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윤하
회장의 ‘쇠말뚝 사냥’은 이처럼 ‘야마시타 신화’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소 회장이 신동식씨를 통해 직접 들었다는 이 이야기는 1999년 『신동아』
8월 호에 이미 게재된 내용으로, 『신동아』는 신동식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신세우씨 와 야마시타 장군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영어가
유창했던 신세우씨는 전범재판 때 야마시타 등 일본군 장성들의 변론을
맡기도 했다. 재판 2심에서 야마시타는 세우씨의 변론 덕에 총살형에서
교수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사체나마 깨끗이 보존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 선고 며칠 뒤 야마시타는 감옥에서 죽기 직전 은인인 세우씨에게
놀라운 비밀을 고백했다고 한다. 한반도 산 곳곳에 혈침을 박아놓았다는
것과 수탈한 보물들의 행방에 관한 것 등이었다.”
물론 당시
『신동아』 기사의 제목 「일제의 ‘쇠말뚝 풍수침략’은 고도의 심리전이었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신동아』 역시 신동식씨의 주장을 별다른 검증
없이 소개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월간 『군사세계』의 김능화 논설위원이
전범 재판기록 등 역사적 사료를 분석해 작성한 「야마시타 육군대장의
최후」라는 글에 따르면, 야마시타의 통역관은 ‘하마모토’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일본인이었으며, 1946년 당시엔 A급 전범 일부만 극형인 교수형을
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야마시타의 변호인단에 조선인 통역관이
포함되었다는 이야기도 어불성설이다. 당시 변호인단은 승전국인 미군
장교들이 맡았기 때문이다. 결국 소윤하 회장이나 『신동아』모두 첫
단추부터 잘못 꿴 셈이다.
어쨌거나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침략전쟁 당시 일본의 제14방면군 사령관 출신으로
전범재판을 통해 처형당한 인물이다. 그가 식민지 전역에서 약탈한 금을
금궤로 만들어 숨겨두었으며 아직까지도 이 금궤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보물 사냥꾼’들에게 신화처럼 전해오기도 한다. 그런데
소윤하 회장의 쇠말뚝 셈법은 바로 그 ‘야마시타 신화’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야마시타가
박았다는 쇠말뚝이 365개인데, 그 중 신세우씨 부자가 수십 개를 뽑았을
것이고, 1985년 백운대에서 쇠말뚝을 뽑은 이후에 활동해온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에서 뽑은 것이 33개, 제가 뽑은 것이 140여개가 되니까,
아직도 족히 수십 개 이상이 남았다고 보는거죠.”
연대측정의
비밀과 소윤하 회장의 거짓말
소윤하
회장이 야마시타의 풍수침략설에 근거해 쇠말뚝을 뽑은 곳은 남해안의
무인도인 백도였다. 그가 전해들은 바로는 1894년 일본이 명성황후 시해를
도모하기 위해 가토마루 소장을 시켜 백도에 쇠말뚝을 처음 박았으며,
1936년에는 야마시타 자신이 상부의 지시를 받고 혈침 12개를 더 박았다고
한다.
“해안
절벽에 매달려 26개의 쇠말뚝을 뽑았지요. 28개를 찾았는데 두 개는
무인등대의 물탱크 안에 박혀 있어 아직도 뽑지 못하고 있습니다. 백도에서
뽑은 쇠말뚝은 서울대에 연대측정을 의뢰했는데, 일제 시대 것이 맞았습니다.”
연대측정을
의뢰했는데, 일제시대 것으로 밝혀졌다면 쇠말뚝 진위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일이었다. 좀 더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사성 탄소연대측정 결과, 탄소의 연대가 3만년으로 나왔어요. 3만년
이라는 것은 석탄이라는 이야기거든요. 일제시대에 우리 측은 숯을 사용해
쇠를 제련한 반면, 일본은 석탄을 사용해 쇠를 제련했습니다. 결국 일본에서
제련한 쇠라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박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지요.” 그럴듯한 이야기지만, 논리적으로 매우 모순된 이야기였다.
석탄이 키워드라면, 해방 이후 한국에서 석탄을 이용해 제련한 철은
어떻게 다르다는 말인가. ‘석탄’과 ‘일제’라는 말에 반드시 등식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자는 소 회장이 연대측정을 의뢰했다는
서울대 연구실을 수소문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탄소연대
측정과 관련해, 국내에서 유일하게 250만 달러짜리 고가 장비를 보유하고
있다는 서울대 AMS 연구실 윤민영 박사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2001년
쯤에 그런 의뢰를 받은 적이 있는데 연대측정을 할 수 없었습니다. 탄소를
추출해 연대를 측정하려고 했는데, 당시의 쇠말뚝은 연철로 탄소량이
극히 적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최근 공업적으로 제강된 철, 즉 화석연료를
통해 만들어진 철은 탄소연대측정이 거의 불가능하지요. 가령 조선 전기
이전에 숯 등으로 제련된 철일 경우 거기에 함유된 탄소를 통해 연대
측정이 가능하지만, 용광로에서 녹여 만든 철일 경우 연대측정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윤 박사는
“현재까지 알려진 방법으로 쇠말뚝이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인지 그
이후에 만들어진 것인지 구별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다”면서
“굳이 연대를 측정하려면 쇠말뚝에 포함된 다른 불순물을 분석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 마저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소윤하
회장의 거짓 증언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사실 허무함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였다.
윤 박사의
조언은 과학의 힘을 빌어서도 일제 혈침의 진위를 가려내기 힘들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보아야만 했다. 문화재의
연대를 측정하는 고고학적 접근은 어떨까. 문화재연구소 연대 측정실
이현주 연구원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안 그래도
쇠말뚝과 관련해 문화재청이나 관련 단체에서 문의전화가 와서 몇 차례
답변한 적이 있어요. 그러나 실제로 연대 측정을 해 본 사례는 없습니다.
다만 쇠말뚝의 연대를 측정하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연구소의 장비로는 불가능 합니다. 서울대 AMS 연구소라면
가능할지 모르겠는데요. 물론 쇠말뚝 하나만 가지고 곧바로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구요. 사학자나 고고학자 등과 공동연구를 해야
가능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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