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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대적 산물” “책임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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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민일보 민병욱 기자


 



“일제라는 엄혹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총체적 이해가 필요하다” “장지연의 <매일신보> 시기를 아예 제외시켜 놓은 것은 근대사에서 언론이 갖는 역할과 정체성 정립을 위해서라도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장지연에 대한 인식 차는 좁히기 어려웠지만, 다양한 논쟁거리가 쏟아져 앞으로 연구 방향이 보다 풍성해 질 수 있는 자리였다.












 



 


 


▲ 9일 오후 전국언론노동조합 주최로 경남도민일보 강당에서 열린 ‘장지연의 항일과 친일언론’ 토론회에서 경남대 정치언론학부 김남석 교수(왼쪽 두번째)가 발제를 하고 있다. /유은상 기자


김남석 교수(경남대 정치언론학부)가 장지연 ‘주필책임론’을 부정한 데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는 발제가 준비돼 관심을 모았던 ‘위암 장지연의 항일과 친일언론’토론회가 9일 오후 4시 경남도민일보 3층 강당에서 열렸다.

첫번째 발제자로 나선 김남석 교수는 “편집형태를 보거나, 이전 나온 여러 논문을 보건대 장지연이 경남일보에서 주필로서 크게 관여할 수 있는 여지는 줄었던 같다”며 “천장절 기사가 게재 된 것도 당시 시대상황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고 장지연 옹호에 대한 기존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또 “언론활동에 대한 열정, 특히 언론인식으로서의 근대 인식면에서 선각자인 것은 분명하며, 인민에 대한 애정은 초기 한시를 쓰던 때부터 말기까지 이어졌다”고 덧붙였다.

이어 발제를 맡은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천장절에 관한 기사와 황현의 ‘유시’를 게재한 것은 주필로서 똑같은 책임”이라는 주장을 재확인하면서 장지연이 <매일신보>에 기고를 통해 일제 식민통치 합리화에 도움을 준 글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장지연 옹호에 반격을 가했다.

민언련 토론회, 김남석 교수-이용창 연구원 정면 논쟁

그러면서 “1914년 10월 <매일신보>의 초빙 제안을 장지연이 거절했다는 부분도 구체적인 사실의 뒷받침이 없거나, 모호한 표현으로 처리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또 김남석 교수가 앞서 제기한 ‘장지연 근대인식의 한계’에 대해서는 “사상적으로 한계가 있었기보다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합리화와 을사늑약 속에서 일본과의 타협으로 나타나는 합리화 속에서 나오는 한계”라는 의견으로 맞섰다.

이어진 토론에서 김재현 교수(경남대 철학과)는 “장지연이 정치적으로 보면 친일행적은 분명하지만, 당시 지식인의 고뇌에 대해 보다 깊이 이해가 필요하다”면서 “러일전쟁 이후로 유학자로서의 한계, 자기모순, <매일신보>에 글을 쓰게 됐는가에 대한 지식인의 내면 풍경을 이해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장지연에 대해 단지 친일을 했다는 것만 부각해 단죄식으로 평가가 나아가지 않았으면 한다”는 제안도 내놓았다.

이날 토론자로 참석한 김훤주 기자(경남도민일보)는 “당시 상황이 엄혹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것은 친일행적에 대한 정상참작일 뿐 친일이 부정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이제 장지연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감정이입이나 덧칠을 하지말고, 사실 그 자체를 햇볕에 내놓고 말리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밖에 강창덕 경남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공동대표는 “장지연이 친일관련 글을 쏟아낸 것은 한일합방 이후”이라면서 “이는 장지연이 일본이 천년, 만년 조선을 지배할 것이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엄연히 드러난 장지연의 친일행적을 두고 사소한 일로 덮어버리자는 것은 그가 독립유공자인 만큼 자연인과 다른 더욱 엄격한 잣대가 들여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위암 장지연의 항일과 친일언론> 토론회 인터넷 중계


 


사회: 이건혁(창원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발제1: 김남석(경남대 정치언론학부 교수)
발제2: 이용창(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토론: 김재현(경남대 교수), 김훤주(경남도민일보 기자), 추경화(향토사학자), 강창덕(경남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언제: 2005년 12월 9일 오후 4시
어디서: 경남도민일보 3층 강당
주최: 전국언론노동조합
주관: 경남민언련, 부울경 언노협


※김남석 이용창 발제문 내려받기


이건혁: 먼저 발표자부터 간략하게 소개하고 토론을 시작하겠습니다(이후 김남석, 이용창, 김재현, 김훤주, 추경화, 강창덕 대표 소개함). 


 













 



 


 


▲ 이건혁 교수


 


위암 장지연 선생의 과거 항일 언론활동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일반적인 정서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최근 밝혀지고 있는 1910년 언론활동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요. 최근 학술적인 연구를 통해 새로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이러한 부분을 다시 확인하고 전체적으로 인식을 함께하는 하는 뜻깊은 자리입니다. 남한 사회에서 친일의 문제가 해방이후 정리되지 못한 채 흘러 왔고, 해방 60년이 지난 지금도 일제시대 정리는 못 다한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장지연 개인의 문제가 아닌 당시 활동한 지식인의 현실인식, 세계관에 대한 객관적 토론의 기회로 이 자리가 활용되었으면 합니다. 곧바로 발제로 들어가겠습니다.


김남석 : 반갑습니다. 김남석입니다. 위암 장지연에 대한 친일문제와 관련해서 지난달 경남대에 학술대회에 이어 오늘 다시 발제를 맡았습니다. 제가 위암 장지연 선생의 친일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은 2003년 경남도민일보의 보도이후부텁니다. 덕분에 제 전공은 아니지만 구한말 한국사회 정세에 깊게 알게 됐고요. 당시 지식인들의 어려운 생활을 알게돼 ‘감정 이입’이 됩니다. 


 













 



 


 


▲ 김남석 교수


 


 오늘 발표는 지난번 발제 이후 그 다지 큰 진전은 없습니다. 따라서 잠정적인 것을 발표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지난번 발표문을 그대로 읽을 수는 없고 해서 따로 발제문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정보는 필요한 것이니 머리말을 가지고 시작하겠습니다. 


  장지연 선생은 구한말 대표적인 언론인입니다. 가장 많은 저작과 문필로서 결과를 남겼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에 논설 ‘시일야 방성대곡’을 게재하여 언론인으로서 강한 역사적 족적을 남겼습니다. 이후 1908년 블라디보스톡에서 <해조신문> 창간 멤버로 초빙돼 주필로서 활동하기도 했고, 1909년 귀국해서는 <경남일보> 창간과 더불어 역시 주필로 초빙돼 1년 여 동안 활동을 펼쳤습니다. 또 <매일신보>에 많은 글을 기고해 문필가로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장지연 선생은 언론인으로 생애을 마감했던 것이지요. 아무튼 저는 장지연 선생이 그 당시를 지식인 가운데서 가장 투명하게 내보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대적 상황과 지식인에 대해 숙고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지연의 자강론적 민족운동이 친일행적으로 이르게 되는 변화의 과정에는 장지연의 근대인식에 있어서의 한계가 놓여 있습니다. 구한말 당시 개신유학파들도 조선에 대한 인식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어쨌든 구한만 지식인들은 서양세력보다는 동양세력을, 일본을 통한 조선의 발전 등을 모색했던 것 같습니다. 일본에 대한 신뢰를 깔고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유교적 질서에 대한 강한 신뢰감과 함께 청나라가 아닌 합리적 국가 정보체제로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 평화모색, 장지연도 이러한 흐름에 서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는 현실인식에 대한 시각차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 극명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즉 신채호 등은 열강에 의한 조선의 침탈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타협이냐, 저향이냐, 그리고 어떤 형태의 저항을 선택하느냐 등등 논란이 분분하기 때문입니다.


  장지연의 사상적 배경은 먼저 유학자로서의 배경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상주에 머물며 관직으로 나아가는 30대까지 유학자들과 교류를 하며, 지식을 쌓았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유교적 질서에 대한 강한 신뢰가 있었고요. 생애를 통틀어도 이러한 생각을 버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한일합방’이후로는 보수 친일적인 관료들과도 교류를 상당히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매일신보>에 기고할 때까지 유교인사들과도 교류가 상당히 오래됐고요. 새로운 유교적 질서 확립을 위한 <대동교>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국제정세 인식을 제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즉 새로운 국제 질서를 바라볼 수 있는 지식, 근대관…. 환골탈태로서의 인식은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받아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1904년 이후 <대한매일신보>를 제외한 한국언론에 대한 일제의 사전검열이 시행됩니다. 그러나 ‘시일야 방성대곡’은 사전 검열을 받지 않아 제재를 받았습니다. <해조신문>에서도 일제 감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안중근 심문 요지서 이런 대목이 나오고요. 장지연에 대한 첩보보고도 이뤄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무튼 ‘시일야방성대곡’이후부터는 특급요시찰 대상이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장지연 선생이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저술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도 원고자료가 있던 집이 가택수색을 당했고, 아들과 함께 강금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경남일보>와 인연을 맺게 된 배경에는 당시 도지사를 비롯한 친일 관료, 실업인들과 교유 관계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평양과 대구에서도 신문을 만들어보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신문을 전체적으로 꾸려내는 사람이 없었던 게 실패의 요인이었습니다. 아무튼 장지연은 신문 편집의 전반적인 편집을 총 지휘하는 ‘주필’직을 제의 받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당시 경남일보의 편집형태를 보거나, 최기영 선생의 논문 등을 보건대 장지연이 신문에 관여할 수 있는 여지는 크게 줄어 있었던 같습니다. 그리고 <경남일보> 자체가 큰 활동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이미 이때는 신문을 만드는 것 자체가 그 시대의 총독부, 통감부 등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신문에 대해 다른 기능을 요구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신문을 발행할 이유와 여지가 충분했다고 봅니다. 이런 배경이 있었던 만큼 ‘천장절’기사 게재 등은 시대상황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일신보> 기고활동은 일제의 회유에 의해 문필활동을 재개하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장지연의 본래 사고 속에는 앞서 말한데로 일본과 조선의 통합을 염두에 둔 것도 배경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좀 더 정확한 자료를 제시할 수 있어야겠지만, 어느 논문에서 봤는데요. <매일신보>에 글을 쓰기 전에부터 총독부 인사들과 교류가 있었던 같습니다. 유교, 불교 인사들과도 여러 교류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들 중에도 친일인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장지연 선생은 문필활동에 대한 끝없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장지연의 친일평가에 있어서는 앞서 말씀드린 세계사 인식의 한계, 초기 한시를 쓰던 때부터 말기가지 민인에 대한 애정을 끝까지 이어갔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언론활동에 대한 열정은 언론인식으로서의 근대인식은 선각자임에 분명합니다. 끝으로 당시 많은 사람들이 친일행적으로 개인의 영달을 누렸지만, 장지연 선생의 경우 극히 미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맙습니다.


이건혁: 김남석 교수님의 발제 잘 들었습니다. 곧바로 이용창 선생님의 발제를 듣겠습니다.


 













 



 


 


▲ 이용창 연구원


 


이용창: 장지연에 대한 오늘 주제가 항일과 친일인데요. 이미 잘 알려진 부분에 있어서도 세밀하게 조사된 게 많이 부족하다고 봅니다. 또 역사학계에서 인용하는 글들을 보면 하나 하나에 대한 사실 부분을 그냥 일반적으로 넘기는 부분 많기 때문에 이런 부분도 정교하고 치밀하게 다뤄야 합니다.


  강명관 선생은 장지연이 <매일신보>에 기고한 글이 730여 편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지난번 친일인명사전 명단을 만드는 작업중에 확인된 것에 따르면 670여 편인 것으로 확인이 됩니다. 그러나 한국민족문화대백사전 등을 보면 1910년 이후 특히 <매일신보>에 대한 활동이 다 누락돼 있습니다. 장지연에 대한 평가는 거의 없고, 원문만 소개하는 형태에 불과합니다.


시와 관련해서는 특히 누락이 심합니다. 이러한 한계는 지금까지 이루어진 대부분의 연구가 1910년 이전의 계몽운동기에만 국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까지 1910년대 <매일신보>에 실린 위암 장지연의 글을 중심으로 그의 사상과 한계, 친일행적 등을 무게 있게 거론한 글은 현재까지 4편 정도가 확인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장지연의 언론활동을 언급한 대부분의 연구들이 그의 <매일신보>시기를 아예 제외시켜 놓고 있다는 점입니다.


1910년 8월 이후 총독부 체제하에서 발행되어 1915년 폐간 당시에는 친일성향의 논조를 펴던 <경남일보>의 주필을 맡은 것과 달리, <매일신보>에 670여 편의 글을 게재한 것은 언론 활동이 아니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한국 근대사에서 언론이 갖는 역할과 정체성 정립을 위해서라도 이 점은 재고되어야 하고, 좀 더 폭넓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합법적’으로 신문·잡지가 발행되기 전까지 조선 내에서 발간된 국한문신문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유일했습니다. 장지연의 경우 4년 남짓 700여편의 글이 확인된 만큼 그 역할이 중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매일신보>는 일제의 식민정책의 선전, 내선일체(동화주의), 총독의 신정에 대한 끊임없는 선전에 이용됐습니다. 따라서 <매일신보>의 역할과 이러한 곳에 글을 쓰는 사람들의 책임은 이광수 등이 일제점령 말년에 행했던 징용과 젊은이들을 전쟁으로 몰아세웠던 역할과 전혀 다를 게 없습니다.


  <경남일보>는 일제 강점 초기 유일한 지역 신문이면서 전국 규모의 신문이었습니다. 흔히 장지연이 게재한 황현의 시가 ‘절명시’로 불려지는데, 이는 인위적으로 붙인 것입니다. 저는 ‘유시(遺詩)’라고 부르겠습니다.


  <경남일보>의 주필로 황현의 유시를 게재한 것과 1910년 11월 5일자 1면에 일본왕 메이지의 생일인 천장절 기념관련 기사를 실은 행위는 모두 ‘역사적 사실’로 동일하게 다루어져야 하지만, 후자의 사실은 직접 다루어지지 않아 왔습니다. 이것은 <경남일보>의 발간에 한 축을 책임지고 있는 주필로서의 장지연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려는 것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천장절에 대한 기념 기사가 실린 것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가 없습니다. 90년대에 나온 국어사전을 보면 주필이라는 용어를 “제일위의 기자로서 사설·논설 또는 중요한 기사를 쓰는 사람. 칩-에디터(chief-editer)”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장지연이 <황성신문> 사장으로서 갖는 역할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경남일보> 주필로서 장지연의 역할도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황성신문>에 보도된 <시일야방성대곡>도 무기명 논설로 발표된 것이지만, 당시 <황성신문>에서 차지하는 장지연의 역할이 대표성을 갖는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남일보>에서 선전한 천장절 기념관련 글에 대한 책임성은 상당수 있습니다.  


  발제문 33쪽(발제문)중간을 보면 장지연이 경남일보를 그만 둔 이후의 구체적 행적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장지연은 <매일신보>에 대해 초기에는 부정적인 생각(사설이 아첨이 많고, 기사는 숨기는 일이 많다)을 가져 초빙 제의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장지연과 <매일신보>와의 관계를 말해 주는 자료들을보면 ‘초빙을 제안 받았으나 거절했다’는 것만 기록되었을 뿐이고, 판단이 모호한 표현으로 <매일신보>와의 관계를 처리하고 있습니다.  


  장지연이 <매일신보>에 기고 글이 모두 친일논조의 글이라는 사실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1917년 일본 군함이 화약고 폭발로 침몰하여 일왕이 위문한 소재로 시를 쓴 것이나, 1910년 10월 일본에 큰 홍수가 일어 일왕이 구휼금을 내린 것을 소재로 시를 보면 은총과 은혜를 느끼는 주체를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1917년 6월 순종이 일왕을 만나러 일본으로 가는 것을 두고(이것은 영친왕과 일본 왕실의 결합을 통해 이왕가의 권위를 낮추어 식민통치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려는 매우 치욕적인 일이었다) “일선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고 찬양한 것은 일제의 식민통치가 이미 거부할 수 없는 현실임을 받아들인 것에 다름 아니고요. 1917년 6월 8일에 실린 시에서는 순종의 일본 방문을 계기로 내선의 인민이 장애물을 걷고 나라의 기틀이 더욱 공고해질 것이라며 “만세 만만세”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는 장지연이 당시 근대적 인식에 대한 사상적 한계가 있었기보다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합리화 시대가 갖는 고뇌와 세계관에 대한 압박감, 또 사회진화론에 대한 진지한 고민 속에서 일본과의 대결과 타협으로 나타나는 한계를 유교로서 막아보려 했던 것이 장지연의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이건혁: 토론순서로 넘어가겠습니다. 논점과 함께 평가를 간단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김재현 교수님부터 시작하죠.


 













 



 


 


▲ 김재현 교수


 


김재현:이용창 선생님께서 구체적인 자료를 많이 밝혀주시고, 지적해 줘서 공부가 많이 됐습니다. 도민일보가 장지연에 대한 기대와 신뢰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친일행적이 알려지면서 일종의 배반감과 같은 게 상당히 작용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김훤주 기자가 더욱 열정적으로 파헤쳤고요. 그러나 김훤주 기자가 1905년 <시일야방성대곡>까지 친일이었다고 문제를 제기하는 대목에서는 화가 납니다. 


  1905년 당시 우리는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특히 보안법과 검열 제도 등으로, 아니 심지어 총독부에서도 만든 신문조차 검열을 했을 정도였지요. 저를 토론자로 불러낸 것은 아무래도 장지연에 대한 옹호하는 입장을 듣고 싶어서 일건데…. 아무튼 장지연의 친일행적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천장절 시는 1913년까지 신문에 싣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일제가 <경남일보>발행을 허락해 준 것은 식민통치의 시금석으로 삼았던 것으로 평가합니다. 그리고 주필책임론이 제기되고 있지만, 1913년 <매일신보>에 초빙 제의 받았을 때 비판하면서 왜 갔을까요? 연속성에 있어 아직 해명이 안 되는 부분입니다. 저는 장지연이 나름대로 치열하게 버티다가 <매일신보>로 갔다고 평가합니다.


일본의 힘은 그 당시 대단했습니다. 또한 시대를 깊이 이해하는 측면에서 러일전쟁 이후에 대한 유학자로서의 한계 등이 있었습니다. 만일 장지연이 절필을 했다면 아마 후대에 아무런 불명예 없이 훌륭한 언론인으로 남았겠지요. 아무튼 저는 장지연이 <매일신보>에 글을 왜 쓰게 됐는가에 대한 지식인들의 내면 풍경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정치적으로 친일행적이 분명하지만 당시 지식인의 고뇌에 대해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천장절에 대한 책임론에 대해서는 충분히 토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김훤주 기자


 


김훤주: 이 자리까지 오게된 것은 2003년 3월 장지연 관련 기사를 쓰게된 것 때문입니다.  당시 저로서도 장지연이 쓴 친일기사가 있다는 것에 많이 놀랬습니다. 굉장한 압박감도 느꼈고요. 당시 위암장지연기념사업회에 전화해서 멘트 받았는데, 상임이사는 “다른데서 다 가만 있는데, 왜 언론이 나서서 왜 그러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시일야방성대곡>이 장지연에 대해 객관적으로 빛과 함께 그림자를 보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매일신보>에 대한 초빙 거절은 나왔는데, 초빙에 응해 글을 썼다는 것은 나와있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감히 저는 학문하는 분들이, 그리고 언론인들이 그동안 너무 비겁하지 않았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기사를 쓰면서 위암장지연기념사업회에서 펴낸 글을 읽었는데, 이게 논문인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장지연에게 약점이 될만한 부분은 슬그머니 흘려 지나가는 부분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80년대 후반에는 장지연의 기사나 문학작품 가운데 친일적인 것들이 있었다는 연구들이 역사학계에서 찾아집니다. 그동안 언론계나 언론학계는 입을 닫고 있었습니다. 빛과 그림자를 같이 보는 걸 막았습니다. 아니 국민 전체를 착각하게 만든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앞으로 장지연에 대해 그림자를 찾아 말하는 게 균형잡힌 시각에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엄혹함은 김재현 교수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친일행적에 대한 정상참작은 되겠지만, 친일이 아니다라는 것은 아닙니다.
  













 



 


 


▲ 추경화씨


 


추경화: 8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파 명단 가운데 장지연 선생도 포함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장지연 선생은 친일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장지연 선생은 의병 궐기 글을 발표하고, 당시 항일 운동 때문에 수십 차례 감옥 드나들었습니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서 고문도 당하고, 1907년 대한자강회 해산 당시에도 고문을 당한 걸로 돼 있습니다.  1908년 일제 탄압이 극심해 러시아로 망명했는데, 거기서도 친일파로 보이는 자에게 습격을 당해 크게 다쳤습니다. 따라서 그동안 많은 옥고를 치른 것으로 볼 때 확실한 독립투사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기고문 몇 개로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공으로 허물을 덮어주는 게 조상에 대한 예의라 봅니다. 장지연 선생은 56세가 되기 전에 별세했습니다. 문필가로서, 신문기자로서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었음에도 그렇게 죽은 것은 항일 과정에서 고문과 체포 등이 마지막에 결과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670여 편의 글이 다 친일에 관계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1895년부터 1910년 약 15년동안 항일투쟁을 하셨고, 일제의 회유와 고통, 괴롭힘 등이 수명단축에 영향을 줬던 만큼 친일파라 하더라도 다르게 판단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 강창덕 대표.


 


강창덕: 우리나라는 일제 통치 당시 반민족 행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 대한민국이라는 정부의 이름을 걸고 단 한 사람도 사형을 하지 않았습니다다. 프랑스 정부만 하더라도 15만명에게 실형을. 1만명을 사형시켰습니다. 평가가 엄정했던 것이지요.


경상남도 땅 크기만한 벨기에서도 반민족 행위를 저지른 5만 5000건에 대해 실형을 내렸습니다. 서두에 이야기를 이렇게 꺼내는 이유는 장지연이 한 지역에서 추앙 받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국정 교과서에도 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일반사람들과 다른 도덕, 민족, 각도에서 평가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언론인 중에서도 가장 추앙받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공이 허물을 덮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장지연은 1905년 저 유명한 <시일야방성대곡>을 썼습니다. 그런데 1910년 이후 노골적인 친일행위가 곳곳에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1910년대 이후를 잘 봐야 합니다. 1910년 이후에 장지연이 왜 친일관련 글을 쏟아내는가, 그것은 바로 한일합방 이훕니다. 저는 장지연이 일본이라는 나라가 천년만년 조선을 지배, 조선은 절대로 자주독립을 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판단합니다.


근거는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언론인으로서 그가 일반인들 보다 당시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그렇습니다. 저는 이 때부터 친일관련 글을 쏟아 낸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천장절은 일제 왕의 생일 축하하는 것입니다. 여러 논란이 있습니다만, 평범한 가정 주부가 남편 생일을 안 챙겨주면서, 불륜 대상인 남자 생일을 챙기면 충분한 이혼감입니다.


장지연은 곧잘 술병을 차고,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를 달랬다고 합니다. 저는 이것도 듣거나 보기에 따라 다르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지연이 굽어보며 미개한 백성들을 어떻게 일본에 따르게 할까”로 말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드러난 친일행적 조차 사소한 일로 덮어가자고요? 장지연은 평범한 일반인이 아닙니다. 독립유공자입니다. 독립유공자는 민족과 조국 앞에 한치 부끄럼 없는 그런 사람이 되어 추앙 받아야 합니다.


김재현: 장지연의 허물을 다 덮자는 건 아닙니다. 시대에 대한 이해를 같이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튼 1905년의 장지연과 1910년의 장지연은 엄청 다릅니다. 갈수록 체제내적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그리고 김형윤의 <마산야화>를 보면 자신의 집 근처에 장지연이 살았고, 그가 아들이 친일관료라 싫었했다고 나오는데 이건 어떻게 봐야하는지 궁금합니다. 김형윤씨도 장지연의 신화적인 측면을 인지하고 있었는지도…. 아무튼 이런 부분들도 앞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용창: <매일신보>는 당시 장지연을 끌어들이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장지연의 글은 대부분 1면에 실렸습니다. 그리고 <매일신보> 초빙 거절 부분도 분명하게 구분해서 봐야합니다. 거절했다고는 하는데 날짜 표기가 없습니다. 근거가 나와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1914년부터 1917년까지 불교진흥회(친일 승려 주도로 조직된 불교단체)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 시대적 자발성, 강압성은 동시에 놓여 있습니다. 왜 <매일신보>와 장지연의 관계 등이 여태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것일까? 저는 의도적으로 은폐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근현대사가 갖고 있는 어두운 부분을 밝혀내야 역사연구의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꼼꼼하게 이러한 것들을 밝혀내야 하는 것입니다.


김남석:  천장절 기사가 게재된 것만 보자면 그 날짜 2면에 상단 2단은 확실히 형식적으로 편집이 돼 있습니다. 그리고 밑에는 통신사에서 받은 기사로 처리했고요. 이토히로부미 죽었을 때 의도적으로 눈에 잘 띄게 편집을 했습니다. 그리고 절명시 게재이후로는 사설 자체는 사라졌습니다.


주필로서 역할이 줄었습니다. 그리고 장지연은 사상적 한계를 극복할 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시대에 적응하는 것조차 어렵지 않았나 말입니다. 그리고 실력 양성파들이 모일 수 있는 구실 역할을 한 <경남일보> 자체으이 성격부터 평가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언론인들이 장지연을 존경한다고요? 언론인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도 5등, 6등 밖에 안됩니다. 또 위암기념사업회에서 나온 자료도 장지연 친일행적이 잘 정리돼 있습니다.


이건혁: 인식의 격차를 좁히는 게 쉽지 않습니다. 어쨌든 논점이 될 만한 것 제기하고, 다시 말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장지연의 공과를 논할 때 역사적 사실 회피 안되고 그대로 드러내야 할 것이냐에 대한 정리 △시대상황에서의 일제 탄압, 압박이라는 한계와 현실 △ 유학자로서 군주제 옹호, 국가주의, 근대적 의식 형성이 가지는 한계 △자발성의 문제 등등 이런 것들을 전체적으로 평가할 때 친일 문제 평가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회자로서 의견을 내기가 조심스럽지만, 장지연 선생이 일본과 친화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긴 하나, 친일파라는 것은 논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상규 (경남신문 노조 위원장): 이용창 선생님께 묻습니다. 당시 36년간 일제 지배 시기 많은 사람 살았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굳이 친일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인지 궁금하고요 왜 언론인이 문제가 되는가를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추경화 선생께도 당시 평균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김주완 : 추경화 선생에게 질문을 드립니다. 명색이 향토연구자가 장지연의 친일문제 있어 분명한 팩트를 놓고도, 마지막 글 몇 편이라는 식으로 슬그머니 왜곡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업적이 위대해서 덮어주자고요? 비유가 적절하지 모르나, 우리는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했더라도 대통령 재임시절 학살에 대한 책임과 독재를 했기 때문에 그를 학살자나 독재자로 기억합니다. 김영삼 대통령도 민주화운동을 했더라도 지금은 IMF를 불러온 무능한 대통령으로 낙인찍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제 시절 당시 국민들에게 그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쳤느냐에 대한 접근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용창: 어려운 질문입니다. 저희 민족문제연구소는 민간단체고, 전공하시거나, 관련 전문가들의 위원회가 구성 돼 잇습니다. 지난 8월 29일 발표를 했던 것은 수록 예정자 명단 보고입니다. 연구소가 그동안 10년 이상 축적된 자료를 내놓는 것이죠. 2007년 말께 완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두 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총서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총서에서는 시대에 것도 총체적으로 살펴볼 것이고요. 또한 당시 총독부의 역할에 대한 자료분석도 진행중입니다. 친일명단의 기준이나 여러 분야 그 이유에 대해서는 보도자료를 통해 상세히 설명을 했습니다. 언론분야는 출판분야까지 합해 40명 가량 됩니다. 한쪽에서는 연구소가 왜 박정희를 타깃으로 하느냐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명단중 군 분야 중에 박정희가 들어갑니다. 그러나 박정희가 차지하는 비중은 작습니다.


  그리고 장지연 뿐만 아니라 홍난도파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37년 이전까지는 알려져 있는데, 이후 자료에는 자료들이 없습니다. 바이올린과 악보 같은 것은 있어도 전향서 등은 없습니다.
  충돌과 마찰은 장기적으로 해결하면 됩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 밝혀지지 않으면 이는 후세대들에 대한 ‘자행’이 됩니다. 어른세대들의 책임이 중요합니다. 갈등은 해결해야하는 것이지 감추는 것으로는 안됩니다.


추경화: 저는 56세 같으면 일찍 돌아가셨다고 봅니다. 당시에는 5∼10세 미만으로 많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평균 연령이 낮은 것이지요. 이것은 통계청 같은 곳에서 확인을 하면 될 겁니다. 김주완 기자가 지적한 부분은 제가 분명히 다시 수정해서 670여 편으로 한 만큼 답이 됐다고 보고요. 아무튼 장지연 선생이 천수를 누리지 못한 것은 항일운동의 결괍니다. 따라서 저는 순국대열에 들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경혁: 오늘 자리가 결론을 내리는 자리는 아니므로 간략하게 얘기하는 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김훤주: 장지연 문제를 보면서 저 스스로 한 평생 사는 게 힘들고 무서운 일이구나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이제 좀 객관적으로 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감정이입이나, 덧칠하지 말고, 사실 그 자체를 햇볕에 내놓고 말리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고 봅니다. 언론이나 보도매체 등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더욱 분발해야 됩니다.


김재현: 장지연이 친일했다, 그러니 장지연 기념사업회는 기념하지 말고, 지방문화재에서도 사라져야 한다? 친일로 단죄만 하는 게 우리들을 포함해 후손들에게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요? 저는 좀 더 정직하게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시대가 어떠했고, 장지연이 어느 순간, <매일신보>에 글을 쓰게 된 것인지를 연구자들이 더 진지하게 연구해야 합니다. 왜 우리나라에는 사상사나 지성사가 없습니까. 이건 제가 봤을 때 불가능합니다. 정치적으로 친일 했다는 것만 밝히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아무튼 언론에서도 이런 부분들을 고민해 주시고, 너무 단죄식으로 이 문제(장지연을 비롯한 친일)를 가져가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용창: 김재현 교수님의 의견에 대체적으로 공감합니다. 단죄는 구시대의 유물입니다. 지금은 진실규명과 화해를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사실적인 부분을 아우르면서 진행해야 합니다. 저는 단죄나 공과론 자체로 얽혀지면 연구와 판단자체가 흐려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김남석: 김훤주 기자는 무미건조하게 보자고 했는데 저는 좀 다릅니다. 이것보다는 우리 입장이 무엇인지, 즉 화풍이 뭐냐는 겁니다. 시민단체나 언론에서 친일 문제를 말할 때 나름대로 화풍을 밝히라는 겁니다. 그래야 친일과 친미 문제에 대한 접근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국가체제가 없을 당시에 대한 오늘의 잣대가 무엇인지 알아야 의미 있게 다룰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것은 국사를 새로 규정하는 일이며. 국사정립 작업과 연관이 돼 있다고 봅니다.


이건혁: 판단을 개입시키기 전에 시대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오늘 토론에서 나눈 문제의식들이 공적인 공간에서 보다 더 많이 논의되기를 기대합니다. 이상 마치겠습니다.<경남도민일보, 05.12.10>


/정리 민병욱 기자 사진/ 유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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