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축전 참가한 독립유공자 후손>
한민족축전 참가한 독립유공자 후손
고광순씨, 브라질 초기이민사 ‘산증인’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고향인 평양에 한번 가보고 싶어. 1.4 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와 브라질로 이민해 사는 55년 동안 한 번도 못 갔거든. 이왕이면 통일이 된 고향 땅에를 가봐야 할텐데…,”
독립운동가 고창희(高昌熙.1887-?) 선생의 장남인 고광순(87) 씨는 2006 세계한민족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브라질에서 아내 곽영애(82) 여사와 함께 21일 귀국했다.
고광순 씨는 이날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죽기 전에 한번 고국 땅을 밟고 싶었다”며 “이번 방문 기간에 제2 고향 부산을 비롯해 잘린 남쪽 땅을 가슴에 담아 가겠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일제강점기 만주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고창희 선생은 1921년 대한독립 임시군정부를 위해 국내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펼쳤으며 일제의 관청 파괴, 친일관리 처단을 계획하고 모험청년단을 조직해 활동 중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10년간 수감됐다 풀려나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아버지가 독립운동 한 사실은 너무 어려서 잘 몰랐지. 나중에 자라면서 어머니와 친척, 주위사람들로부터 듣고 알았어. (독립운동 사실은) 가족에겐 모든 것이 비밀이었어”
고 씨는 “아버지가 출옥했을 때 잠깐 얼굴을 봤을 뿐 그 이후엔 거의 보지 못했다”며 “고학하면서 대학을 졸업했다”고 말했다.
일본 교토중학교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 그는 원산수산시험장에서 일하다 1951년 1.4 후퇴 때 피난했다. 유일한 동생 고화순(75)씨는 황해도 재령에 살고 있으며 누나 3명도 평양과 신의주에 생존해 있다.
고광순 씨는 가난과 사상문제로 고민하다 1962년 브라질 이민 선발대인 한백문화사절단의 일원(14명)으로 첫 발을 디뎠다. 제1차 브라질 이민이 이듬해에 이뤄졌기 때문에 6년 전 반공포로들이 정착한 이후 정식 이민자로서는 그가 브라질 이민사의 첫 장(章)인 셈이다.
“그 때 이민했던 사람들은 이미 세상을 뜨고 나만 남았어. 참 고생들 많았는데… 초기 이민자들은 정착하기 전 농사일에서부터 건설 현장 인부, 보따리 장사 등 별의 별 일을 다 했어. 그래서 이렇게 늙은 거야”
고광순 씨는 브라질 한인회를 창립했고, 한인회장을 여러 차례 했으며 한인회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나서서 규합하는 등 실질적인 한인사회 ‘큰 어른’ 역할을 했다. 최근 한인회의 갈등과 분쟁도 그가 봉합할 정도다.
고 씨가 고국을 처음 찾은 것은 2003년으로, 해외유공재단이 독립운동가 후손과 초기 이민 유공자들을 초청할 때 이민 유공자로 선정돼 방한했다.
당시 그는 우연히 천안 독립기념관을 돌아보다 안내원에게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했고, 그것이 계기가 돼 아버지가 함께 독립운동을 한 동지들의 활약상이 드러나면서 1995년 독립운동가로 추서됐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렇지만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인정받는 데는 또다시 2년이란 세월이 걸렸어. 관계자들이 얼마나 진을 빼던지 후손을 포기할 생각마저 했었어. 아마 그런 복잡한 절차 때문에 독립운동가 후손이면서도 인정을 못 받는 재외동포들이 많을 거야”
고 씨는 “정부가 후손들을 대우해 줄려면 자존심에 상처 나지 않게 절차를 간소화해 달라”고 당부했다.
감기 기운이 있다면서도 고국을 돌아볼 생각에 가슴이 벅차다는 그는 “눈을 감을 때까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