 일장기를 손에 들고 흔들며 웃고 있는 모습. 그 뒤에는 아라키 육군장관, 미나미 체신장관, 나가이, 조선총독부 정무장관, 오이시 관동군 참모장으로부터 받은 화환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만주국협회와 고이즈미 전 체신장관이 보낸 화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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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11월에는 일본비행학교 이름으로 <2등 비행기 조종사 고 박경원양 추도록>이 출간되었다. 추도록에는 각계로부터 받은 메시지들, 고별식에서의 조사, 박경원의 유고 2편, 항공인ㆍ군인ㆍ저널리스트 등 관계자 68명의 추도문이 실려 있었다.
“이 작은 책자를 편찬하게 된 동기는 박 비행사의 명복을 빌고, 동시에 비록 불운하게 죽었지만 항공계의 진보를 위해서 일본-조선-만주의 친선을 위해서 희생의 귀감이 된 것을 후세에 영원히 일깨워주고자 하는 것이다.”
일본비행학교 교장인 아이바타 모츠가 쓴 발간사의 한 구절이다. 사고 1주년이 되던 날에는 마을 주민들에 의해 하코네 산 현장에 ‘쇼와 8년 박경원양 조난 위비’ 위령비가 세워졌다.
“항상 나라의 은혜를 갚겠다는 큰 뜻을 품고 고국방문과 만주에 있는 장사들의 위문을 위해 일만친선이라는 큰 사명을 띠고 1933년 8월 7일 오전 10시경 용맹하게 하네다 비행장을 날아갔는데… 일본 여류 비행사로서 최초의 희생이 되어 후배 비행사에게 큰 교훈을 주리라.……부디 아름답게 빛나는 여신이 되어서 영원히 항공계를 수호해 주시기를.”
이날 위령비 제막식을 위해 일본비행학교에서는 비행기를 파견하여 추모비행을 했다. 이 추모비가 세월의 풍화 탓인지 인위적인 훼손에 의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허물어지자 1981년 우에타카 마을회는 새로운 비석을 세웠다.
박경원을 추모하는 일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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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원의 고려신사 참배. 최린, 이등비행사 박경원, 그 옆에 체신대신 고이즈미 마타지로(小泉又次郞)라고 쓰여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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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창규 |
1983년 8월 7일 박경원 추락사 50주년 추모제가 아타미시에 있는 한 절에서 행해졌다. 이때도 제단에는 일장기를 쥔 박경원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주일 한국대사와 일본 외무장관, 운수장관 등이 보낸 화환에 섞여, ‘일한(日韓) 우호회 회장’, ‘참의회 의원 미나모토’라고 쓰여진 화환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들은 A급 전범들이고 특히 미나모토 참의원은 태평양 전쟁 말기에 항공전략의 지도자로 가미가제 작전을 입안하여 수많은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옛 군인이었다. 이 장면을 평전작가 카노 미키요는 ’50년이 지났어도 박경원은 일장기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것’이라고 씁쓸하게 표현하고 있다.
카노 미키요가 쓴 ‘박경원 평전’은 10년 넘는 취재와 퇴고를 거쳐서 <건널 수 없었던 해협-여성비행사 박경원의 생애>라는 제목으로 1994년 일본 시사통신사에서 출간되었다.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꽃 박경원, 그리고 영화 <청연>
자신의 조국인 대한민국보다 일본에서 더 많이 알려지고 애도받는 인물 박경원, 그녀의 미완의 비행은 일제 침략으로 신음하던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에게 어찌 보면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날개의 꿈’을 이루기 위해 몸과 마음을 팔아 제국주의 일본의 치어걸이 된 그녀는 불행했던 조국의 아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늘은 그녀의 모국비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국도 그녀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녀의 극적인 삶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신사참배를 강행하는 고이즈미의 나라 일본에게 ‘영원한 하늘의 여신’으로 기억될 뿐이다. 내선일체와 일만친선의 상징으로 일본 A급 전범들의 여신으로 추모되고 있는 것이다.
박경원을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비행사로 부활시키려는 노력은 그녀를 다시 한번 고국에서 매장시키는 아픔이 될 것이다. 고이즈미와 일본제국주의의 양날개로 하늘을 난 최초의 조선 여성으로 말이다. <오마이뉴스, 05.1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