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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월 일제 강제동원 피해신고를 하기 위해 충북도청을 찾은 B(66)씨가 증거자료로 내놓은 부친 사진.B씨의 부친은 앞줄 맨 오른쪽 인물. [사진=연합뉴스] |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왜’라는 질문을 던져볼 여지도 없었다. 마을회관에 모이라던 연락이 다였다. 입던 옷 그대로 죄수나 된 것처럼, 개새끼처럼 끌려서 탄광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폭력과 억압으로 점철된 ‘노예’같은 생활. 해방이후 간신히 고향으로 살아 돌아온 ‘천운’. 그러나 악몽 같은 시간 속에 켜켜이 쌓인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는 영원히 지우지 못할 상흔이다. 눈물을 글썽이며 토해낼 통한의 기억이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의 한 풍경이다. 엄혹한 시대의 무게 앞에 ‘노예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장삼이사들이 입을 열었다. 최근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이하 진상규명위)가 펴낸 ‘강제동원 구술기록집-당꼬라고요?’에는 강제동원 생존자 19명의 사연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구술사료에 대한 윤문과 편집의 과정을 거친 이 책에는 여전히 ‘돌이키고 싶지 않은’ ‘지금도 억울해서 한을 삭일 수 없는’ 고통의 기억들이 현재와의 소통을 위해 길어 올려졌다.
‘소년에서 노인으로’ 변해버렸지만 그들의 아픔은 현재진행형이다. 생존자들은 “우리는 인간도 아니여” “밥 먹을 때도 쥐 잡득기(잡듯이) 뚜들겨(두들겨) 패고..” “우리는 ‘노예’였어.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이 사람이지 사람도 아니야” 등과 같은 표현을 쓰곤 한다.
당시 일본군은 전쟁수행을 위해 그들을 ‘피하려 해봤자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서 자포자기의 상태로 만들거나, ‘조건이 좋은 직장’ ‘월급도 많고, 기술자 자격증도 받고, 학교도 다닐 수 있는 곳’이라는 기만술도 사용했다. 또 ‘너에게 특별히 알려주는 정보’에 속아서 지원하도록 하는 방법도 썼다. 강제동원자들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강제인지’ 여부도 판단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노역에 종사한 경우도 있었다. 극단적으로는 ‘인간사냥’과 같은 방법도 동원됐다.
진상규명위는 구술집의 출간과 관련, “위원회가 수집한 노무동원 신고자의 구술기록의 내용을 일반 대중과 나눔으로써 강제동원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전쟁에 대한 인식도 새롭게 할 수 있을 것”이라며 “강제동원 피해자의 구술을 통해 어떠한 명분으로도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며, 평화를 지키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임을 각인하게 된다면 좋겠다”고 전했다.
책은 진상규명위 조사1과가 지난해 2월부터 11월까지 전국 5개 지역을 다니며 수집한 노무 피해신고자의 생존자 조사결과 226건 가운데 19명의 구술기록을 담았다. 책 제목의 ‘당꼬’는 탄광의 일본식 발음으로, 진상규명위의 생존자 조사 과정에서 할아버지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한 조사관이 ‘네? 당꼬라고요?’라고 되묻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당꼬가 생존자들“고통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라고 판단, 책 제목으로 삼았다는 것이 진상규명위의 설명이다.
또 책에는 생존자들의 동원지역을 큐슈·관서·관동·중부·기타 지역으로 구분해 나눴다. 중부지역은 엄밀히 말하면, 동북지역과 중국지역인데, 책에서는 중부지역이라 분류했다. 진상규명위는 향후에도 노무신고자에 대한 생존자 조사를 계속, 국외 지역별·국내 지역별·주제별 구술기록집을 발간하는 한편 영상물로도 제작할 예정이다.
다음은 책에 소개된 생존자 일부의 사연을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조용섭(82세)씨 “로라(레일)에 걸려서 째겨진 다리는 지금도 시리고 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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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45년이 지났건만 피맺힌 한과 설움.핍박 등으로 점철된 강제징용. 징병사는 한때의 부끄러웠던 과거로 치부되면서 잊혀져가고 있다.사진은 1930년대 후반 사금채취에 강제동원된 한국인들. [사진=연합뉴스] |
뱃일을 하고 있던 조용섭 할아버지는 18세 때(1942년) 지금의 통장 혹은 이장에 해당하는 구장(區長)의 ‘명령’으로 2년 기한으로 큐슈의 미츠비시 호죠탄광으로 동원됐다. 조용섭 할아버지는 여기서 2교대로 굴을 뚫거나 탄을 파서 날랐다. 품삯을 받긴 했으나 일정치도 않을뿐더러 적금 등을 떼고 나면 용돈이 모자라기도 했다. 자유가 없는 탓에 돈을 제대로 쓰지도 못했고 담배도 배급으로 받았다.
특히 조용섭 할아버지는 화약설치 일을 하던 중에 로라(레일)에 걸려서 다리에 부상을 입었고 응급치료만 받았을 뿐 계속 일을 했다. 당초 2년이라고 했던 동원이 이유 없이 재계약되고 월급도 제대로 주지 않는 ‘징역살이’와도 같은 생활에 염증을 느낀 조용섭 할아버지는 이에 작업장에서 도주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야하타 제철소 제석공장으로 갔다가 체포되는 것이 두려워 고큐라 비행장에서 다시 5~6개월간 노역을 했다.
이 곳에서 부상당한 다리 때문에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할 지경이라 조용섭 할아버지는 해방 3개월 전 귀국했다. 그러나 부상 재발 등으로 농사를 짓지 못하고 배 사람으로 살아야 했으며 피부이식 등의 치료를 받았으나 아직도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피해자 모임에 참석과 관련한 조용섭 할아버지의 여담은 강제동원의 비극이 얼마나 그들을 옥죄고 있는지 느끼게 한다. “전부가 삼 사람들은 고령자야, 고령자. 그 사람들이 그래 늙어지는 게 한이라고 그래. 젊었으면 언제까지 이어가든 끝까지 한번 해결 보겄는디, 늙은 게 한이라고 해. 그 사람들이 나 죽기 전에 어떻게든 해결 봐야 된다고 말여. 그렇게 이를 뿌득뿌득 가는 사람이 있더라고.”
장덕환(81)씨 “열여덟 어린나이에 ‘보국대장’ 완장 차고 떠난 고향”
경기도 여주 출신으로 집안의 장남이던 장덕환 할아버지는 아버지 대신 동원된 경우다. 아버지 앞으로 징용장이 나왔으나 구장이 “아버지가 (징용)가면 농사를 누가 짓느냐”며 대신 갈 것을 권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이에 서울에서 야간학교에 다니고 있던 장덕환 할아버지는 고향으로 내려 와 1943년 10월 18세의 나이에 ‘보국대장’이라는 완장을 차고 80명을 이끌고 일본 탄광으로 갔다. ‘일본말을 안다’는 이유로 최연소임에도 인솔자로 나선 것이다.
일본에서 온 인솔자는 “이런 학생은 저 탄광에 보내면 안 된다. 학생이 탄광서 일하기에는 아깝잖느냐”며 만류했으나, 면장은 “사람이 모자라니까…”라는 말로 얼버무렸다.
후쿠오카의 야마다 탄광으로 떠난 장덕환 할아버지는 보국대장이라 하여 막장에서 힘든 일은 피하게 되었으나 민족차별과 굶주림, 그리고 동포에 대한 구타, 사고로 죽어 나가는 동료의 모습을 목격하며 고통스러워했다.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이 쓰레기통에 내다버린 닥광(단무지) 쪼가리 등을 대강 씻어서 배를 채우는 생활을 했다. 장덕환 할아버지에게 야마다 탄광일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머리에 잊혀지질 않는’ 기억이다.
김득중(77)씨 “탄광에서 선창으로, 그리고 다시 일본 탄광으로, 모집을 세 번 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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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때 경북 구미와 칠곡지역 강제징용자 41명의 이름이 담긴 명부의 표지. 박경호(83.구미시 진평동) 씨는 명부 4장과 표지, 전단지 등의 자료를 공개했다. [사진=연합뉴스] |
김득중 할아버지는 세 번이나 노무동원을 겪은 다중동원피해 생존자이다. 19세 때 황해도 대동리에 있는 탄광에 동원됐다가 ‘위험하고 무서워서’ 1주일 만에 걸어서 도주를 했으나 다시 전북 군산의 째보선창에 재차 걸려 가 하역작업을 했다. 그러다 1944년 2월 징용 통보를 받고 ‘일본으로 가라’는 말을 들은 김득중 할아버지는 “두 번이나 갔다 왔다”며 가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면 서기는 “앞서 간 거는 임시”라며 빼 주지 않았다.
기후현 카미오카 광업소로 출발한 김득중 할아버지는 연락선을 타고 가는 동안에 밤새 정신없이 울면서 갔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도착한 곳은 쇳돌 파는 광산이었다. 굴속에서 구멍을 뚫고 돌을 파서 하루에 열댓 번 리어카로 나르는 위험한 일을 했다. 행여나 ‘돈이나 벌을까’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한 것이다. 현장에서 조선 사람이 많이 죽었다.
‘전쟁 속에서도 돈이나 벌을까’하고 열심히 일을 했지만 목간비, 이불 값이다 뭐다 해서 봉급에서 모두 공제하면 손에 남은 것은 교통비 대신 지급한 쌀 두되뿐이었다. 집에는 돈이 없어 보내질 못하고 오히려 조선서 가지고 간 돈을 어머니에게 보내 안심을 시켜야 할 정도였다.
해방 이후 곧 돌아올 줄 알았으나 보내주지 않아 한국인들끼리 데모를 해서 귀국할 수 있게 됐다. 배 삯은 배급으로 나온 담배와 술을 팔아서 겨우 배 삯을 마련하여 귀국할 수 있었다.
이무순(78)씨 “이와테현으로 가는데, 황해도 가서 한달 훈련 받았어요. 제식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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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월 일제 강점하 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전북 익산시 함열읍 죽촌 하농마을에서 생존자들에 대한 첫 진상조사를 벌이기로 하자 피해자들인 한형석(85.왼쪽), 임득규(84.가운데), 최순량(85.오른쪽에서 두번째)씨가 마을 경로당 앞에 나란히 앉아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이무순 할아버지는 1943년 큰 형님 대신 동원됐다. 15세의 어린 나이였다. 큰 형님이 농사를 지어야 되는 터라 대신 가겠다고 했다. 일본으로 떠날 때 춘천에 60~70명이 모여 어디로 간다는 말도 듣지 못한 채 기차를 탔다. 민간복장을 한 일본인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황해도였고 한 달 동안 제식훈련과 업무에 필요한 규율훈련을 받았다.
교육이 끝난 뒤 이와테현의 제철소로 간 이무순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하루 2교대, 12시간씩 용광로에 쇠 붓는 일, 쇠 녹이는 일을 했다. 품삯도 별로 받지 못했다. 황해도에서 훈련을 받을 때에는 푸석한 주먹밥에 너무도 배가 고팠으나 이와테현에서는 비록 훅 불면 날아갈 정도로 푸석거리고, 튀밥이 섞인 밥이었지만 아주 배고플 정도는 아니었다.
너무 외딴 곳이어서 도망 나오면 갈 데도 없고 나이가 어려서 도망갈 생각을 못하고 지내다가 해방 소식도 뒤늦게 한달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래도 보내주지 않고, 화전밭을 경작하는 일을 시켜서 하다가 11월에야 돌아왔다. 몇 만 명이 탈 정도로 큰 연락선을 타고 서울역에 도착해 다시 기차를 타고 배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고향에 도착하자 어머니는 11월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찾아 매일 역전에 나와 있었다. 애끓는 모정이었다.
정상균(85)씨 “우물에 갇힌 물고기 마냥, 그렇게 남양군도에서 5년을 보냈어요”
20살이었다. 지원병을 하라는 종용이 있었으나 지원을 하지 않자 군(郡)에서 통지가 왔었고 신체검사를 받고 남양군도로 동원된 것이. 정상균 할아버지는 1941년 트럭섬에서 비행장을 닦고 자갈을 만드는 일을 했다. 6시에 일어나 저녁에는 해가 져야 끝나는 일이었다. 처음 4개월 동안은 월급 50원씩이 나왔다고 했으나, 돈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집으로 부쳐준다는 말이었고 확인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그 이후로는 월급이 없었다.
4개월 뒤 옮긴 곳은 나우루섬이었다. 같은 일을 했었고 ‘우물 안 괴기’마냥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끼니 챙기기에 급급했다. 도망갈 데도 없었고 아사도 많았다. 그러다 외부에서 보급이 끊어지자 자급자족을 해야 했는데, 어려움이 너무 많았다. 폭격과 공습이 있었고 방공호에 대피했다가 나오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전쟁의 공포를 느꼈다. 해방도 누군가가 말해줘서 알았다. 호주군이 진주하자 일본군의 치하에서 벗어났으나 또 일을 했다가 1946년 7월에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조국 땅을 다시 밟는데 5년이 걸렸다.
최차기(80세)씨 “홋카이도에서 사할린으로, 그리고 44년만에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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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신고접수가 시작된 지난해 2월 종로구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수많은 신청자들이 몰려든 가운데 천상근씨가 일제에 해군으로 징병됐다 일본 아오모리 마이쓰로항에서 사망한 부친 천영철씨의 일본군 시절 사진을 보여주며 피해사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농사일과 고깃배를 탔던 최차기 할아버지는 호적상 17세(실제 나이 19세) 때인 1945년 4월에 홋카이도에 본사를 둔 고래회사에 동원돼 고향을 떠났다.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전쟁에 질까 이길까’로 한창 바쁠 때였다.
젊은 사람들은 군대나 사할린 탄광으로 많이 끌려갔으나 아버지가 고래회사로 보냈다. ‘그냥 놔 두면은 나이 어린 게, 북해도나 사할린에 가서 탄광에 가서 모진 노동을 하게 된다’고 생각해서 탄광보다 일이 심하지 않고 자유스럽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고래회사로 보냈다. 그러나 이것이 부자간에 영원히 만나지 못할 이별의 순간을 만들었다.
동네 사람들 일곱 명과 함께 고래회사로 간 최차기 할아버지는 치사마열도에서 고래잡이를 했다. 월급은 ‘조선에 부칠 테니까 너희는 그저 여기서 주는 대로 밥 먹고 일만 하면 된다’는 식이었고 집에서 몇 달치 150원을 받았다는 편지를 받기는 했으나 직접적으로는 단 한 푼도 타본 적이 없다. 일 하는 시간도 그저 밤이나 낮이고 고래만 있으면 잡았다.
최차기 할아버지는 해방과 동시에 고향으로 돌아올 꿈에 부풀어 있었으나 그해 9월3일 소련군의 진주로 3년간 고래잡이를 더 해야 했다. 함께 일하던 일행 36명은 1948년에 일본인들이 모두 철수할 때, 그 배에 편승해 일본을 통해 귀국하는 줄 알았으나 소련 쪽의 농간으로 엉뚱한 곳으로 갔다. 한인들까지 함께 철수한다는 계획을 안 소련 측에서 일본인들이 출발하기 하루 전날에 이들을 트럭에 태워 사할린 고르노자워스크(나이호로)라는 탄광지역에 데려간 것이다.
탄광 생활을 하게 된 최차기 할아버지는 이 곳에서 탄을 캐는 일은 하지 못하고, 탄에서 기름을 짜내는 일을 하는 한편 고초를 겪었다. 북한에서 온 사람들은 러시아 사람과 한편이고 남조선 사람들은 왜놈들 곁에 북종하고 친했다며 차별대우를 받은 것이다. 고향과의 편지연락도 단절됐다.
그러다 형님동생하면서 지내는 사람이 일본을 왔다 갔다 하면서 고향에 편지를 보내준 덕에 가족과 최소한의 연락이 닿았다. 그러다 1989년에 44년만에 일본을 통해 고향을 갔다 왔고 2000년에서야 영주귀국을 하게 됐다. 어린 시절, 몸이 약한 아들을 염려하여 보낸 고래잡이가 결국에는 이산의 아픔을 안겨주게 되었고 아버지, 어머니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미디어다음, 06.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