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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을 마비시킨 집단최면의 주술, 쇠말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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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는 월간말 김재중 기자의 양해를 얻어
전문을 게재한 것입니다. 기사 게재를 허락해주신
월간말 김재중 기자께 감사드립니다.

 

 

월간
김재중 기자

 

일본이
침략전쟁 당시, 우리의 민족정기를 훼손하기 위해 백두대간의 명산 산마루
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상식’으로 통하는 이 이야기가, 실은 역사 속의
기록이나 과학적인 증명을 통해 단 한번도 검증된 바 없다는 점을 알고
있는 이는 드물 것이다. 쇠말뚝과 관련된 ‘상식’의 세계에 불온한(?)
도전을 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시청자
여러분, 이 앞에 놓인 물건이 뭔지 궁금하시죠? 일제가 민족정기를 끊겠다며
남한산성에 심어놓은 쇠말뚝인데요. 보시는 것처럼 지면에 노출된 부분은
녹이 많이 슬어있죠? 이 같은 쇠말뚝은 최근 남한산성에서 무려 50여개나
발견됐습니다. 한 지역에서 이처럼 많은 쇠말뚝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죠?
특히 최근 신사참배로 한일 관계에 먹구름이 낀 가운데 이 같은 소식은
우리 국민들을 더욱 자극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28일, KBS 아침뉴스의 내용이다. 당시 앵커는 남한산성에서 발견된 쇠말뚝
중 한 개를 직접 스튜디오에 들고 나와 녹슨 부분까지 보여주며 “일제가
민족정기를 끊겠다며 남한산성에 심어놓은 쇠말뚝”이라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한 바있다.

이른 아침부터
이 방송을 지켜본 시청자들은 십중팔구 일제의 만행에 울분을 느끼며
심하게 혀를 찾을 것이다. 충분히 개연성 있는 상상이다. 일본이 침략전쟁
당시 한반도의 혈맥을 끊겠다며 방방곡곡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것은
한국인들에게 거의 ‘상식’과도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런 뉴스를 워낙 자주 접하다보니 별다른 충격을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날 KBS가 보도한 쇠말뚝 관련 뉴스는 다른 언론에서도
비중 있게 다룬 내용으로, 이들 언론사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일제의
소행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야마시타
신화’에서 출발한 ‘쇠말뚝 사냥’

 쇠말뚝과
관련해 언론에 가장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는 사람은 민족정기선양위원회 소윤하(61)
회장이다. 그는 이번에 남한산성에서 50여개의 쇠말뚝을 뽑아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또한 이번 건까지 포함하면 무려 140여 개의 쇠말뚝을 뽑아냈으니,
한마디로 표현해 ‘쇠말뚝 사냥꾼’인 셈이다.

“일제
사령관이었던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처형당하기 전에 조선 땅 전역에
모두 365군데의 혈침을 박았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그의 통역관으로 일했던 신세우라는 사람이 직접 들었다는
군요. 이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쇠말뚝을
뽑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신세우씨의 아들인 신동식이라는
사람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
민족정기선양위원회 소윤하 회장 @박진희 기자

 

소윤하
회장의 ‘쇠말뚝 사냥’은 이처럼 ‘야마시타 신화’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소 회장이 신동식씨를 통해 직접 들었다는 이 이야기는 1999년 『신동아』
8월 호에 이미 게재된 내용으로, 『신동아』는 신동식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신세우씨 와 야마시타 장군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영어가
유창했던 신세우씨는 전범재판 때 야마시타 등 일본군 장성들의 변론을
맡기도 했다. 재판 2심에서 야마시타는 세우씨의 변론 덕에 총살형에서
교수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사체나마 깨끗이 보존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 선고 며칠 뒤 야마시타는 감옥에서 죽기 직전 은인인 세우씨에게
놀라운 비밀을 고백했다고 한다. 한반도 산 곳곳에 혈침을 박아놓았다는
것과 수탈한 보물들의 행방에 관한 것 등이었다.”

물론 당시
『신동아』 기사의 제목 「일제의 ‘쇠말뚝 풍수침략’은 고도의 심리전이었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신동아』 역시 신동식씨의 주장을 별다른 검증
없이 소개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월간 『군사세계』의 김능화 논설위원이
전범 재판기록 등 역사적 사료를 분석해 작성한 「야마시타 육군대장의
최후」라는 글에 따르면, 야마시타의 통역관은 ‘하마모토’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일본인이었으며, 1946년 당시엔 A급 전범 일부만 극형인 교수형을
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야마시타의 변호인단에 조선인 통역관이
포함되었다는 이야기도 어불성설이다. 당시 변호인단은 승전국인 미군
장교들이 맡았기 때문이다. 결국 소윤하 회장이나 『신동아』모두 첫
단추부터 잘못 꿴 셈이다.

어쨌거나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침략전쟁 당시 일본의 제14방면군 사령관 출신으로
전범재판을 통해 처형당한 인물이다. 그가 식민지 전역에서 약탈한 금을
금궤로 만들어 숨겨두었으며 아직까지도 이 금궤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보물 사냥꾼’들에게 신화처럼 전해오기도 한다. 그런데
소윤하 회장의 쇠말뚝 셈법은 바로 그 ‘야마시타 신화’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야마시타가
박았다는 쇠말뚝이 365개인데, 그 중 신세우씨 부자가 수십 개를 뽑았을
것이고, 1985년 백운대에서 쇠말뚝을 뽑은 이후에 활동해온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에서 뽑은 것이 33개, 제가 뽑은 것이 140여개가 되니까,
아직도 족히 수십 개 이상이 남았다고 보는거죠.”

연대측정의
비밀과 소윤하 회장의 거짓말

소윤하
회장이 야마시타의 풍수침략설에 근거해 쇠말뚝을 뽑은 곳은 남해안의
무인도인 백도였다. 그가 전해들은 바로는 1894년 일본이 명성황후 시해를
도모하기 위해 가토마루 소장을 시켜 백도에 쇠말뚝을 처음 박았으며,
1936년에는 야마시타 자신이 상부의 지시를 받고 혈침 12개를 더 박았다고
한다.

“해안
절벽에 매달려 26개의 쇠말뚝을 뽑았지요. 28개를 찾았는데 두 개는
무인등대의 물탱크 안에 박혀 있어 아직도 뽑지 못하고 있습니다. 백도에서
뽑은 쇠말뚝은 서울대에 연대측정을 의뢰했는데, 일제 시대 것이 맞았습니다.”

연대측정을
의뢰했는데, 일제시대 것으로 밝혀졌다면 쇠말뚝 진위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일이었다. 좀 더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사성 탄소연대측정 결과, 탄소의 연대가 3만년으로 나왔어요. 3만년
이라는 것은 석탄이라는 이야기거든요. 일제시대에 우리 측은 숯을 사용해
쇠를 제련한 반면, 일본은 석탄을 사용해 쇠를 제련했습니다. 결국 일본에서
제련한 쇠라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박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지요.” 그럴듯한 이야기지만, 논리적으로 매우 모순된 이야기였다.
석탄이 키워드라면, 해방 이후 한국에서 석탄을 이용해 제련한 철은
어떻게 다르다는 말인가. ‘석탄’과 ‘일제’라는 말에 반드시 등식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자는 소 회장이 연대측정을 의뢰했다는
서울대 연구실을 수소문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탄소연대
측정과 관련해, 국내에서 유일하게 250만 달러짜리 고가 장비를 보유하고
있다는 서울대 AMS 연구실 윤민영 박사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2001년
쯤에 그런 의뢰를 받은 적이 있는데 연대측정을 할 수 없었습니다. 탄소를
추출해 연대를 측정하려고 했는데, 당시의 쇠말뚝은 연철로 탄소량이
극히 적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최근 공업적으로 제강된 철, 즉 화석연료를
통해 만들어진 철은 탄소연대측정이 거의 불가능하지요. 가령 조선 전기
이전에 숯 등으로 제련된 철일 경우 거기에 함유된 탄소를 통해 연대
측정이 가능하지만, 용광로에서 녹여 만든 철일 경우 연대측정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윤 박사는
“현재까지 알려진 방법으로 쇠말뚝이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인지 그
이후에 만들어진 것인지 구별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다”면서
“굳이 연대를 측정하려면 쇠말뚝에 포함된 다른 불순물을 분석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 마저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소윤하
회장의 거짓 증언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사실 허무함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였다.

윤 박사의
조언은 과학의 힘을 빌어서도 일제 혈침의 진위를 가려내기 힘들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보아야만 했다. 문화재의
연대를 측정하는 고고학적 접근은 어떨까. 문화재연구소 연대 측정실
이현주 연구원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안 그래도
쇠말뚝과 관련해 문화재청이나 관련 단체에서 문의전화가 와서 몇 차례
답변한 적이 있어요. 그러나 실제로 연대 측정을 해 본 사례는 없습니다.
다만  쇠말뚝의 연대를 측정하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연구소의 장비로는 불가능 합니다. 서울대 AMS 연구소라면
가능할지 모르겠는데요. 물론 쇠말뚝 하나만 가지고 곧바로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구요. 사학자나  고고학자 등과 공동연구를 해야
가능 하겠지요.”

 

 

이 연구원
역시 난색을 표명한 셈이었다. 미술사학 등의 뒷받침 없이 탄소성분만
으로 쇠말뚝의 연대를 측정하기 곤란할 뿐만 아니라, 오차범위가 50년이나
되는 만큼 일제시대 것이냐 그 이후의 것이냐를 판가름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풍수침략’
이외의 가설들

 그렇다면
우리 머릿속에 “일본이 민족정기를 말살하기위해 박았다”고 각인되어
있는 쇠말뚝의 실체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 가설이 존재하지만, ‘일제
혈침’을 부정하는 주장 역시 뚜렷한 근거를 확보하고 있지는 못한 상황이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을 지냈던 이이화 박사의 주장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 박사는  지난 1999년에 펴낸 자신의 저서 『역사풍속기행』을
통해 “쇠말뚝과 관련된 일제의 문헌자료가 전무하다”며 “일제 당국이
지도작성의 과정에서 산마루에 쇠말뚝을 박아 표지로 삼았던 것”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물론 이 박사의 주장은 풍수지리가 뿐만 아니라 토지측량
전문가들조차 반박하고 나서기도 했다. 위치나 생김새로 볼 때, 발견된
쇠말뚝을 측량용으로 보기 힘들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한편 일제
혈침이 발견됐다며 온 나라가 호들갑을 떨고 난 뒤에, 결국 우리 측
무속인의 소행으로 결론 난 경우도드물지 않았다. 지난 4월, 다산 정약용의
묘에서  길이 40cm 가량의 철침 10개가 발견되자 주요 일간신문들은
“일제가 옛 성현들 의 묘에 쇠말뚝을 박아 우리 민족의 혈을 끊으려
했다”고 보도해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그러나 정작 정씨 종친회에서는
“묘 단장을 한지 얼마 안 되었다”며 “무속인의 짓인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 비슷하게는 1999년 충무공 이순신의 묘에 한 무속인이
칼을 꽂았다가 경찰에 덜미를 잡힌 사례도 있었다. 또한 ‘쇠 말뚝 사냥꾼’
소윤하 회장 역시 무속인에게 속아(?) 넘어간 사연을 가지고 있었 다.

“최근
지리산 옥녀봉 근처에서 무게가 80kg이나 나가는 청동제 쇠말뚝을 발견하고
이를 제거한 적이 있어요. 일제의 소행인 줄 알았고, 언론에서도 그렇게
보도했는데 알고 봤더니 도꾼(무속인) 3명이 그랬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들을 만나봤는데, ‘일제가 쇠말뚝을 박아서 민족정기가 흐려졌기
때문에 동으로 만든 쇠말뚝을 박아 그것을 막으려고 했다’는 군요.”

소 회장은
“속리산 문장대에서 발견한 8개의 쇠말뚝 중 6개도 가짜로 판명됐다”
는 사실을 털어 놓기도 했다. 그는 “1960년대에 문장대 인근에서 학생
2명이 실족사한 사건 이후, 인근 상인이 쇠말뚝을 박았다는 증언을 들었다”고
했다. 그는  “증언을 해준 상인이 쇠말뚝을 박을 때 이미 2개가
박혀 있었다고 했기 때문에 나머지 2개는 일제의 소행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기억과
증언에만 의존하는 쇠말뚝의 실체

이처럼
쇠말뚝이 일제의 소행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다름아닌 ‘기억과 증언’뿐이었다. “할아버지에게 들었다”는 말 한마디에
어떤 쇠말뚝은 일제의 소행으로 결론 내려지고, “내가 그랬다”는 말
한마디에 어떤 쇠말뚝은 무속인의 소행으로 판가름 났던 것이다.

최근 남한산성에서
발견되었다는 50여 개의 쇠말뚝 역시 오로지 증언에만 의존한 채, 일제의
소행으로 판가름 난 바 있다. 그러나 ‘증언’에도 설득력 있는 증언과
그렇지 않은 증언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남한산성에서 발견된 쇠말뚝
관련 증언은 얼마나 신빙성 있는 것일까. 소윤하 회장은 “(남한산성
인근의) 동네사람들은 (일제가 혈맥을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다는
것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했다. 다수의 중복증언이 뒷받침 된다면
그만큼 신빙성이 높아짐을 의미하는 셈이다.

 

 

그러나
정작 기자가 남한산성 인근에서 만난 그 ‘동네사람들’은 쇠말뚝이
발견되었다는 사실 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한 달에 두어
번은 꼭 남한산성을 찾는다”고 밝힌 최덕영(61)씨는 “나도 토박이라면
토박이인 사람인데,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며 “방송에서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줄 알았지,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잘라 말했다.

기자는
KBS 아침뉴스에 출연해 일제의 소행임을 증언했던 그 유일한(?) 증언자를
찾아보기로 했다. 남한산성 북문 인근에서 마트를 운영하고 있는 김병갑씨가
그 주인공이었다.

“제 나이가
쉰 한 살인데, 30년도 훨씬 더된 이야기에요. 당시 동네 어르신들이
일제시대에 맥을 끊기 위해 일본사람들이 쇠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단지 그렇게 들은 내용을 (KBS 측에서) 말해 달라고
해서 이야기해줬을 뿐이에요.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이야기는 아니고,
나보다 나이가 많은 몇몇 분들만 알고 있는 이야기지요. 구체적으로
누가 언제 어디서 그랬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없고, 동네 어르신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얼핏 들었을 뿐입니다.”

결국, 남한산성에서
발견된 쇠말뚝이 일제의 소행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근거는 오로지
“동네 어르신들에게서 얼핏 들었다”고 밝힌 김씨의 증언에서만 찾을
수 있었던 셈이다. 또한 소윤하 회장에게 “쇠말뚝을 뽑을 수 있는 장비와
인력을  지원했다”고 밝힌 하남시청 관계자는 “고리 모양의 쇠말뚝이
규칙적으로 박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일제의 소행이 아닌 것 같다는 의견이
중론”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공영방송의 뉴스 진행자가 “일제가 민족정기를
끊겠다며 남한산성에 심어 놓은 것”이라고 설명하며 들고 나온 쇠말뚝의
실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독립기념관에
보관 중인 쇠말뚝만 진짜?

 

기자는
마지막으로 ‘일제 쇠말뚝’을 기증받아 보관하고 있다는 독립기념관의
공식적인 입장을 물었다. 쇠말뚝이 ‘일제의 풍수침략 행위’라면 그것을
보관하고 있는 독립기념관에서 뭔가 공식적이며 무게감 있는 입장을
밝힐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립기념관측의 설명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독립기념관의
한 연구원은 “독립기념관이 기증받은 쇠말뚝은 일제시대의 것이 분명하다”고
단언했다. 기자는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이 연구원은 “풍수지리
전문가들이 풍수학적으로 봤을 때 쇠말뚝이 박혀 있었던 자리가 기가
모이는 자리라고 하더라”는 답변을 꺼내 놨다. 일제의 침략 행위에
대한 기록을 대한민국에 서 가장 과학적이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는 독립기념관 역시 쇠말뚝이 걸어놓은 최면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월간말,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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