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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복적인 친일 행위는 ‘강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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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소리 이동권 기자


 


  친일 음악인들은 일제의 황민화 정책과 전시총동원 정책에 따라 굴종과 동조를 강요당한 것이지 ‘친일’은 아니라고 말했다. 일제의 총검 앞에 ‘어쩔 수 없이’ 친일 음악을 작곡 지휘하게 됐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1937년 일본의 중일전쟁 승리 이후 조선 음악인들의 친일행위는 반복적이고 구체적인 양상을 띄게 된다. 이후 역사는 이들의 친일 행위에 대해 단지 ‘강요였다’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아니오’라는 답을 내놓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용창 책임연구원의 지적도 이와 같다. ‘식민지시대’라는 특별한 환경의 영향도 받았겠지만, 조선의 음악인들이 예술가로서의 지위와 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제에 동참했다는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용창 책임연구원 ⓒ민중의소리



  
  이용창 책임 연구원은 “이 시대의 조선 음악인들은 공공연하게 일본 ‘천황’을 찬양하는 곡을 만들기도 했고 침략전쟁 동원을 독려하는 선전도구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면서 “이른바 ‘황도음악’, ‘국민가요’ 등으로 불리우는 음악들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꼬집었다.
  
  특히 이 연구원은 “민족음악가로 잘 알려진 작곡가 홍난파와 현제명 등은 친일음악의 선두에 서서 조선의 현실을 외면하고 일제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음악활동을 했다”고 지적했다.
  
  
친일인명에 실린 친일음악인들, 확실한 사실에 입각해 분류 정리됐다.
  
  민족문제연구소로 가는 길. 국적불명의 음악들이 쏟이지고 있는 거리를 거닐면서 ‘답답한 물음표’를 가슴속에 그려본다. 왜 조선의 음악인들은 일제의 문예정책에 순응하면서 친일음악의 길로 들어선 것일까? 또한 이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민족음악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신비화되고 영웅화되면서 추앙받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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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담당한 민족문제연구소 이용창 책임연구원을 만나 친일음악인의 논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구체적인 문서 자료를 일일이 챙겨주면서 설명하는 그의 모습은 고교시절 박학다식한 국사 선생님을 연상시킨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면서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용창 책임연구원은 기자에게 커피를 건네면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 음악인 분류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현하는 일부 음악인협회의 주장을 성토하고 나섰다. 친일청산을 거부하는 세력들이 내세우는 주장은 “구태의연하고 비논리적인 정치적 공세에 불과하다”면서 불편한 심기를 털어놓은 것이다.
  
  “이들은 ‘좌파 정권의 비호를 받아 나라의 안보를 뒤로 하는 것이 친일청산’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또 ‘친일청산은 북한 정권을 이롭게 한다는 식의 위험한 논리를 펼치면서 국민과 사회를 분열시키고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자들은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사고로 상대방을 규정하던 잣대가 거꾸로 자신을 규정하는 잣대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세력들입니다.”
  
  “친일청산은 과거를 ‘단죄’하는 차원이 아니라 잘못된 역사를 제대로 ‘알자’는 것입니다. 친일인명사전도 객관적인 자료를 엄밀하게 분석해서 만든 것입니다. 친일행위 ‘증언’조차도 참조 자료로 이용할 뿐 정확한 증거자료로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사실’ 자료만을 토대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친일명단 발표 후 인물 선정에 대해 수십건의 명예훼손 소송제기가 있었지만, 이는 선정과정의 엄밀성에 대해 전혀 숙지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정당성만을 주장하는 행태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증거자료를 들이대면 아무런 대답도 못하면서 무조건 친일청산을 막자고 나서고 있습니다.”
  
  친일 음악인이 민족 음악인으로 둔갑했다
  
  일제시대의 식민잔재를 청산하는 일에 있어 예술은 특수성이 있다. 해방이후 반민특위에서도 사회적, 정치적인 책임이 강조된 반면 예술인들에게는 관대했으며, 친일 논리 부분에서도 크게 고려되지 않았었다. 친일청산은 민족운동세력의 주요한 의제였고 일반 민중들의 간절한 바람이었지만, 예술은 친일 논리에서 크게 대두되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용창 책임연구원은 “친일청산은 지식인이나 예술인보다 권력 상층부에 집중현상을 보였다”면서 “예술의 문화적 파급력을 생각한다면 친일청산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을 간과한 셈”이라고 진단했다.
  
  또한 이 책임연구원은 “친일음악은 은폐와 왜곡을 거쳐 민족적인 예술인으로 둔갑한 채 신비화, 영웅화되고 추모와 존경의 대상으로 변질되었다”면서 그 이유에 대해 “친족, 직계가족, 지인 등 이해관계에 얽혀 있는 사람들에 의해 거짓이 증폭되다 역사속에서 기정사실화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교과서에도 친일 음악인들의 곡이 민족 음악인의 곡으로 버젓이 실리게 됐다.”고 지적했다.
  
  “해방이후 친일음악인들은 민족음악인으로 둔갑해서 문화훈장을 받기도 했으며 음악계의 주류 행세를 했습니다. 친일 행각이 드러난 지금에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국민의 세금으로 이들을 위한 기념사업을 강행했고, 미화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들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것은 민족 배반의 증거
  
  일제시대의 음악인들은 ‘식민통치의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암울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친일화 됐다. 특히, 1931년 만주사변 이후 1937년에 벌어진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을 중심으로하는 오리엔탈리즘이 본격화되면서 많은 예술가들이 친일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용창 책임연구원은 “조선시대의 음악인들은 부와 명예보다는 친일 행위를 통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활동을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일제에 동조했다”면서 “조선 음악이 친일로 변질됐다기 보다는 음악활동을 위해 일제가 지향하는 것에 맞춰 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이 책임연구원은 “음악인들은 환경, 생활, 음악적 활동에 직접적인 억압을 느꼈을 때 자의든 타의든 친일로 가게 됐지만, 지속적이고 자발적이고 반복적인 친일 행위를 통해 음악활동을 이어갔다는 것은 분명한 친일”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이 책임연구원은 “글 하나, 그림 한 점, 곡 하나의 의미는 대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다”면서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옹호하고 대중을 선동하기 위해 음악을 만들었다는 것은 민족을 배반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제시대의 친일음악인들은 대부분 일본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입니다. 미국으로 갔던 음악인들도 있었지만 70~80%가 일본에 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이들은 사비유학을 떠날 만큼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죠. 이런 환경의 사람들이 일제 식민통치체제를 뚫고 나가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체제에 순응하는 것보다…”
  
  “30~40년대를 관통하는 시기에 이런 내적논리는 총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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