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과 일본의 관계는 ‘수탈과 저항’의 역사로 표현된다. 아베 개헌정권은 우경화로 치달으며 역사왜곡을 노골화 하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과거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었던 일본인 친구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일본 내 양심적인 시민운동그룹과 지식인에게 힘을 주는 일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건국훈장을 추서한 일본인은 저명한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1880~1953)가유일하다. 그것도 2004년에 이루어졌다. 이밖에 건국훈장을 받은 외국인은 쑨원 장제스 등 중국인 31명, 영국인 6명, 미국인 3명, 아일랜드 인 3명, 캐나다인 1명으로 모두 45명뿐이다.
식민지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들은 식민지침탈의 첨병노릇을 했다. 일본 하층민에게도 조선은 부와 권력을 쥘 수 있는 ‘신천지’였다. 극소수이지만 착한 일본인들의 활약은 돋보인다. 정부가 조선의 독립을도왔던 이들을 소홀히 했던 것은 대다수가 사회주의 계열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부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대한다는 취지에서 2005년부터 북한정권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160여명을 발굴, 서훈했다.
◆자유법조단 변호사 맹활약 = 식민지조선을 도운 일본인 친구를 꼽자면 변호사가 많다. 후세 다쓰지와후루야 사다오(古屋貞雄 1889~1976)는 수많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를 변호했다. 이들은 당시 합법적 좌파정당인 노동농민당 소속이었다.
후세는 조선인 이재민의 구호와 인권옹호에도 힘쓰고, 일제 식민통치를 비판했다. 조선총독부도 그를부담스러워했고,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은 각종 인쇄물에 ‘우리의 변호사 후세 다쓰지’라고 존경심을 표시했다.
한편 1910년대에는 하나이 타쿠조(花井卓藏) 우자와 소오메( 澤總明) 변호사가 신민회와 3·1운동 변호를 맡았다. 일본 최초의 사회주의 변호사로 후세 다쓰지와 쌍벽을 이뤘던 야마자키 게사야(山崎今朝彌 1877~1954) 변호사는 1923년 관동대지진 후 조선인학살이 벌어질 때 이를 비판했다.
1920년대 후반에는 이로카와 고타로(色川幸太郞) 변호사가 전남 하의도의 농민조합 결성을 지원했다. 고이와이 기요시(小岩井爭) 변호사는 하의농민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 때 무료변론을 자청했다. |
◆소작투쟁 지도한 아사히 겐즈이 = 대중운동가 중에서도 식민지조선을 도운 사람이 있다. 노동농민당 소속 아사히 겐즈이(朝日見瑞 1898~1988)는 1927~1928년 전남 신안군 하의도에서 하의도농민조합을결성, 소작쟁의 이끌었다.
일제는 조선에서 식량을 수탈하며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삼았다. 당시 소작쟁의는 목숨을 건 생존권 투쟁이었으며, 독립운동이었다.
당시 아사히는 일본 노동계에서 ‘저 자는 조선인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조선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하의도농민운동사’를 집필한 김학윤(71) 하의3도농지탈환운동 기념사업회장은 “우리의 은인”이라고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과 김학윤 회장은 아사히에 대한 건국훈장 서훈을 추진하고 있다.
1930년대 후반 전시동원체제로 들어서며 일본과 조선의 대중운동은 지하로 들어간다. 노동자 이소가야스에지(磯谷季次)는 함흥 흥남에서 적색노조활동을 하다 1932년 체포되어 10년간 수감됐다.
◆조선을 사랑한 비운의 여인 가네코= 조선인 아나키스트 박 열과 함께 일왕을 암살하려 했던 가네코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 옥사)도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아나키스트인 가네코가 조선의 독립을위해 일왕을 암살하려 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어린 시절 조선에서 3·1운동을 목격하고 ‘조선인의반항운동에 동정’을 갖게 된 그의 행동이 조선 사람에게 용기를 주었음은 분명하다. 그녀는 죽어서 조선 땅에 묻혔다.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이규수 교수는 “한일관계가 갈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착한 일본인에 의해 우호적 관계도 있었다”며 “이들을 정부에서 발굴하고 표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내일신문, 07.08.14> |