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회의를 통과한 ‘경기도 의왕시 명칭변경에 관한 법률안’
2006년 1월 31일, 정부는 이해찬 총리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어 ‘경기도 의왕시 명칭변경에 관한 법률안’을 의결했다. 정부는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행정구역 명칭의 전통성을 회복하기 위해 의왕시의 한자명칭을 변경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으며, 의왕시 관계자는 “의왕시의 한자 명칭이 ‘儀旺’에서 ‘義王’으로 바뀜에 따라 일제 잔재인 ‘일(日)’자가 빠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의왕시의 한자 명칭이 일제의 잔재라는 믿음은 “일제가 풍수침략을 위해서 명산명혈에 쇠말뚝을 박아 민족정기를 말살하려 했다”는 주장과 마찬가지로 반일감정을 이용한 엉터리 선동에 불과하다.
오랫동안 대중들은 ‘일(日)’자와 ‘왕(王)’로 이루어진 ‘왕(旺)’자가 일본 천황을 상징한다는 주장을 믿었다. 그러기에 서울의 인왕산(仁旺山)이나 경남 창녕의 화왕산(火旺山)의 경우도 일제가 한자 명칭을 바꾸어 민족정기의 말살을 획책했던 증거로 제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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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근거가 없는 이러한 주장은 이미 반증 자료에 의해서 부정되었다. 인왕산(仁旺山)이라는 한자명칭은 조선시대 문헌인『만기요람(萬機要覽)』군정편2(軍政編二) 훈련도감(訓鍊都監)의 ‘척후·복병(斥候伏兵)항목’과 ‘도성분수자내(都城分守字內)’ 항목에서 그 표기가 나타난다.
화왕산(火旺山)은 1750년대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해동지도(海東地圖)》의「창녕현」지도에 ‘화왕산(火王山)’과 ‘화왕산(火旺山)’이 함께 나타나며, 1745년에서 176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비변사인 방안지도(備邊司印 方眼地圖)》의「창녕현」지도에도 ‘화왕산(火旺山)’이라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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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4%의 찬성은 애국심과 지역을 사랑하는 마음이 반영된 결과(?)
2005년 3월 의왕시는 ‘의왕 한자명칭변경 주민의견조사’를 벌였다. 주민의견조사 결과 조사대상 51,480 세대 중 83.9%인 43,172세대가 참여하고 99.4%인 42,915세대가 義王(의왕)으로 변경하는데 찬성의 뜻을 나타냈다고 한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의왕시 관계자는 “시민들의 높은 참여와 관심도로 제 이름 찾기에 찬성해 요즈음 일본의 독도만행을 지켜보며, 일제 하의 잘못된 명칭을 바로 잡고자 하는 의왕시민의 애국심과 지역을 사랑하는 마음이 반영된 결과”라고 말했다.
그러나 의왕시민의 애국심과 지역을 사랑하는 마음(?)은 일제를 특별히 강조하고, 조선 후기의 역사는 지나치게 축소하여 전달한 왜곡된 정보에 의해 형성되었다.
의왕시는 의왕의 한자 명칭은 1547년 학의동 소재 임영대군의 아들 윤산군 묘표석을 겸한 비석에서 의곡리(義谷里)를 표기한 ‘옳을 의(義)’자를 확인했고, 1689년 제작된 청계사사적기비에서 왕륜면(王倫面)의 ‘임금 왕(王)’자를 확인했다고 했다.
정조의 현능원 능행에 대한 관판본《원행정례(1790)》와 《원행을묘정리의궤(1795)》부터 의곡(儀谷)과 왕륜(旺倫)의 한자가 등장했으며, 1914년 4월1일 일제 강점기 행정구역 통폐합이 되기까지 혼용되어오던 한자 표기가 수원군 의왕면(儀旺面)으로 개편되었다고 밝혔다. 이것이 일제에 의해 의왕(儀旺)으로 고착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고 덧붙였으며, 한자 지명 변경이 “시의 전통성 회복과 정체성 확립이라는 뜻에서 추진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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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까지 하나의 단일한 지역 사회로서 정체성을 가진 적이 없는 의왕시
그러나 한자 명칭 변경은 의왕시의 자료조사를 통해서도 일제 잔재 청산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이 확인된다. 의곡(儀谷)이나 왕륜(旺倫)이라는 지명은 이미 정조 때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선 말 흥선대원군 집권시절에 제작된 관찬(官撰) 지도인《1872년 지방지도》첩의「광주전도」에도 의곡면(儀谷面)과 왕륜면(旺倫面)으로 표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750~1768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조선지도》첩의「광주」지도에는 의곡면(矣谷面)이라는 표기도 사용된 적이 있다.
한자 표기는 시대에 따라 수시로 변하고 있으며, 조선시대까지 ‘의왕’은 하나의 단일한 지역 사회로서 정체성을 가진 적이 없다. 다만 경기도 광주에 속했던 각각의 독립된 면(面)으로 존재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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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은 1913년(대정 2년) 12월 29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를 내려 도(道)·부(府)·군(郡)의 명칭과 위치, 그리고 관할구역을 새롭게 정하였다. 이렇게 개편된 행정구역은 1914년(대정 3년) 3월 1일부터 시행되었는데, 광주군 의곡면(儀谷面)과 왕륜면(旺倫面)은 통합되어 수원군 의왕면(儀旺面)이 되었다.
의왕면은 1936년에 수원군 일왕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49년에는 화성군 일왕면이 되었다. 1980년에는 시흥군 의왕읍으로 승격이 되었고, 1989년에 이르러서야 의왕시로 승격이 되었다.
그런데 1914년 이후에 하나의 행정구역이 된 ‘의왕’이 어떻게 그 보다 과거의 역사를 통하여 ‘전통성 회복과 정체성 확립’을 할 수 있다는 것일까? 의왕시는 자신의 전통성과 정체성의 기준을 경기도 광주나 수원, 혹은 시흥 중에서 어디에 두어야 할까? 의왕시의 한자 명칭 변경은 역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고의적인 ‘시대착오’라고 할 수 있다.
두 지역을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통합할 때, 각 지역의 머리글자를 한 자씩 따서 새로운 지명을 만드는 것은 한국·중국·일본의 전통적인 작명 방식이다. 예를 들면,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의 머리글자를 따왔고, 경상도도 경주와 상주를 합하여 만들었다.
그러므로 조선총독부가 ‘의왕면(儀旺面)’이라는 새로운 행정구역을 만든 방식에 특별한 의도가 개입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왕(旺)자에 일본 천황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했던 일부 사람들의 사실 왜곡이 문제가 되었을 뿐이다. 정작 일본인들은 자신들 스스로 천황(天皇)을 비하하여 일왕(日王)이라는 명칭으로 부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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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령신앙을 식민지 지배에 적절하게 활용한 일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왕시, 인왕산, 화왕산’의 한자 명칭에서 일제잔재인 ‘일(日)’자를 빼자는 이러한 선동이 대중적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일제가 식민지 지배정책으로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창지개명(創地改名)’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말이나 문자 자체에 영혼이 깃들어 있어 불가사의한 힘이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주술적 신념체계를 ‘언령신앙(言靈信仰)’이라고 한다. 일제는 식민지 지배정책에 언령신앙을 적절하게 활용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39년 11월 제령 제19호로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하여 조선 고유의 성명제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설정하여 1940년 2월부터 동년 8월 10일까지에 ‘씨(氏)’를 결정해서 제출할 것을 강요하였다.
창지개명은 창씨개명보다도 먼저 실시되었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삼기 훨씬 전부터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의 주요 도시에 있는 거리나 마을 이름을 자신들 입맛대로 바꾸기 시작했다. 혼마치(本町)·메이지마치(明治町)·다케조에치(竹添町) 같은 지명들이 바로 그것이다.
혼마치(本町)는 도시의 중심가를 일컫는 말로 현재 서울의 충무로 일대를 비롯하여 부산·경주·청주·군산·목포 등 거의 모든 도시에 있었다. 메이지마치(明治町)는 메이지 일본 천황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현재의 명동을 일컫는 지명이었다. 다케조에치(竹添町)는 충정로 일대로 갑신정변으로 쫓겨난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를 기념하기 위한 지명이었다.
해방 후 미군정 시절에 일본식 성명과 일본식 지명은 사라졌다. 서울시내 일본식 지명은 1946년 10월 2일 모두 바뀌었다. 메이지마치(明治町)는 명동(明洞)이 되었고, 고가네마치(黃金町)는 을지로(乙支路)로 바뀌었다. 다케조에치(竹添町)는 민영환의 호를 따서 충정로(忠正路)로 바꾸어 불렀고, 모도마치(元町)는 원효대사의 이름을 붙여 원효로(元曉路)가 되었다.
미군정청은 1946년 10월 23일에 군정청법령 제122호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 공포하여 창씨개명으로 바뀐 일본식 성명을 다시 본래의 성씨와 이름으로 되돌리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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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문화잔재 바로알고 바로잡기
일제의 식민지 통치의 일환으로 활용된 언령신앙은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냈다. 해마다 3월 1일이나 8월 15일만 되면 “일제가 풍수침략을 위해서 명산명혈에 쇠말뚝을 박아 민족정기를 말살하려 했다”는 반일감정을 이용한 엉터리 주장이 신문과 방송에 여과없이 보도되었다.
이와 비슷한 소동은 작년 8월에도 있었다. 문화관광부 광복60주년기념문화사업추진위원회가 ‘일제문화잔재 바로알고 바로잡기’ 시민제안공모를 심사한 결과 우석대 조법종 교수가 제안한「만경강, 영산강」이 으뜸상(1등)으로 뽑혔다. 선정사유에는 “일제가 우리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기 위하여 인명(人名)과 지명(地名)만 바꾸고 훼손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원천인 강의 이름까지도 바꾸었음을 확인시킨 것”이라는 친절한 설명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전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영산강(榮山江)’이라는 지명은『영조실록』 권4 영조 원년(1725) 3월 계해(25일),『일성록』정조 10년(1786) 1월22일,『대동지지(大東地志)』 나주 산천조(羅州 山川條),『경세유표(經世遺表)』,『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표해록(漂海錄)』,『옥봉집(玉峰集)』,『수은집(睡隱集)』,『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정열사비문(旌烈祠碑文)」 등 무수히 많은 조선시대 문헌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또한 1750년대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해동지도(海東地圖)》의「금성현」지도에도 영강사(榮江祠)와 영강창(榮江倉)이라는 지명도 등장한다.
‘영산강 소동’은 “일제문화잔재 바로알고 바로잡기”는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에 기초해야 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 객관적 사실에 바탕을 둔 진실한 기록을 통하여 과거사를 올바로 청산하는 것이야말로 전통성 회복과 정체성 확립, 민족정기회복의 지름길이 아닐까. <코리아포커스(http://www.coreafocus.com), 06.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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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표는 수의사로 현재 금호동에서 동물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직업이 수의사여서 당연히 동물에 관심이 많지만, 그 못지않게 시민운동과 역사, 답사에도 관심이 많다. 시민사회 영역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있으며, 종종 답사 가이드도 맡는 ‘활동파’ 시민이다. 틈만 나면 도서관에서 ‘역사와 사회’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박상표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걸어다니는 사전’이라고 부른다. 본보 기획위원을 맡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