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 객원전문기자의 대한민국 통맥풍수]<16>백범 김구 묘와 민족정기
좌청룡 우백호 얼싸안고 땅기운이 응결된 도심 속 명당
◇백범 묘역 후룡맥에서 바라본 효창공원 전경. 효창공원은 3의사(義士)와 임시정부
요인 묘소가 함께 있어 민족정기를 드높이는 산실로 젊은이들의 참배 행렬이 잇따른
다. 우측이 백범기념관이다.
그동안 필자 사정으로 중단됐던 ‘대한민국 통맥풍수’를 16회로 이어서 다시 연재합니다.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준 독자 여러분과 풍수학계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더욱 알찬 정보와 지식을 담아 독자 여러분의 기대와 관심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애독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안동김씨 백범 김구(1876∼1949)는 7대 독자였다.
21세 때 일본군 육군 중위 스치다(土田) 밀정을 의살(義殺)한 후 사형이 확정돼 형집행 직전 광무황제의 ‘전화 특사’로 살아 났다. 전화가 아니었으면 백범은 그때 죽었을 것이다.
황해도 향시에 낙방한 후 매관매직의 타락상에 통분해 서당 공부를 중단해 버렸다. 곧바로 동학(천도교)에 입도하여 황해도 동학농민군 선봉장(도유사·都有司)으로 해주성을 공격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새로운 결심으로 유학(유교)을 배워 김이언 의병의 고산리 전투에 참가했다. 감옥에서 탈출한 후에는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원종(圓宗)이란 법명으로 승려가 됐고, 평양 근교 대보산 영천암 주지까지 지냈다.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하는 부모로서는 얼마나 속이 탔겠는가.
환속한 후에는 기독교로 다시 개종해 ‘엡웟’청년회 총무로 상동교회가 주최한 전국대회에도 참가했다. 37세(1912) 때 이름을 구, 호를 백범으로 고친 뒤 망명·도피·현상수배의 멍에를 짊어지고 이국 땅에서 일생을 보냈다. 해방된 조국에 와서는 육군 포병소위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1949년 6월26일의 일이다.
◇백범 묘 우측 내룡맥에서 찾아낸 응기석. 풍수·역학강사인 정헌주씨가 용맥은 물을
만나면 멈추고 지기(地氣)는 바위 앞에서 응기돼 명당혈처임을 암시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백범은 서울 효창공원 애국지사 묘역에 누워 예나 지금이나 나라의 장래를 근심으로 지켜보고 있다. 한평생 소원이었던 통일조국을 못 이루고 아직도 갈라져 있는 이 강토를 내려보며 영혼은 얼마나 안타까워 할까.
서울 용산구 효창동 255번지 일대 5만3928평. 효창운동장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서울역 건너편 청파동 언덕의 숙명여대 바로 옆이다.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이 들어서기 전만 해도 동대문운동장과 함께 서울시민의 사랑을 받던 곳이다.
정헌주(동아문화센터 풍수·역학강사) 선생과 백범 묘를 찾은 지난달 31일엔 마침 청자빛처럼 푸른 하늘에 눈발이 흩날렸다. “백범 선생처럼 기가 센 어른은 귀신도 꼼짝 못할 겁니다. 그분은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에 방해되는 사람은 가족이나 측근도 용서치 않았고 일인들마저 무서워 벌벌 떨었던 영웅투사였습니다.”
사제간에 이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예의를 갖춘 후 나경을 꺼내 들었다. 건좌손향이니 정확히 서북쪽에서 동남쪽을 바라보는 좌향이다. 숙명여대 캠퍼스가 좌청룡으로 내안산을 이루며 용문동 쪽의 우백호가 얼싸안았다. 고층빌딩에 가려 보이진 않지만 동작동 국립묘지를 조산(朝山)으로 길격(吉格) 국세를 갖췄다.
◇옛문효세자 묘터에 안장된 백정기·윤봉길·이봉창(오른쪽부터) 3의사 묘역. 맨 왼쪽
상석에 조성돼 있으나 비석이 없는 안중근 의사 가묘가 가슴을 아리게 한다.
정 선생은 “서울 등 도심에서 사신사나 용맥을 살필 때는 마음속으로 모든 건물들을 허물어 버려야 된다”면서 “전후좌우를 가로막은 건물들이 비록 충사로는 작용할지언정 지기(地氣)마저 끊지는 못한다”고 안심시킨다. 도심지에도 제대로만 찾으면 명당은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지방에 있는 음·양택을 감정할 때는 그 지역의 지형지물에 훤하고 방향감각에 능숙한 현지 풍수의 판정을 존중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자신이 서 있는 지점이 한반도 어느 정맥에서 융기돼 나온 지맥(支脈)인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범 묘역을 면밀히 살피던 정 선생이 놀라면서 발길을 멈췄다. 입수룡이 맥이 짧긴 하지만 좌우로 기복하여 내려온 후룡맥을 멈춰서게 한 큰 바위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렇지. 당시 풍수가 백범 선생의 묘를 그냥 썼을 리가 있나! 이곳 효창공원이 어떤 자리인데….”
묘역을 경계 짓는 목책 바로 옆의 암석이 여느 산책객들에게야 예사로 보였을지 모르나 풍수학인들은 무릎을 탁 치며 쾌재를 부르는 자리다. 천리길을 달려온 내룡맥이 물길을 만나면 멈춰 자리를 내놓고 땅기운은 바위 앞에서 응기된다 하지 않던가.
◇애국지사 일곱 분의 영정을 모셔 놓은 의열사. 1989년 6월8일 효창공원 전체가 사
적지 제330호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다.
사실 효창공원의 내력을 알고 나면 누구나 보통 자리가 아님을 금세 알게 된다.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의 장남 문효세자와 생모 의빈성씨가 묻히고 난 후 순조(제23대)의 후궁 숙의박씨와 소생 영온옹주를 장사지내면서 효창원(孝昌園)이라 이름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왕권의 서슬이 시퍼럴 때니 당대 국풍(國風)이 명당 찾아 좋은 자리에 모셨음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일제 강점기 못된 짓만 골라한 일인들이다. 민족정기 말살과 사적 제거를 위해 공원법을 제정한 뒤 1945년 3월 모든 묘를 고양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해 버렸다. 그러고는 효창원을 효창공원으로 강등하고 개를 데리고 와 놀게 했다. 이 같은 일제의 간교는 창경궁을 창경원 놀이터로 만들어 왕실의 존엄을 폄훼한 만행에서도 나타난다.
이런 비운의 사적지를 독립운동에 몸바친 애국선열 묘역으로 바꿔 놓은 장본인이 바로 백범이다. 1945년 11월에 귀국한 백범은 이듬해 7월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 유골을 모셔와 옛 문효세자 묘터에 안장했다. 당시 백범은 이곳의 가장 윗자리에 가묘나마 안중근 의사 묘소도 조성해 놓았다. 1948년 9월에는 중국 땅에서 순국한 이동녕 임시정부 주석과 차이석 국무원 비서장, 환국 후 서거한 조성환 군무부장을 안장하면서 효창공원은 국민들 마음속에 애국지사 묘역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백범도 살아생전 자신이 죽으면 이곳에 묻히길 원했고 그 소원은 이루어졌다.
백범 묘 옆에는 일곱 선열의 영정이 봉안된 의열사(義烈祠)가 있고, 임시정부 수립일인 매년 4월13일 합동추모제가 봉행된다. 효창공원 전체가 사적 제330호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다.
◇미얀마산 백옥으로 조성된 백범 좌상.
이봉창 의사 동상을 바라보며 의열사를 끼고 돌면 삼의사 묘역이다. 문효세자가 묻혔던 자리다. 나경을 펼쳐 드니 임좌(북에서 서쪽으로 15도 기운 방향) 병향(남에서 동쪽으로 15도 기운 방향)으로 거의 정남향에 가깝다. 과연 명당길지다. 백범 묘의 능선이 우백호로 감싸고 좌측의 임정요인 묘역이 좌청룡으로 포용하여 국세가 더욱 안정된 느낌이다. 안산은 한강대교 중간의 노들섬이다. 무심코 참배만 하러 다니다가 풍수학인으로 접근해 높다란 건물들을 마음속으로 철거해 보니 이런 좋은 자리가 또 어디 있을까 싶다. 다만 안중근 의사 유해를 찾지 못해 가묘로 남아 있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 없다.
역시 백범은 대인이었다. 독립을 위해 청춘과 목숨을 내던진 젊은 의사들에게 좋은 자리를 내준 것이다.
이곳에 오면 친일행위자들에 대한 분노가 들끓는다. 우국지사들이 온갖 악형과 고문으로 몸부림칠 때 총독부에 아첨한 친일파들은 호의호식하며 자식 교육해 후세까지 득세했다. 현재까지도 친일파 후손들은 가문 내력을 숨긴 채 그 당시 교육과 부를 바탕으로 잘살고 있다. 때로는 조상의 친일 행각이 뒤늦게 들통나 개망신하는 후손들을 목격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이 안 찬다. 조상이 지은 죄 자식대까지 대물림하랴 싶지만 나면서 보고 듣고 자란 게 무엇이겠는가. 할아버지 행적 아버지가 알고, 아버지가 행한 일 아들이 보게 돼 있다.
이번에는 삼의사 묘역 좌측의 임정요인 묘역에서 예의를 갖춘다. 북현무에서 원효대사 동상이 내려다보는 나지막한 구릉이다. 자좌오향이니 정남향의 양지바른 곳이다. 같은 효창공원 내에서도 용맥의 국세에 따라 좌향이 달라짐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백범 묘역 쪽의 우백호가 멀고 좌청룡을 이루는 숙명여대 신축 캠퍼스가 바로 턱 밑이어서 답답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마음이 편안하다. 이 묘역이 있어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확보된다 생각하니 새삼 옷깃이 여며진다. 해방 직후 좌·우익 진영의 혼란과 미군정의 싸늘한 시선 속에 이분들의 유골을 봉환해온 백범의 의지와 추진력에 경탄할 뿐이다. 모두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오늘을 사는 민초들에게 본이 되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풍수에서 음택은 죽은 자의 무덤을 찾는 일이다. 역사를 살다간 선인들에겐 반드시 행적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100년도 안 되는 세월을 잘못 살았다가는 후손들에게 미치는 화(禍)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한순간의 오판으로 자칫 잘못 살았다가는 조상이 아니라 원수가 돼 버리고 만다.
2002년 10월22일 개관한 백범기념관 2층에는 그가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운명할 때 입었던 상의가 피 묻은 채 전시돼 있다. 안두희는 1996년 10월23일 인천 자택에서 박기서가 휘두른 ‘정의봉’이란 몽둥이로 맞아 비참한 생을 마감했다. 이 또한 우리 현대사의 악순환이고 어두운 그림자다.
기념관 입구에는 미얀마산 백옥으로 조성된 거대한 백범 좌상이 대형 태극기 앞에 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백범 묘역이 보인다. 그의 생애와 업적에 비해 묘 앞의 석물이 너무 초라하다. 과분하게 조상 묘 단장만 해놓은 후손들이 이곳에 와 볼 일이다.
시인·온세종교신문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