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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신사, 일본의 선택적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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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데츠야 도쿄대 교수










이 글들은 국제문제전문월간지인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최신호에 실린 야스쿠니 신사 문제를 다룬 것으로 전재를 허락해 준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지사 측에 감사드린다.<편집자 주>


 


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들만 분사시키면 야스쿠니 신사는 호국전사들의 국립묘지로 정당화 될 수 있는가? 1874년 대만 침략이후 계속된 아시아 침략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지금 일본에서는 역사에 대한 선택된 기억들을 조작하면서 국립 야스쿠니 신사를 건설하려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다. 과연 역사적 진실은 무엇인가?


2006년 7월 20일에 공개된 도미타 도모히코 (Tomohiko Tomita) 전 궁내청장관이 남긴 메모에 의하면 1) 히로히토 천황은 동경재판(1946년 5월- 1948년 11월)이라고 불리는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은 14명의 A급 전범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자 참배를 중단을 결심했다고 한다. 전 육군대신 겸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를 포함한 7명은 사형 당했고 나머지 7명은 감옥에서 사망했다.














 



 


 


 


▲ 2006년 12월31일 일본에서 참배객들이 신년 기도를 하기 위해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 들어서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일본의 고유 신앙인 신도(神道)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는 1869년 막부정권 말기의 혼란기와 왕정 복고2) 기간 중, 반란을 일으켜 메이지 시대의 개막을 열게 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내전에서 사망한 자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것이 바로 야스쿠니 신사이다. 그 이후 일본 내의 여러 신사 중에서도 전몰자를 위한 유일한 신사였던 야스쿠니에는 근대화된 일본의 첫 번째 해외 원정이라고 할 수 있는 1874년 대만 출병에서부터 청일 전쟁(1894-1895), 러일 전쟁(1904-1905), 제 1차 세계대전(1914-1918), 만주 침략 (1931), 중일 전쟁 (1937-1945), 태평양 전쟁 (1941-1945) 그리고 일본 패전에서 죽은 246만 여명의 ‘호국 영웅’들이 합사됐다.


‘대일본제국’ 시대(하단 기사 참조)의 천황은 국가와 종교에 대해 막대한 영향력을 소유한 존재인 동시에 군총사령관의 역할을 맡고 있었고 일본인들과 식민지 국가의 국민들은 천황의 신하들처럼 여겨졌다. ‘국가에 대한 도리는 국가 위기 상황 시 천황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전사자들은’ 성스러운 전쟁’에서 국가를 위해 싸운 귀감으로 여겨지면서, 야스쿠니 신사는 군인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고 전쟁을 위해 국민 전체를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패전 이후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 또는 ‘전쟁 신사’, ‘침략 신사’로 간주된 야스쿠니 신사는 과거의 호국적 성격을 잃게 되었다. 1945년 12월, 연합군총사령부가 공포한 ‘신도에 대한 법령’;에 따라 야스쿠니 신사는 국가에서 분리되었다. 한 종교 단체가 관리하게 된 야스쿠니 신사는 1946년 공포된 헌법에서 규정한 정교 분리의 원칙에 따라 카톨릭 교회나 사찰과 같은 종교 시설로 인정됐고 이러한 상황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2001년 총리로 임명되었을 때부터 2006년 총리직을 마감할 때까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매년 중국인들에겐 승전일이고 한국인들에겐 광복절이지만 일본인들에게는 패전일인 8월 15일에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했다. 결국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일본, 중국, 한국간의 가장 중요한 외교적 문제로 비화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고이즈미 총리는 그의 행동에 대한 ‘다른 국가들의 비판에 대해 전혀 굽히지 않고 항상 일본의 입장을 주장하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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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제국도 역시 일본과 같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르 몽드 디플로마티크, 07.03.15)


많은 정치인들과 언론 매체들은 A급 전범들을 야스쿠니 신사에서 분사할 수없는 가를 자문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확고히 하기 위해 도미타 도모히코 전 궁내청장관이 남긴 메모를 이용해 ‘히로히토 천황조차 전범들이 추모되고 있다는 이유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거절했기 때문에 고이즈미 총리 역시 참배를 중단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도미타 전 장관의 메모는 많은 역사적인 문제들을 은폐하고 있다.


도미타 메모가 은폐하고 있는 문제들


분명 야스쿠니 신사에서 전범들이 추모되고, 공식적인 방문이 강행되고 있다는 것은 전쟁에 대한 일본의 책임이 부인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물론 종전 후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한 총리들 중에서 그 누구도 이러한 책임을 공공연하게 부인하지는 않았다. 고이즈미 총리는 일본 정부의 이름으로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표명한 사죄를 재확인했다. 도미이치 총리는 사죄문에서 ‘과거에 일본이 잘못된 정책을 펴면서 식민 통치와 침략을 통해 이웃 국가들에게 가했던 엄청난 고통과 피해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깊이 사죄한다.’ 라고 밝혔다.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고 있는 정치 지도자들은 아시아를 서구의 식민 통치로부터 해방시키고 일본의 ‘생존과 보호’를 위해 일으킨 전쟁이며 결과적으로 책임에 상관없이 모든 군인들을 전범으로 고발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들은 참전 군인들이 승전국들에 의한 일방적인 재판으로 인해 전범으로 부당하게 낙인 찍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가 전몰자 추모에 A급 전범들이 포함된다는 사실에만 국한된다면 논쟁의 여지는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이런 경우,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A급 전범들을 야스쿠니 신사에서 제외시키면 되는 것이다. 사실 A급 전범이라는 ‘개념’을 통해 연합국은 1928년 전쟁 준비기부터 1931년 발발한 만주 사변 그리고 태평양 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 지도자들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한 재판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재판과 관련된 기간은 1928년 1월부터 1945년 8월까지였다. 다시 말하면 한국과 대만과 같은 식민지 국가를 포함한 대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아시아 국가를 침략한 역사적 사실은 전혀 문제시되지 않았다.


종전 후 일본 전범을 재판한 연합국인 미국,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역시 식민 통치를 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결국 이들 국가들은 식민 통치 문제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평가할 의사도 자질도 없었다.


십만 명의 오키나와인 사망자들












 



 


 


▲ 작자 미상 ㅣ 진주만의 미 함대를 격파하는 사무라이, 1941


 


1874년 대만 침략을 비롯한 일본의 식민지 전쟁 중 사망한 모든 전몰자들은 야스쿠니 신사에서 추모되고 있다. 대만에서의 식민 통치는 점령군에 대항하여 군사 반란을 일으킨 중국계 대만인들과, 저항하는 섬 원주민들을 무력적으로 탄압하면서 이루어졌다. 또한 한국은 1876년부터 일본의 군사적 공격을 받았으며 일본에 대한 반란은 무력 진압됐다. 일본 군인들과 이 기간 동안에 있었던 전투에서 사망한 모든 전사자들은 야스쿠니 신사에서 참배의 대상이 됐다. 이들을 추모하며 A급 전범자들의 편에 선 일본 정부는 식민 통치를 계속해 부인하고 있다.


이 점은 단지 극우 개헌론자들만이 관련된 것이 아니고 A급 전범들의 책임을 인정하고 있는 ‘진보주의 지식인들’과도 관련이 있다. 실제로 이들은 메이지 시대에 일본이 서방 선진국들과 같은 위상에 설 수 있을 만큼 놀라운 성공을 이루어 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1920년대부터 일본은 위험한 국가가 됐다. 청일 전쟁이나 러일 전쟁이 일어났던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일본군은 침략주의적 성격을 띠지는 않았지만 중국을 공격하면서부터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도미타 전 장관이 남긴 메모가 언론에 의해 공개되었을 때 강조된 것은 ‘쇼와 천황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중단한 이유가 야스쿠니에 A급 전범자들이합사된 것을 불쾌하게 여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결과 오직 전범자들만이 비난받아 마땅한 것처럼 여겨졌고 천황의 책임은 면제됐다. 이것은 히로히토 천황이 일본의 최고 책임자이며 군 총사령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경 재판에서 면책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다. 당시 천황은 재판에 대해서 어떠한 우려도 표명하지 않았다. 전쟁 후에도 천황은 헌법 제 1조에 따라 ‘일본의 단일성과 상징’으로 천황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고 미국은 일본이 공산주의 진영으로 넘어가는 것을 걱정하여 천황을 이용하고자 했다.
과거에 부인됐던 천황의 책임이 신사 참배 사건으로 인해 다시 한 번 은폐됐다.


부인되고 있는 사실은 이것만이 아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병사 개개인의 신상조차 부인하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는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며 비참하게 죽어 간 병사들을 숭고한 영웅으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왜곡된 사실 뒤에서 일본 식민지 출신의 군인들의 죽음은 잊혀지고 있다. 2만 명 이상의 한국 군인들과 비슷한 규모 대만 군인들을 포함해서 거의 5 만 명에 달하는 일본 식민지 출신 군인들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사실 제국주의 정책, 즉 다시 말해 동화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은 한국인들과 대만인들에게 ‘일본 제국과 국가를 위해 목숨 바쳐 충성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징집됐다. 지원병의 경우에도 주요 참전 동기는 민족 차별을 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결코 신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978년 처음으로 한 대만인 사망자의 유족들은 사망자의 이름을 공동 추모식에서 제외시킬 것을 요구했다. 그 이후로 한국인 유족들도 같은 요구를 했고 결국 이 일은 재판으로까지 이어졌다. 유가족들은 ‘침략적 군국주의의 상징인 이곳에서 식민지화를 통해 우리를 침략, 지배한자들과 함께 고인이 추모되는 것은 분명 용납할 수 없는 불명예이다.’ 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야스쿠니 신사 측은 ‘이들이 사망 당시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사망 후에 더 이상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3)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거부해오고 있다.


더불어 1945년 봄에 발발한 오키나와 전투에서 사망한 민간인들 문제도 중요한 쟁점이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 위치해 있고 과거 류큐 왕국이라 불렸던 오키나와는 근대 일본 식민지화의 첫 번째 시기인 1879년에 일본 정부에 의해서 침략 당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무렵에 일본군은 소위 ‘민족과 군의 일체성’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민간인들을 전쟁에 끌어 들였다. 이 비극적인 오키나와 전투에서 약 십만 명의 민간인들이 첩보원으로 활동 하거나 집단 자살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현재 이들 대부분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다. 4) 이렇게 일본군이 일으킨 전쟁의 희생자들이 일본군의 협력자로 둔갑 한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전사자 2백46만 명 중에서 약 2백만 명이 태평양 전쟁에서 죽었다. 이들의 약 60 %는 전투 중에 사망한 것이 아니라 ‘굶어 죽었다.’ 예를 들어, 특히 뉴 기니 근처로 배치된 병사들 대부분이 열대 정글에서 길을 잃고 식량이 떨어져서 죽게 되었고 이들의 시신은 정글에서 썩어야만 했다.


도미타 전 장관이 남긴 메모는 야스쿠니 신사 공식참배를 중단시키기 위해 이용됐다. 하지만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메모가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소 다로 전 외상을 포함한 일부 영향력 있는 정치인들은 황실 측의 야스쿠니 방문을 이끌어 내기 위해 야스쿠니 신사의 국영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주요 골자로 하는 법안을 집권 자민당 국회에 제출했다. 이전에도 자민당은 1969년부터 1974년까지 5년 연속 국회에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국가적 후원을 위한 법안’을 제출한 바 있다.  당시 이 법안에 대해 일부에서는 ‘군국주의 부활의 가능성’을 들어 반대했고 결국 법안은 부결됐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오늘날 자민당의 영향력 있는 일부 정치인들은 ‘정부의 결정 하에 A급 전범들을 야스쿠니에서 분사시키는 한편 중국과 한국의 동의를 얻어 총리와 천황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야스쿠니 신사를 국영화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이것은 교전을 금지하고 있는 현행 헌법 제 9조를 개정하고 ‘자위대’의 존재를 분명히 명시하는 신헌법 계획안에 포함된다. 다시 말해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는’ 무력 사용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베 신조 총리는 그의 임기 동안에 헌법 개정을 위해 힘쓸 것이라는 의사를 분명히 표명했다. 이라크에 육상 자위대를 파병할 당시 일본에서는 만일 전사자가 발생할 경우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시킬 것인지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모든 것이 마치 21세기의 일본 정부가 ‘일본 군대’를 다시 구성하고 그 군대를 지속시키기 위해 국영 야스쿠니 신사를 건설하려는 것처럼 진행되고 있다.

3월호(07-03-15)기사임. 필자:타카하시 테츠야(Tetsuya Takahashi) 번역:신승호-


1) 이 메모는 니혼게이자이 신문에 의해 공개됨
2)내전 이후 쇼군의 막부정권은 해체되었다. 1868년 1월에 일본 제국이 완전히 복원되면서 1912년까지 지속되었던 메이지 시대가 열렸다.
3) 야스쿠니 신사 부사제의 1978년 선언문
4) 1985년 일본 정부는 유가족들에게 보상금 지불을 약속했다. 


필자소개:동경 대학교 교수이자 「야스쿠니 신사의 문제점, Chikuna, Tokyo, 2005」의 저자이다. 본문은 2006년 12월 2일, 프랑스 파리 8대학에서 열렸던 학술 회의에서 발표된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원문은 국제 현대 자료 도서관(BDIC)의 정기 간행물인 <현대 역사를 위한 자료>에 발표될 것이다.<르 몽드 디플로마티크, 07.03.15>


 







대 일본 제국의 건설


1874년
오키나와 소재 일본 상인들이 학살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 정부는 대만에 군대를 파병, ‘대일 제국’ 건설의 첫 단계


1894년 8월~1895년 4월
첫 번째 청일 전쟁. 승리한 일본은 대만, 펑후 제도, 요동 반도를 점령.


1904년 2월~1905년 9월
만주 지역을 둘러싼 분쟁으로 일어난 러일 전쟁. 포트 아더에서 기습을 당한 러시아 함대는 일본 남서쪽에 위치한 쓰시마 섬해전에서 완전 괴멸. 이는 근대사에서 아시아 국가가 서구 국가를 이긴 첫 번째 승리임.


1910년
일본, 당시 조선이라고 불렸던 한국을 강제 합병


1931년 9월
중일 ‘15년 전쟁’의 초기. 일본, 만주 지역 강점, 수탈 자행


1937년
일본군 병사들이 중국인들의 총격을 받았던 북경의 노구교(Marco Polo) 사건 이후로 상해는 일본 통치하에 놓임, 남경 약탈, 결국 2차 청일 전쟁 발발


1941년 12월 8일
진주만에 있던 미국 해군기지에 대한 일본의 공중 기습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


출처: 「일본의 원동력, 쟝 프랑스와 사부레트(Jean-Francois Sabouret), Saint-Simon, 파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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